보쿰 숲길서 만난 사람
코나의 '마녀 여행을 떠나다' BGM 추천합니다! :D
독일 서부의 작은 도시 보훔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학 코스 시작까지 시간이 남았다.
독문학과를 졸업했지만, 막상 독일인을 만나니 입이 떼지 질 않았다. 한마디 가까스로 하면, 열 마디가 쏟아질 것 같았다. 빨간 머리 앤이 살게 된 초록 지붕집은 아니었지만. 난 하얀 벽돌집 2층 작은 방에 둥지를 틀었다. ‘장미 나무 길’이라는 예쁜 주소를 가진 집이었다. 주인집 독일 가족들은 친절하게 대했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서로 간 보이지 않는 담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방에는 오래된 티브이가 있었다. 뒷부분이 뚱뚱하게 튀어나온 제품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화면 속 사람들은 외계 신호를 주고받으며, 울고 웃었었다.
상점에서는 긴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약이나 설명이 필요한 물품은 독일 가족에게 부탁했다. 가끔 슈퍼에 가서 무, 파, 중국 양배추를 집어 계산했다. (Chinakohl; 치나콜. 독일에서는 배추를 중국 양배추라고 불렀다).
독일어로 꽉 차 있는 일상.
얼마 전까지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났다. 컴퓨터도 카카오톡도 없었다. 엄마가 비싼 국제전화 카드로 전화할 때만 한국과 연결될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뉘 일 집에서조차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실감 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책하러 나갔다.
한국에서 즐겨 듣던 가요가 담긴 MP3 플레이어를 챙겼다.
독일로 출국 전 대학로에서 고시 준비 중이었던 친구와 노래방엘 갔었다. 그 친구의 고시생 친구들과 함께.
친구들이 코나의 ‘마녀 여행을 떠나다’를 불러주었다. 난 마녀처럼 요술 구슬과 마법의 빗자루는 없었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친구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얀 우유 한잔씩 마시기, 레몬 사탕은 3개, 자기 전엔 꼭 이 닦기. 향수를 달래주는 노래를 들으며 터벅터벅 숲 속으로 걸어갔다.
걷다 보면 마주치는 이국적인 풍경들.
호랑이 만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무서웠다. 깊은 숲 속에서는 개들이 목줄 없이 산책을 즐기기도 했었다. 보호장치 없이 사파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견종들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주인을 따라 걸었다.
산책 중인 독일인들은 일상을 떠나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있는 듯했다. 서로 방해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길을 걸었다. 어학연수 차 있었던 미국에서 방긋방긋 웃어주던 미국인들과는 딴판이었다. 나는 무표정한 독일인들을 마주하며, 화난 건지 눈치를 보기도 했었다.
어학연수 개강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새로운 환경에 천천히 적응해 갔던 나는 또다시 출발을 준비했다. 온몸에 긴장감에 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 겨우 인사말 하는 내가?
독일 생활은 연애 기간이 결혼생활로 바뀐 것과 같았다. 배낭여행 때 들뜨고 흥분되는 여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지난 몇 주간의 시간은 나를 작게 만들었다. 나를 끝없이 의심했다.
그날은 익숙하지 않은 숲길로 걸어갔다. 여름의 열기를 달래는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숲은 끝없이 길을 안내했다. 두 팔 벌려 안아도 모자란 아름드리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숲은 촉촉한 나무 향을 뿜으며 나를 매혹했다. 하염없이 걸었다. 집에는 나를 기다리거나 궁금해할 사람이 없었다. 자유는 짙은 외로움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한참을 걷자 그루터기가 보였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은 없어졌으나 발바닥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털썩 주저앉아서 얼마나 있었을까?
“무슨 문제 있어요?”
독일 아저씨가 불쑥 말을 걸었다. 종을 알 수 없는 큰 개는 옆에서 코를 벌름거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퉁명스럽지만 걱정스러운 아저씨 표정에서 진심이 보였다. 보기 드문 동양인 여자가 숲 속에 앉아있으니 무슨 일 있나 싶었었나 보다.
“아뇨! 괜찮아요!”
난 씩씩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저씨의 짧은 대화는 나를 일으켰다. 누군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독일 가족들과 대화는 매일 조금씩 길어졌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마음으로, 산책길을 나섰다.
칸트와 괴테가 즐겨했던 산책을 나도 하고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와 철학가가 태어난 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했다.
모든 것이 익숙한 한국과 차단되어 일상은 불편하고 어색했었다.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목이 메기도 했었다.
‘마녀 여행을 떠나다’ 노래를 들으면 코끝에 닿았던 보훔 숲의 향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를 걱정하던 독일 아저씨도.
낯선 나라에서 용감했던 나를 떠올리며, 오늘 산책길을 나서야겠다.
Germany Photo by Hangphil 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