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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여사 Apr 03. 2024

갱년기 전문 상담 n년,
나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왔다

조기폐경을 겪은 산부인과 전문의의 리얼 경험담


"강철 체력" 

나는 나름대로 체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의대 시절에는 방학 때 15일씩 등산을 가기도 했고 예방의학 레지던트 시절에는 연구과제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1~2일은 거뜬히 밤을 새우기도 했다. 무엇보다 산부인과 의사는 하루도 편히 잠을 잘 날이 없는 고단한 직업이다. 당직은 내 생활이었고 그것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2016년 8월 대구로 이사한 뒤 2개월 만인 10월에 갱년기 클리닉을 개업하였는데 이것은 분만실과 응급실 당직으로 단련된 나에게도 꽤 강행군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해 가을부터 왼쪽 어깨에 동결견이 발생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다. 동결견이란 특별한 이유 없이 어깨의 통증과 운동 제한이 발생하는 질환인데 속칭 ‘오십견’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당시 내 나이는 만으로 43세였다. ‘오십견’ 증상이 생기기엔 내 나이가 너무 젊다고 느껴졌지만, 같은 상가에 있던 슬링 운동센터에서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면서 증상은 점차 나아졌고 이 증상을 과로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그렇게 넘어갔다. 


 2017년부터는 수면장애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이다. 지인들에게 내가 잠만 없었어도 학력고사 성적이 10점은 더 올랐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었다. 이런 내가 잠을 못 자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자려고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와버려서 잠을 잔 건지 눈을 감았다 뜬 건지 헷갈리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새벽 1시 2시 3시… 이렇게 먼동이 트는 날들이 많아졌다. 결국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을 주게 될까 걱정되어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체중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8년에는 약 5kg이나 체중이 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갱년기의 서막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냥 과로 때문인가 보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보다, 내가 너무 많이 먹는구나, 내가 너무 운동을 안 하는구나 하면서 넘어갔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대구에 내려와서 나도 아이들도 처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갱년기 클리닉을 운영하느라고 과로도 했으며 당연히 식이, 운동도 엉망이었다. 


선생님 혹시 갱년기 아니에요? 검사 한번 받아보세요


 나에게 갱년기가 찾아왔음을 처음 인지한 것은 2019년 4월이었다. 당시 나는 학회에 연자로 초빙받아서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일에 진척이 없었다.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기만 했다. 온몸이 아프고 녹아내리는 것 같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열이 있거나 근육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의사 앞에 가서 문진을 받는다면 ‘신경성’이나 ‘스트레스성’이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발표일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마음은 초조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다가 같이 일하는 간호사에게 이런 고충을 토로하자 혹시 갱년기일지 모르기 검사를 받아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도 당시의 나는 갱년기보다는 다른 질환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 그래, 몸이 이렇게 아픈 건 진짜 정상이 아니야. 뭔가 분명히 있을 거야.”


나는 자궁적출술을 받은 후라 월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서 혈액검사를 해야 했다. 호르몬 검사도 했지만 간기능, 신장 기능, 당뇨 등 설명되지 않는 피곤함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을 배제하기 위하여 다양한 검사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스트로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검사가 정상이었다. 그날 바로 호르몬 복용을 시작했고 머리에 낀 안개는 다음날 바로 걷혔다. 발표 자료는 이후 3일 만에 완성되어 무사히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호르몬치료를 시작하면서 컨디션은 돌아왔지만 당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내 나이 46세. 20대 30대를 힘든 공부를 하며 보내고, 40대 초반은 기반을 닦기 위해 보내고. 이제야 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젊다고 생각한 나에게 갱년기가 찾아오다니 허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렇게 피어보지도 못하고 인생이 저무는 건가, 그동안 고생한 게 너무 억울했다. 


처음 호르몬 검사로 갱년기임을 확인했던 날,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문장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엉엉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환자들에게는 그냥 인생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했던 내가 스스로 갱년기임을 자각했던 순간은 참 무력하고 못난 인간이었다. 내가 갱년기인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원망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었다. 남편은 내 말을 듣고 처음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부랴부랴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꽃다발을 사 와서 나를 위로하려고 애써주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면서 앞으로 좋은 일들만 많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때 나를 보듬어 준 남편에게 한없이 고마웠지만 정신을 좀 차리고 나니 앞으로 걸어가야 할 힘든 길이 머릿속에 떠올라 등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 나 이제 어떡하지. '


갱년기 환자를 몇년에 걸쳐 상담해 온 나의 눈앞이 깜깜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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