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런팅에 관하여
매주 화, 목은 아내가 요가를 하러 늦은 외출을 한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면 두어시간을 딸아이와 함께 놀아야 한다. 육아에 자신없는 아빠는 아니라 자부해왔건만 그 두어시간은 매번 곤혹스럽다. 아내와 다함께 있을 때와는 다르다. 스케치북을 대강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종이접기 하는 아이에게 영혼없이 "오! 굉장한데?"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무언가 아이를 위한 컨텐츠를 준비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아이를 위해 몇가지를 준비했다. 냉동 피자를 데워 먹고는 스케치북에 캐릭터 몇 개를 그리고 색칠하다 아내를 배웅했다. 이제 아빠와의 시간이다.
아이와 드림캐처를 만들었다. 목걸이도 하나 만들었다. 키트로 되어 있는 쿠로미 초콜릿도 만들었다.색칠을 하며 깔깔 대고, 스티커 하나를 붙이면서도 "그렇게 하면 안되지!"하며 투닥 거렸다. 초콜릿을 만드는 와중에 자꾸 틀에 짜 넣어야 할 초콜릿을 자기 입에 짜넣고 있는 딸과 킬킬대고 웃었다.
그렇게 모든 작품 아닌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딸아이의 의식이 진행된다
"아빠! 나 사진 찍어줘!!"
목걸이를 하고, 드림캐쳐를 들고는 요상한 포즈, 우스꽝스런 얼굴, 입가에 잔뜩 묻은 요거트를 자랑하며 사진을 요구한다. 심지어 영화 <버닝> 속 전종서 배우가 떠오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춤을 곁들이며.
그러한 딸아이의 마지막 의식이 끝난 뒤에는 나만의 의식이 이어진다. 사진을 가족 단체 대화방에 공유하기, 그리고 그 사진이 쓸만하다면 sns에 업로드하기.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사진을 올리는 게 망설여졌다. '이 웃기게 나온 사진을 보며 지금은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최근에 보았던 몇 개의 기사 때문일 거다.
그 기사란 바로 셰어(Share, 공유하다)+페어런츠(Parents, 부모)의 합성어인 셰어런팅(Sharenting)에 관한 것이었다. 자녀의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여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게 만드는 부모들을 비판하는 신조어인 셰어런팅이 요즘 미국에서 화두가 되었고, 아이들이 기억되지 않을 권리, 잊힐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한다. 미성년자 자녀의 사진을 마음대로 올리는 부모가 문제라나..?
그건 모르겠고 과거 모습을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갈 남기는건 참 행운이라 생각한다. 어디서 읽었는지 도통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마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었던것 같다. 그 중, 당신의 아버지의 어릴적 모습을 그토록 보고싶다던 말이 기억난다. 뭐 큰 의미를 둘 구절은 아니었어서 따로 메모해두진 않았기에 저 책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 한참이 지나고 나서 그 구절이 마음을 때렸다. 제사상 위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다. 내가 18살 때,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다지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어서 아쉽게도 아버지와 함께한 사진들은 나의 어릴적이 전부다. 그 때의 사진은 일상 속에서 찍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찍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를 추억할 도구가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그건 남을 추억하는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만으로 좁게 보아도 마찬가지다. 나의 과거는 영상이 아니다. 사진 속 방긋 거리는 나의 웃음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렇게 사진 한 장 남겨지지 않은 유년시절 보다는 다양한 기억이 알록달록 물든 요즘이 낫지 않나? 못나게 나왔건, 안 좋았던 순간이건 간에 기록은 추억이 된다. 나는 잊힐 권리 보다는 기억되는 문명이 더 좋다. 그래서 <코코>의 ‘리멤버 미’를 들으며 그렇게 질질 울었나보다.
이상, 딸의 엽사가 웃기고 귀여워서 올린, 변명중인 아빠의 긴 혓바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