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요일 Jul 24. 2023

왜 교사는 오은영을 비판하게 되었는가

적지 않은 교사들이 오은영에게 반감을 갖는 이유들

1. 오은영 박사의 처방


오박사의 솔루션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녹화된 화면을 잠시 보고 있다가 "잠깐만요!"를 외치고 방법을 줄줄이 읊는다. 그녀의 지식과 통찰력은 흉내 내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녀가 내놓은 솔루션 하나만큼은 누구라도 따라 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니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도 금방 교정이 될 수 있어 보인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아이가 나아져 가는지 방송을 통해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꽤 오랜 기간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송에서는 투약하는 장면이 나오질 않으니 순전한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약물치료가 병행될 가능성도 보인다. 학교에서 지나친 산만함, 폭력성을 보이는 아이들 대부분이 전문가를 만나면 약물치료를 병행할 것을 권유받는다.

 어찌 되었건 내 추측에 불과한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교사에게는 오박사 정도의 지식과 통찰력이 없다. 그 비디오가 제작진에 의해 편집되어 알짜배기 정보만을 담고 있어 아이의 파악에 용이하도록 구성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그토록 쉽고 빠르게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유능하고 뛰어난 교사에 의해 아이의 문제가 빠르게 파악되고 개선 방법을 명료하게 도출해 낸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처방은 학교 현장에 적용 가능한 것일까?



2. 학교 현장과의 괴리


 1) 훈육의 적용

 오은영을 비호하는 많은 신봉자들은 오은영 교수가 아이의 감정을 무조건 수용하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훈육의 중요성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은영 박사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러한 훈육은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는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말썽 부리는 아이를 손으로 강하게 누르고 신체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방법을 권위 있는 오은영 박사가 아닌 일개 교사가 행한다면, 더욱이 그 부모가 교사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교사는 아동학대로 고소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적인 훈육이 아닌 오은영 박사가 제시한 다른 방법들은 어떠한가. 'Don't do that!',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교사들이 과연 그것을 모르고 있을까? 아니면 알고도 안 하고 있을까? 교사에 임용되고 초임교사 때부터 귀에 피딱지가 앉게 배우는 것 중 하나가 학생들과의 대화법이다. 학생과 학교 현장에서 수업시간은 그런 허울 좋은 방법론 몇 가지를 넣어 해결되는 뻔한 알고리즘이 아니다. 떠드는 아이에게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는 "떠들면 안 돼!"라는 단호한 교사의 말의 유효시간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길어야 5분이다. 길지 않다면? 떠드는 아이에게 지적을 하는 순간에도 다른 아이들의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 이미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을 단호하게 "안 돼!"를 말하고 있다. 떠드는 이야기라면 교사의 인내로 어찌어찌 극복한다고 치자.

 2주 전쯤, 다른 학급의 학생이 교사가 다툰 아이를 혼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혼나는 와중에 상대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아이가 양팔을 붙잡는 데도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상대 아이에게 발길질을 하고 얼굴에 주먹을 꽂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지 말라는 단호한 교사의 말이 없어서였을까? 힘껏 아이를 잡아챈 교사의 노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아이는 제지되지 않았다. 지나가던 내가 세차게 윽박을 지른 뒤에야 폭력이 멈췄다. 그 폭력을 멈추는 과정에서 나도 그 선생님도 아동학대 가해자가 될 요건은 모두 갖추고 말았다.


2) 온건적인 방법의 적용

 위의 방법이 요즘 수많은 교사를 아동학대 가해자로 몰고 있으니 학교에 적용하기 힘든 방법이라는 건 더 설명하지 않겠다. 온건적인 방법 중에서도 위에서 말한 단호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가 되는지도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 믿는다.

 그 외에도 오박사는 많은 솔루션을 제시한다. 아이의 감정을 캐치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게 하는 것,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시도하기 쉬운 일들을 시키는 것, 약속을 정하는 것 등등. 그 방법들은 무효하지 않다. 이론으로 무장하고 수많은 임상을 겪은 전문가의 말인데 그 효과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아이 개인의 특성에 맞춰진 것이다. 아이들의 특성마다 솔루션이 다르다.

  하지만 학교는 개개인에게 맞추어 주는 곳이 아니다. 한 반의 30명 학생에게 다 다른 방법을 행할 수는 없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이 작은 사회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엄연히 학생의 몫이다. 교사가 조력자의 역할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구성원에게 입맛대로 메뉴를 바꾸어 대령해 줄 수는 없다. 차분함을 갖지 못하고 쉽게 흥분하여 5분도 앉아 있을 수 없는 학생에게 얌전히 독서를 시키는 것과 부끄러움이 많고 자기표현이 어려워 일어서서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 학생에게 발표를 시키는 방법은 다르다. 하지만 교사는 알면서도 두 아이에게 같은 방법으로 독서를 시키고, 같은 방법으로 발표를 시킨다. 아이에 대한 배려가 없는 몰지각한 교사라서가 아니다. 모든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교육을 하려고 한다면, 결국은 아무도 만족스럽지 못한, 교과 진도에 치이고, 성취기준에 미도달하는 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다.


3) 학교는 어디까지나 단체생활

 오은영 박사가 하는 것은 치료이다. 질병에 가까운 아이의 상태를 뜯어고쳐야 한다. 관찰도, 솔루션도, 행하지는 치료도 모두 1:1이다. 학교와는 다르다. 학교에서 교사가 한 아이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두 학교를 다녀봤으니 어렵지 않은 질문일 거다, 하루종일 교사와 개인적인 담소를 나누지 못하는 학생이 태반을 넘는다. 쉬는 시간에 교탁 근처는 친화력이 높고 외향적인 인싸들의 지정석이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마저도 교실에서 다툼이 난다면 오롯이 다툰 학생들의 시간이 되어버린다. 매 시간마다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 교실이다. "선생님, 쟤가 ~~ 했어요."의 고자질은 하루에 수십 번 이뤄진다. 그 하나하나의 작은 민원에 대응하지 않았다가는 학생의 말을 무시한 교사가 되기에 학부모의 눈 밖에 나서 민원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니 작은 고자질에도 다 대응해주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을 1:1로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방과 후에 남겨서 대화를 하려 해도, 방과 후 시간은 사교육이 이미 점령한 지 오래다. 교사와의 대화에 할애되는 시간을 달가워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많지 않다. 마지막 교시가 늦게 끝나고 종례가 조금만 길어져도 학원 갈 시간이라며 성화를 하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이렇듯 교사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관찰하려고 애쓰긴 하지만, 결국엔 전체를 가르치고, 전체에게 말하고, 전체를 교육해야 한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한 명 한 명 특성에 맞추어 누구에게는 단호하게, 누구에게는 친절하게, 누구에게는 동기유발을 하여 다가가는 것이 최적의 교육인 걸 알지만, 교사는 그저 "앞에 보세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 오은영 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


그래서 오은영 박사님이 교사한테 자기처럼 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고 오히려 교사의 노고를 인정하는 사람인데 왜 비판하느냐, 그냥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 아니냐며 오은영 박사를 비판하는 교사들에게 대중들은 쓴소리를 한다. 그렇다면 교사들이 오은영 박사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1) 교사 중 체벌도 약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부류

 체벌이 학교현장에서 사라진 지 10년 정도가 지났다. 2012년 학생인권조례의 등장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물론 학생인권조례의 완벽한 연착륙 이전에는 규정과 상관없이 남들의 눈을 피해 손을 대는 경우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니 체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에누리 없이 잡아내면 짧아도 5년 정도 된 것 같다. 현직 교사들 대부분은 비인격적인 체벌도 경험했던 세대인데도, 체벌에 대해 마냥 부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교사 대부분이 학업 성취도가 어느 정도 높았을 것이고, 대부분 학교에서의 체벌은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학생들을 피해 갔던 걸 생각하면, 맞기는 맞았어도 사고 치는 다른 아이들이 맞는 광경을 더 많이 보았을 것이다. 체벌을 당한 학생들이 맞을게 무서워 교사의 지시에 따르면 이득을 보는 학생이었을 테니 체벌에 대해 마냥 비판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 추측한 그러한 배경은 소설이라 치자. 그럼에도  체벌이 달콤한 것은 아이들을 뼛속깊이 변화시키지는 못해도, 눈에 보이는 상황을 통솔하는 데는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소수의 교사들은 쉬운 길을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인다.

 많은 사람들은 체벌이 필요하다는 말에 학을 떼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를 몰지각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만 볼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인간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자의 인권을 제한한다. 그들을 가두고 때리고 죽이기도 한다. 그게 아동일 경우 개과천선의 기회를 보다 넉넉히 부여할 뿐이다. 근래의 학교는 일부 학생들이 다른 학생의 인권, 교육받을 권리 등을 모조리 침해하고 있지만 제지하지 못한다. 그러한 문제 학생의 인권을 제한해야 하는 '가해자의 인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보호해야 하는 '아동의 인권'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인권 침해 현상을 막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교사가 가해자의 인권을 제한하고픈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 방법이 체벌일지라 하더라도.

 이게 무슨 구시대적 이야기냐고 아직도 묻고 싶다고? 어느 나라보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예민한 미국은 여전히 19개 주에서 체벌이 가능하다. 최근에도 패들링(노처럼 생긴 막대기로 때리는 것)을 금지하고자 하는 법안 역시 모두 부결되었으며, 단 두 개의 주를 제외한 나머지 미국 모든 주의 사립학교는 체벌을 자유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아동인권이 너무나 중요해진 나머지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대접받고 있다. 떠드는 학생의 이름을 칠판 한 켠, 빨간 카드가 붙어있는 곳에 적는 것, 수업에 방해되는 학생을 교실 뒤편에 세워두는 것, 공개적으로 혼을 내는 것, 사생활의 영역인 일기를 검사하는 것, 남겨서 청소를 시키는 것, 깜지를 쓰게 하는 것, 폭행하는 학생을 말리기 위해 바닥에 의자를 내동댕이쳐 주의를 끌어 진정시키는 것, 과도하게 간식과 음료를 먹는 학생에게 "주스 많이 먹으면 살찐다"라고 말하는 것, 복도에서 사뿐사뿐 걷게 하는 것, 체육시간에 없어진 학용품을 가지고 노는 혼자 교실에 남았던 학생을 의심하는 것, 친구들 때리는 학생을 붙잡아 힘으로 말린 것 등등. 모두 아동의 정서 및 신체 학대 신고 요인이다. 지나친 비약 아니냐고? 모두 실제로 신고된 이야기들이다.

 매도 잘 쓰면 약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소수의 교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체벌이 금지된 상황에서 엄하게, 무섭게, 때로는 공포를 주어서라도 아이들의 잘못을 교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오은영 박사의 교육철학과 아동 심리 분석에 대한 이야기들이 고깝게 들리지 않을까.


2) 교육에 정답이 있는가 - 교사들 중 오은영의 육아관 교육관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류

 아이를 재우는 방법 중에 보스턴의 소아과 의사인 리처드 퍼버의 이름을 딴 '퍼버라이징'이라는 방식이 있다. 1980년대 고안된 cry-it-out이라고도 불리는 방법인데, 흔히 요즘 부모들이 말하는 '수면 교육'은 이 방법을 말한다. 이는 아이를 눕히고는 아이가 울면 즉각적으로 달려가지 않고 가서 달래주는 텀을 점점 길게 두어, 아이가 결국에는 자다 깨더라도 혼자 다시 잠들게 하는 수면 교육법이다. 이 방법은 당시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모두가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 수면 교육법은 아이의 독립심은 키우지만 자아 효능감을 낮추고 무력감이나 만성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그 반대의 개념인 윌리엄 시어스의 '애착 양육'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물론 그 애착 양육은 아이의 독립심, 자립심을 저해하고 의존적인 성격으로 길러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갓난아이 하나를 재우는 방식마저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하며 정답이 없는 것이 교육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어릴 적부터 규율을 배우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며 모자 신발 가방까지 획일화된 유니폼을 착용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자유분방한 사고가 중요하다며 글자를 교육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노는 것을 최우선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올림픽에서 의사가 메달을 따는 광경을 보며 미국의 생활 체육을 동경하여 시스템을 본떠 만든 대한민국의 학교스포츠 클럽은 유명무실 해졌고, 우리가 모든 걸 포기하고 운동에만 올인하여 실패하면 뒤가 없는 현실을 비판할 때,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우리가 타파해야 할 시스템으로 평가하던 엘리트 스포츠 교육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학이, 스파르타에서는 군사훈련이 가장 중요한 교육적 덕목이었고,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을, 프뢰벨은 자기 계발을, 루소는 자연주의 교육을, 잘츠만은 체력 증진을 가장 교육의 목표로 설정했다. 이렇듯 시대나 사회적 배경에 따라, 동시대라 할지라도 국가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최우선 가치는 다르고, 그때마다 아이를 교육하는 방식과 태도 역시 완전히 다르다. 무엇이 옳은 교육인지 정답은 없다.

 시대가 변했는데 이 시대에 맞는 교육은 분명히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아까도 말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싶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19개의 주에서 체벌이 합법이고 사립학교의 경우 뉴저지와 아이오와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교내 체벌이 자유롭다. 무엇이 이 시대의 정답인가.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답을 좋아한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다른 선진국 국민들이 1위로 가족을 꼽을 때, 우리나라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골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우리나라의 물질에 대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 설문이 복수 응답이 가능한 것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 한 개의 답을 고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두세 개의 답을 고르고도 더 다양한 답을 쏟아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육아에도, 교육에도 정답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정답은 오은영이다. 훈육은 하되 아이의 감정을 읽는 것, 아이의 배경을 헤아려 주는 것, 아이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 아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그것이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교사들도 오은영 교수를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교육이 복수정답인 문항이라면, 정답 중 하나라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또한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교육을 한다던지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교사입장에서 불과 몇 년 만에 오은영 박사의 이론과 철학만이 아동 교육의 바이블인 것처럼 보여지는 세태가 마냥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은 아니지 않나.

 아무튼 그러한 사회 기조에 따라 이렇게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고도 이해받아온 아이들은 모두가 주인공이다. 교실 안 30명이 모두 주연인 삶을 살고 있으니, 다른 배역의 옆자리 친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다. 이렇다 보니 교내 학교폭력 심의위원들은 매일 같이 서로 놀리고, 째려보고, 별명을 부르고, 지나가다가 쳤는데 같이 욕한  아이들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해 곤혹이다. 원 샷을 받아야 할 자신의 씬에 끼어든 다른 주연을 참지 못해 발생하는 학교 폭력 신고들 덕분에, 명명백백 가릴 수 없는 어지간한 사안을 '쌍방'으로 처리해 버리니, 진짜 학교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확실한 증거 없이는 학교의 도움으로 폭력으로부터 구제받는 것도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오은영의 공감육아 속에 자란 아이들을 바라보며 피로감을 느끼는 교사는 너무나도 많다. 부모의 권위를 중요시하고 아이들은 그 말에 따라야 하는 부모 중심의 육아를 이야기하는 하정훈 교수의 교육철학에 환호하는 대중이 늘어가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피로감은 교사 집단만 느끼는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윌리엄 시어스의 '애착양육'에서 리처드 퍼버의 '퍼버라이징'으로 다시 회귀할 날을 고대하는 사람이 많다.


3) 대중의 기대 - 나는 아이들에게 공감육아를 할 역량도, 용의도 없어요.

 아무튼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오은영 박사의 이론과 철학, 그 지향점은 꽤나 훌륭하다. 교육의 목표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이 오은영 박사의 교육철학과 꽤나 맞닿아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런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오은영 박사에게 날을 세우는 마지막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교사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것을 막연히 기대하는 외부 시선이다. 혹자는 오은영 박사님이 교사나 학교에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그러한 교육은 가정에서 행해져야 할 것임을 말했기에 이는 교사의 피해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중의 눈도 과연 그러할까? 2014년부터 jtbc에서 방영한 '냉장고를 부탁해'를 예로 들어보자. 셰프들이 나와 15분 만에 냉장고 속 흔히 있는 재료로 파인 다이닝에서나 볼 것 같은 요리를 선보이는 이 프로는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 온갖 요리프로들이 등장했고, 이제는 '편스토랑'에서는 연예인들이 수더분한 모습으로 어려운 요리를 쉽게 뚝딱 해낸다. 과거 집에서 반찬만 잘 찾아먹어도 칭찬받던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리 좀 해 먹는다고 남들 앞에 말하려면 찌개 좀 끓이고 오므라이스 해먹을 줄 아는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

 오은영의 솔루션이 가져다주는 영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사에게 전문가의 역량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글쎄, 대중의 눈은 이미 전문가의 수준에 맞춰져 있다. 어설프게 외형을 좀 흉내 내고, 물조절에 실패해도 소금 좀 더 넣어 어찌어찌 먹을 만은 한 요리와는 달리, 교육은 다르다. 계량 좀 잘못해 넣으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오은영이 갖고 있는 환경에서 일하지 않는데, 오은영과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방송에까지 나와 아이의 치부를 드러내서라도 자식을 변화시키고 싶은 협조적인 부모는 우리 학교 금쪽이 중에는 없다.

 학부모도 대부분은 교사에게 오은영을 바라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아이가 몇 주만에 바뀌는 마법을 보았는데, 내 아이가 급우를 때렸다는 이유로, 아이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살펴 주지도 않고선 소리부터 지른 담임교사는 마뜩잖을 수밖에.

  "(오은영 박사님처럼은 우리 아이에 대한 공감까지는 못 해도,) 원래 걔랑 사이가 안 좋았었고, 예전에는 걔가 먼저 시비 걸었고 뒷담화도 자주 했던 건 알고서 혼내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라며, 자녀에 대한 깊은 이해심으로 변호부터 하는 부모를 만나는 건 너무나도 흔한 일이다.

  이쯤 되면 등장하는 이야기는 항상 이 것이다. '오은영 박사의 말은 문제가 없는데, 그걸 듣는 부모들이 잘못 해석하고, 다르게 이해하며,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애초에 공감 육아, 아이의 기질 이해에 대한 것들이 육아와 교육의 유일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기에 그 철학과 견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일단은 그게 정답이라고 치자.

 수능 1타 강사는 왜 존재하고, 어떤 강사는 왜 못 가르친다고 욕을 먹는가. 들을 땐 재미있고 유익해 보여도 결국 그 제자들이 성적을 못 내면 못 가르친다고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전국의 수많은 추종자와 제자들이 가르침을 오해하고 오답만 적어내고 있으면 그게 모두 수강생들 탓인가?  아니다. 결국은 그 강사 탓도 있다.


4. 마치며.

위에서 오은영 박사를 비판하는 다양한 견해를 말했다.


체벌을 옹호하는데 오은영 박사는 그렇지 않으니까,

공감 육아 때문에 애들이 다 버릇이 없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교사에게도 공감과 이해를 요구해서,

애초에 정신과 의사와 교사의 역할이 다른데 사회가 자꾸 그 역할을 강요하는 느낌이 들어서,

방송 한 시간 만에 솔루션을 뚝딱 제시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훈육하는 솔루션은 자칫하면 아동학대자가 될 수 있기에 학교 현장에서 사용할 수도 없어서,

자녀 마음에만 공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교육과정 운영에 어려움이 많아져서,

오은영 박사님의 신봉자들이 너무 옹호적인 입장을 펼쳐서 오히려 반감으로.. 등등


 너무 길어져서 차마 적지 못한 내용들도 위에 언급했다. 목차를 적어가며 나열해보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메시지가 연결되는 부분이 많아져 한 카테고리 안에 여러 이야기가 병합되어있는 것이 많다. 이는 내가 현장에서 오은영 교수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들을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쓴 것이며 나 개인의 의견만으로 쓰인 글이 아니다.

 나는 체벌 옹호론자도 아니고 아이가 마땅히 이해받고 존중받는 세상에서 자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오은영 교수의 철학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 목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공감 육아에 능한 분들이니 이런 소수의 의견에도  공감을 바라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