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는 내 마음속 힘에 있다.
행복한 전업주부를 꿈꾸던 대학 4학년 때, 우연찮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또 공기업으로 전직하게 되면서 23년 공직생활을 했다.
지금은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대학 4학년 때 꿈이었던 행복하고 바쁘고 헛헛한 전업주부로 7년째 살고 있다.
30년 전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결혼 잘하는 게 세상 잘 사는 것이라고 믿었던 친정아버지 뜻으로 가정관리학이 내 전공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바라보던 세상에는 가정관리학과 나온 여자가 결혼을 제일 잘하는 세상이었다.
라떼는 가정관리학과가 있었지만 현재는 자취를 감춘 슬픈 학과이다.
4학년 때, 전업주부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 필수충분조건인 남자가 없었다.
친구들은 취업 준비하느라 도서관에 있었다.
같이 놀 친구도 없고 할 일이 없는 나는 무료했다.
무료한 나는 9급 행정직 시험에 한 번 도전해 보자 싶어 공무원 시험 관련 책을 구입했다.
여름방학 3개월간 집 앞 독서실에 틀어박혀 공무원 시험공부를 했다.
9월에 바로 합격했고, 11월 공무원 교육원에서 1개월 집합교육을 받은 후, 다음 해 1월 발령이 났다.
2월 대학 졸업식이 있어 근무 중이었던 부서 과장님께 말했다.
"과장님. 저 내일은 하루 결석하겠습니다. 학교 졸업식에 가야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23년 공무원과 공기업 생활은 눈물콧물 없이 말하기 힘들어 지금은 말 못 하겠다.
집에서 공주라 불리던 나의 초창기 직장생활 별명은 짤순이였다.
하도 잘 울어 짤순이였다.
지금의 나는 세상 풍파 잘 헤쳐 나오면서 울음도 참을 줄 아는, 잘 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노처녀일 때 연하의 남편과 만나 결혼했고, 라떼의 시집살이도 겪고, 사랑스러운 아이도 둘 낳으며 전투적으로 살았다.
뒤돌아 보면 전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전투에서 조금 물러나서 살 수 있지 싶다.
남편과는 자본주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 재테크 등 생각이 일치하는 면이 많았다.
하지만 직장 생활하며, 육아하며, 재테크 공부하며, 라떼의 시집살이하는 생활이 어디 쉬웠겠는가?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도는 이석증을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지러워 토하고 출근했다.
남편과 상의해서 어느 정도 먹고살만하고, 직장생활 20년 넘어 명퇴금도 나오니 명퇴하기로 결정했다.
직장생활 23년이 지난 후에야 대학생 때 꿈꾸었던 전업주부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퇴직 후 첫 1년이 예상치 못 하게 힘들었다.
자면서 꿈꾸다가 헉! 하며 숨이 막혀 일어났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가졌던 나의 직함이 없어진 세상이 낯설었다.
나를 괴롭힌 상사와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내 의견도 말하지 못 한 연약한 내가 후회되었다.
항상 퇴직을 꿈꿨는데 막상 퇴직하니 가슴속 텅 빈 감정이 온몸에 느껴졌다.
직장에서 분명한 상명하복 질서가 싫어서 박차고 싶었는데, 전업주부 세계에서는 처음 접하는 무질서에 정신이 따라가기 힘들었다.
오래 보낸 직장 생활은 마음속에서 차차 정리하고, 새로운 세상 맞이가 필요했다.
지금은 두 세계가 명확히 내 마음에 자리 잡으면서 마음속 질서가 생겼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하나의 주체로 스스로 설 수 있는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나의 고유한 이름 "최땡땡"으로 살 수 있는 힘 말이다.
취업주부일 때는 "최땡땡"으로 불리지만, 진정한 나 자신인 "최땡땡"이 아니고 직장인 "최땡땡"이다.
전업주부일 때는 "최땡땡"으로 불리지 않고 "누구의 아내", "누구 엄마"라 불리면서 가지는 헛헛함이 있다.
결국은 나 자신 "최땡땡"으로 주체성만 있으면 취업주부로 살아도 전업주부로 살아도 나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으로 사는 삶은 보람된다.
타인이 보는 객관적 행복이 없어도 내가 느끼는 주관적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파랑새는 취업주부이던지 전업주부이던지 내 마음속에, 내 마음의 힘 속에 있다.
나는 이제 새로운 50대를 시작한다.
나를 찾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내 주체적 삶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