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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워수 Aug 22. 2023

[비행일기] 인상 깊었던 갤리 토크

첫 지원 합격


비행기 주방을 갤리라고 한다. 구글 찾아보니 꼭 비행기뿐만 아니라 기차, 배에 있는 음식 준비하는 컴파트먼트를 다 갤리라고 하네요 요건 몰랐네!

이 갤리에서는 음료 음식 준비 외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다.


잠자는 조가 먼저 레스트로 가면 비행기 지키는 조가 갤리에 남아서 다음 서비스도 준비하고 승객 케어도 하고 화장실 체크도 하고 나는 휴지도 접고 ㅋㅋㅋ 그러는 와중에 짬나면 펼쳐지는 짝지와의 갤리톡!

대부분의 외항사가 그렇듯 우리는 팀 비행을 안 하기 때문에, 오늘 비행 브리핑에서 처음 만난 크루랑 길게는 세네 시간까지도 같이 보낸다. 그러면서 별별 얘기를 다 하게 되고요?


갤리에서 먹은 나의 도시락, 오삼불고기와 달걀말이

지난달 같이 비행한 함부르크 사는 A랑은 처음부터 쿵짝이 잘 맞았다. 나보다 시니어리티가 한참 높길래 비행 한지 얼마나 됐어? 물으니 23년 됐다고, 와 나는 이제 9년 찬데 대박이다 시간 진짜 빨리 가지 die Zeit vergeht sehr schnell 이런 얘기로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

짝지는 대학에서 패션 전공하고, 이탈리아에서 잠깐 언어 공부 겸 인턴십 겸 하다가 다른 일반 직장엘 꽤 오래 다녔다고 했다. 그 후 삼십 대 초반에 우리 회사 입사해서 승무원 생활 하고 있다고. 나도 ‘이십 대 후반에 승무원 됐고 그전에 한국에서 직장 생활 이년 했어~ 대학교 다닐 때 광고회사나 외국계 기업 마케팅 팀 들어가고 싶었고 또 동시에 승무원도 되고 싶었는데, 같이 준비하다가 전 직장이 먼저 날 뽑아서 다녔는데 생각보다 많이 다르더라. 비행 재밌을 거라 어렴풋이 상상은 했었는데 이렇게 잘 맞을 줄 몰랐어, 다른 거 해보고 나니 확실히 알겠더라’ 하니 짝지도 엄청 공감했다. 자기는 직장 생활 다시 하려야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회사 생활을 해봐서 다행이란다. 해봤으니 장단점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단다. 나도 동의! 항공사의 A는 아쉽지만 그래도 B, C, D 가 있어서 좋아 가 절절히 와닿는 달까?


​또 저저번 비행 짝지 B는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은 삼십 대 후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십 년간 독일 자동차 회사 PR을 했대서 내가 대학생 때 PR 회사 인턴 세 달 했는데 멋있고 좋은데 일 많고 갑을병정 중에 정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어머 PR은 어디나 똑같구나 하며 빵 터지던ㅋㅋㅋ B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웃들이 자기 비행 가는 거 볼 때마다 힘들어서 어쩌니 한다는데 자기는 크게 힘들고 불편한 게 없단다. 회사 다닐 땐 할 수 없었던, 비행하면서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참 많이 감사하단다. 그러면서 19~20살 정도 되는 (북미, 유럽, 중동 항공사들은 지원 최저 학력 요건이 고졸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 종종 있다) 비행한 지 얼마 안 된, 첫 직장을 승무원으로 시작한 일부 동료들을 보면 they take it for granted 한다고, 자기가 지금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미주로 아시아로 밥 먹듯이 가고, 비행 후 꿀 같은 오프, 월요일 아침에 늦잠 자고 일어나서 먹는 브런치 등. 2016년인가 언제 ‘평일 오전에 엄마와 코스트코에 갈 수 있는 삶이라니 참 감사하다’라는 내용의 일기를 쓴 적이 있어서 B의 말에 참 공감 갔다. ​

언제봐도 아름다워


승무원 준비할 때, 첫 지원 합격!으로 시작하는 후기를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부럽고 속상했다. 저 사람은 한 번에 합격하는데 나는 왜 계속 떨어지지? 내 스펙이나 조건이 좋으면 더 좋았지 쳐지는 부분 없는 것 같은데… 서류에서 떨어졌으면 깨끗하게 포기라도 할 텐데 왜 맨날 애매하게 면접 보고 떨어지지… 나이는 점점 먹어가고… 다음번 채용은 또 언제 뜨나 알 수도 없고… 출퇴근길 강남역 역삼역은 또 사람 왜 이리 많니 그래도 회사는 가야죠…근데 오늘도 또 회식이래 나는 돈다…​


매-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때의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삶을 잘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회사 생활을 안 해봤더라면 비행할 때 현타 올 때마다 “직장 다녔더라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일이 더 보람되지 않았을까?” “이런 일은 안 겪어도 됐지 않았을까?” 등의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발가락이라도 살짝 담가봤었기에 woulda, coulda, shoulda 가 없다. 아쉬움이 없다. 내가 누리는 것 혹은 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바랐던 것인지 가끔씩 찐하게 와닿는다. 인생에 버릴 경험 하나 없다더니 맞는 말이고요~

이 포스팅은 과거의 나에게, 그리고 현재의 나에게 쓰는 글이다. 회사 생활 힘들었는데 되돌아보니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너무나 고리타분한 소리지만 회사 다니며 승준이 하던 시절 이걸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럼 직장도 더 재밌게 다녔을 텐데. 근데 누가 말해줬어도 “아 뭐래 그냥 빨리 승무원 시켜달라고요” 했을 것 같다고 확신합니다.

지금도 맘에 안 드는 뭔가가 있는데 이 역시 나중에 되돌아보면 이런 연유였구나 하겠죠??

첫 지원 합격했는데 승무원 생활 잘 맞으시는 분들에게는 너무 잘됐다고 말씀드리고 싶고 (사실 아직도 조금 부럽긴 해요), 지금 다니는 직장 생활 만족하시는 분들도 너무 축하드리고, 나 같은 분들에게는 다 때가 있고 이유가 있는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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