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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올 이상은 Oct 12. 2023

강화에서 본 과거

  강화도  '전등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니 의외다. 불교를 처음 받아들였다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창건되었다니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 저 북쪽에 있거나 만주 한 복판쯤 있어야 할 것 같은 고구려 사찰이 고구려 땅 남쪽 끝 그것도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강화도에 세웠다니 여기 신비로운 이거나 후세가 치러야 할 아픔을 그 시대 선조들이 미리 어루만져 두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미루고 미뤘던 강화도 순례 역사모임을 하는 날이다. 강화도 마니산, 전등사는 바람 쐬러 이미 몇 번 와 보았고 서울로 빠져나오는 김포 길 교통 체증이 너무 심해 강화도 자체에는 큰 기대감이 없었지만 수술 후 한 달 반 만에 집구석을 탈출하는 기쁨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멤버들이 반가워서 선뜻 나서기로 한 터였다.

  사당역에 모여 한 시간, 처음 돌아본 곳이 육지와 마주한 조선시대 군사 요충지다. 강화도에는 12 진보(鎭堡)와 포를 걸어둔 수많은 돈(墩) 대와 포(砲) 대가 있는데, 몽고의 침입, 병자호란과 같은 난리에 이곳을 조정의 피난처로 정한 것을 보니 이 섬에 수많은 군사기지를 둔 것이 당연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을 겪어내며 할퀴고 뜯긴 상처만 남은 곳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참혹했던 전투 사진 몇 장 걸려있는 것을 제외하면 너무 평온하고 경치도 아름다워 역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전등사. 아이들 어릴 적에 가을 단풍을 따라 이곳에 온 적은 기억나지만 숨을 헐떡거리도록 계단과 오르막이 있는 곳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올라와 보니 이곳이 최초의 사찰이라는 것을 빼면 아담한 대웅전과 부속건물이 있는 보통 사찰과 다르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웅전 처마 네 구탱이를 나부상이 괴고 있는데 여인에 배반당한 도편수가 여인에 대한 응징으로 그 여인의 벌거벗은 나무상을 만들어 지붕을 받쳐 들게 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길을 따라 정족산 쪽으로 올라가면 조선조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보관하던 '정족사고'가 있는데  그곳에서 일 년에 한 번 10월 첫 주에만 전시한다는 '팔만대장경 묘법연화경' 목판을 운 좋게도 직접 보게 되었다. 검은색 목판에 양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글자는 독해가 불가능했지만 검은 목판의 어두움이 몽골의 침입을 불력으로나마 막아보려 했던 선조의 숨결 느껴지는 듯했다. 8만 자가 넘는다는 팔만대장경의 필체는 모두 같다고 하는데 이는 5년 동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서체를 공부시켜 제작했기 때문이란다. 상상하지 못했다.

  전등사를 내려와 30분을 달려간 곳은 강화역사문화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인데 매주 월요일은 폐장이라 안에 들어가 유물들을 볼 수는 없었고 고인돌이 있는 쪽만 개방되어 있었다.  우리처럼 박물관에 왔다 낭패를 본 사람들이 있었던지 고인돌에 둘러서서 어린아이까지 연장자의 고인돌 얘기를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강화 고인돌은 2개의 받침돌이 4평은 됨직한 거대한 석판을 비스듬하게 바치고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지만 아직 도굴되지 않아 석판 밑에선 청동기 시대 유물이 나올 거라고들 한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지치고 목이 말라 방직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조양방직카페를 찾았다.  명소가 되었는지 녹슨 직기에 관련 없어 보이는 폐물들을 잔뜩 가져다 놓았는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주문하는 줄도 길고 앉을 데도 없어 힘들었었는데 소창박물관에  가서 방직에 관한 역사를 듣고서야 귀가 트인다.

  안내하는 분의 청산유수 같은 설명에 따르면  방직공장인 조양방직은 일본에서 유학한 홍 씨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했고, 방직기를 돌리기 위해 1930년대 이미 강화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화학섬유 이전에는 대구보다 섬유산업 규모가 더 컸고, 직물을 팔기 위해 강화의 여인보부상이 활동했으며, 그 수입은 지금 가치로 연 6000만 원은 되어  당시 강화가 부유했단다. 몇 수 몇 수 하는 정의는 뭐고, 한필의 길이는 얼마고, 농사지으며 한 사람이 짤 수 있는 면포가 몇 필이라 세금은 얼마였고, 먹고살고 얼마나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었는지 여러 가지 산 역사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창박물관도 방직기들은 물론 고급스러운 한옥, 앞마당에 핀 형형색색의 꽃들, 집기들과 소품들이 어울려 핫플레이스가 되고도 남을만해 보였다.

  강화읍내 풍물시장에서 저녁을 먹는 마지막  코스 전에 찾은 곳은 강화 성공회성당과 바로 옆 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다는 용흥궁, 성공회성당은 특이하게도 한국전통 건축양식을 도입해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 했는지 어색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설립 당시에는 꽤 장엄했었던 것 같다

  이번 탐방은 강화도가 섬이고 촌에 불과하다는 생각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강화도가 고려뿐 아니라 단군과 고구려가 숨 쉬고, 화문석뿐 아니라 방직의 역사가 살아 숨쉬었던 곳이며, 근대의 개항이  왜 강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게된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우리 나라 어느 곳보다도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유서깊은 민족사가 스며든 곳도 많지 않을터 누구라도 번은 이곳을 돌아보며 의미를 새겨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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