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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Jul 25. 2024

냉장과 냉동 사이

때로는 소설도 써볼 생각입니다3

1. 냉장


 졸졸 소리에 눈을 떴다. 민하가 주방에 불을 켜고 호박을 씻고 있다. 오늘은 기필코 푹 자겠다고 다짐하며 침대에 들어간 지 겨우 네 시간이 경과한 지금은 새벽 3시다. 한번 낮밤이 바뀌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지. 나야 잠들지 않는 게 일상이지만 민하는 잠을 적게 자면 입안이 허는 등 바로 몸에서 적신호를 보낸다. 내일, 아니 오늘 회사에서 힘들겠네. 침대에 누워 뜬눈 지새우다 출근 무렵 스르르 잠드는 불상사를 겪을 바엔 차라리 생산적으로 무엇이라도 하며 밤새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저 호박을 선물 받은 게 3주 전쯤이려나. 그간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었고 여러 업무에 치였던 민하에게 호박은 요주의 식재료였다. 나를 빤히 쳐다볼 때마다 머리 한가득 '저 호박을 언제 어떻게 해치우지' 고민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우리 둘 다 난생처음 보는 품종이었다. 에코백 내부를 반 조금 넘게 차지할 크기로, 껍질은 연두색인데 잘라보면 속은 연노랑색이다. 애호박과 달리 둥글고, 단호박이라기에는 속에 수분이 많고, 시골 밭에서 볼만치로 큼지막한 늙은 호박이라기에는 무게도 겉색상도 달랐다. 낯설긴 하다만, 그래도 호박 아니겠어?

 민하가 고민 끝에 화구에 찜기와 프라이팬을 올렸다. 깍둑썰기해둔 호박 중 반은 찌고, 반은 물을 자작하게 넣어 삶는다. 반복재생 중인 유튜브 쇼츠 영상 소리로 미뤄보아, 샐러드와 죽을 만들려나보다. 마요네즈 나한테 있고, 양파랑 햄도 지난번에 작게 썰어서 얼려뒀으니 샐러드는 어느 정도 상상이 간다. 그런데 호박죽이라니, 찹쌀이나 새알심 없이 호박을 끓여 으깬다고 호박죽 맛이 날까? 민하가 휙 내 방향으로 돌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손에 움켜쥔 건 며칠 전 반쯤 먹고 얼려둔 햇반이었다. 불린 쌀 대신 밥알을 넣어 호박죽을 만든다는 어느 고단수 주부의 블로그 게시물에 용기를 얻었다나. '이 호박은 샐러드로 만들기엔 물이 많이 나오고, 호박죽으로 만들기엔 잘게 짓이기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완성 단계에 이를수록 점점 혼잣말이 늘었다. 다 된 죽과 샐러드를 나에게 들이밀고 얼레벌레 출근하더니, 돌아와서는 군말 없이 잘 먹는다. 간이 약간은 짜고 모양새가 정석이 아닌 것 치고는, 또 묘하게 '그 호박 샐러드'와 '그 호박죽' 맛이 난다면서. 그럼에도 다시는 만들지 않는 걸 보면, 호박이라고 다 같은 호박은 아닌가 보다.


2. 냉동

 최근 민하는 유튜브로 요리 영상을 자주 본다. 그중 자발적으로도, 알고리즘의 순환상으로도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건 '밀프렙(Meal Prep)'이다. 영어로 '식사'와 '준비'를 뜻하는 두 단어가 결합한 용어로, 일주일 등 일정 기간 식사를 한 번에 미리 준비하는 것을 일컫는다. 내가 1년 반 넘게 알아온 이민하라는 사람에게 밀프렙은 확신의 취향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시야에 보이는' 선에서 '깔끔함과 간편함'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

 민하는 단정하면서도 편한 옷 입기를 선호한다. 때문에 밖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깨끗한 인상을 줄듯 싶다.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약속만 없다면 침대에 한없이 널브러져서 씻지 않고 꼬질한 상태를 유지하는 건 며칠도 너끈하다. 그런 속성의 사람치고 집이 깨끗해 보이는 이유는 본인 눈이 바라보는 범위만큼은 지저분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다.(그토록 오래 뒹굴거리는데 몸은 답답한 기분이 안 들려나. 여전히 의문이다.) 설거지거리나 빨랫감이 눈앞에 아른거릴 바에야 얼른 해치워 버린다. 도저히 못하겠다 싶은 예외적 순간에는 말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 잠자는 전략을 취한다. 적어도 어둠과 무의식 속에서는 당장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된다면서.

 곳곳에 산재된, 소비기한 마감이 다가오는 식재료를 하나의 요리로 변형해 다담스럽게 소분 용기에 담는다니 이 사람 성격에 얼마나 개운할까. 귀가 후 내 곁에만 오면 '당장 해치워야 할 것처럼 보이는' 밀프렙이 존재하므로 식비 지출을 줄이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창고형 할인마트에서 냉동 토르티야(일명 또띠야)를 두 봉지나 사더니, 밀프렙 피자를 만들었다. 왜 요리하다 보면 꼭 자투리만큼 남지 않는가? 그런 호박, 양파, 햄, 방울토마토, 시판 토마토소스를 모아 두었다가 토르티야 위에 차곡차곡 얹으면 끝이다. 냉동실에 얼려둔 후 먹고 싶은 날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190도로 10분만 돌리면 되니 얼마나 손쉬운가! 종이포일 한 장씩 사이에 끼워 피자끼리 겹쳐두면 생각보다 차지하는 공간도 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네 판이나 만들 줄은 몰랐네, 당분간 내 속은 좀 더부낄 수도 있겠다.


3. 사이


 지난번 요주의 호박과 함께 선물 받은 채소 중 비트는 요지부동이다.  ABC주스에서 B를 맡고 있는 바로 그 비트. 갈기 전 원재료 상태로 접한 건 처음이었는데 외관상으로는 붉은 감자처럼 보였다. 굵직굵직한 비트가 여섯 알이나 생겼는데 당장에는 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받자마자 개만 우선 씻은 후 얼려두었다. 자를 때마다 칼에서 보랏빛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니 비트가 아니라 생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주말이어서 느지막하게 일어난 오늘, 민하가 남은 비트들로 뚝딱뚝딱 피클을 만들어냈다. 우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사과 깎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감동적인 발전이다. 요리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므로 아직까지 서툰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나, 서툴기에 더욱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일들에 대한 불안을 떨치는 것 같아 흐뭇하다. 민하가 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나의 냉장과 냉동 사이에서 잘 오고 가며 건강한 하루들을 지켜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차갑게 하든 얼리든 지연시킬지언정 해내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겸사겸사 냉장고인 내 속도 한결 가벼워질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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