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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Feb 05. 2024

'바보'

나 홀로 보이스피싱 전화

 평소 휴대폰에 쌓인 사진들을 주기적으로 네이버 클라우드 서비스에 옮겨둔다. 년월 별로 차곡차곡 폴더링해 간직하고픈 파일을 저장해 두는 것인데, 해당 서비스에도 제한 용량이 있어서 꽉 찼다 싶을 때마다 기존 누적된 사진들도 선별해 지워버리곤 한다. 따라서 영구보관보다는 '경유지'로 기능하며, 용량 확보를 위해 다시 들여다보는 '관찰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훑어볼 때마다 숙연해지는 구간이 있는데 바로 '2020년>9월> 바보'다.


그날은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니었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휴가를 쓰고 부모님 댁에 머무는 시기였고, 회사 안 나간 직장인의 기본자세인 마냥 며칠 내내 침대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러다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휴대폰을 사용하던 중이라 바로 받은 나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라는 소개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고쳐 앉는다. 휴대폰 속 목소리는 나의 이름과 다니는 회사를 확인한 뒤,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자가 내 명의로 대포통장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해당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 수 및 피해금액을 나열한 뒤 내 명의 통장이 쓰인 만큼, 그자와 나의 공범 관계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즉, 통장판매 양도혐의에 놓인 것이다.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처음 듣는 이름에 모르는 사람이라 답하자, 이 경우 명의도용 피해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며 해당 절차를 위해, 그리고 보안상의 이유로 반드시 '혼자만의 공간'에서 협조해주셔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까지 읽은 누군가는 탄식과 함께 당연히 보이스피싱 아니냐 핀잔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나는 살면서 이러한 전화를 직접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만약 그날 회사에 있었다면, 이 전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 잠깐 사무실에서 나와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 집에서처럼 한 시간 넘는 통화로 길어졌을까. 혹은 중간에 저연차 직원으로서 눈치가 보여 잠깐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팀원들에게 고민으로 털어놓아 손쉽게 사기 행각인 걸 알아챘을까. 아니면 가장 깔끔하게, 정신없이 일하다 부재중 번호로만 남았을까.


 다시 그때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면, 불행히도 나는 집에서 한껏 편한 상태로 경계심 없이 전화를 받았기에 호로록 그 전화내용을 믿어버렸다. 무엇보다 '관련 사항에 대해 시급하게 조치하지 않을 경우 피해 금액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말이 무서웠다.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리나케 방문을 닫고 차근차근 상대가 묻는 질의에 답했다. 다시 한번 나의 회사와 이름을 확인하더니(당시 회사 홈페이지에도 공개되었을 정도로 손쉽게 얻을 정보였는데, 그것에 대해 믿음을 가졌던 게 다시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 통장 계좌번호 및 보유 금액 등을 물었다. 이후 신원 확인을 위해 화상대화를 해야 한다며, 카카오톡 메신저로 넘어가 페이스톡을 5분여간 진행했다. 이때는 검사가 아닌 서기관이라는 여성과 연락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크게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내 얼굴을 상대에게 공개한 것 외에도 냅다 주민등록증을 넙죽 카메라 렌즈에 비춰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한 것이라지만. 하.


 나의 통화가 길어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독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속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대며 엄마께 조용히 해달라는 동작을 취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검사와 나의 대화를 조합해 보고는 엄마께서 수첩에 '사기'라고 적고, 그 이후로도 나는 한참을 안 믿고, 엄마께서 큰 소리로 화낸 이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실제 서울지방검찰청에 전화를 해본 뒤에야 잔뜩 쥐 난 발이 다시 멀쩡해지는 것 마냥 상황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보안 사건일지라도 휴대폰 전화번호로, 심지어 카카오톡으로 연락할 이유가 없다. 대포통장을 만든 그자 한 명이 아닌 '그자들'이었다. 최두헌 검사, 한유나 서기관까지 모두 허구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점심 직후에 벌어진 일이어서 그날 바로 상대에게 공개한 주민등록증은 버리고 새로 발급받았다. 주민등록증의 경우 번호가 노출될지라도 발급일자 기준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그자들이 보낸 허위 문서, 허위 공무원증, 일부 메시지 대화 캡처본이 '바보' 폴더 안에 들어있다. 시간이 꽤 흘러 당시 나눈 대화는 희미해졌건만 사진만 보면 그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떠올라 소름이 끼친다. 이어서 저렇게 조잡한 꾀에 넘어간 나 자신이 부끄럽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실제로 당시 이 폴더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내가 바보 짓한 게 맞지'라는 반성의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드는 감정의 결은 여전하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한 가지 생각만은 달라졌다. 더 이상 저 '바보'가 나는 아니라는 것. 이후 비슷한 전화를 두세 번 받았는데 '네 알겠습니다~'하고 여유롭게 전화를 끊었다. 대화 중 나의 피해담을 고백한 적도 있다. 나를 바보로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보다는 주변에서 이러한 피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커서였다. 혹여나 나와 동일한 일을 겪은, 혹은 더욱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다면 더 이상 지나친 자책은 하지 말길 바란다. 이미 지난 일이니 그때를 기점으로 사회에 대한 건강한 경계심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힐난할 대상은 따로 있다. 범죄 수법과 유형이 더욱 교묘해진 세상에서, 마음먹고 속이는 자들 앞에서 속기란 너무나 쉽다. 그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보아하니, 바보는 분명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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