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와 폭염을 반복하던 여름휴가의 마지막날이다. 유효기간 만료가 다가오는 커피 쿠폰 사용차 점심 무렵 카페에 들렀다. 그때 마신 커피 때문일까. 글을 쓰려고 앉은 지금 심장이 계속해서 '나 여기 있소'를 목 부근까지 전해온다. 그에 비해 타자 위 손가락은 한참을 머뭇댄다. 올해부터 읽은 책기록을 생산성 소프트웨어 '노션'에 정리하고 있는데, 그곳에 지난주 짧은 소감을 남겼다. '한숨에 다 읽고 간만에 긴 독후감을 쓰고 싶어지는 책.' 오늘 카페인을 복용하고 싶었던 건 김지원 작가님의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소개한다는 긴장감을 다른 데 귀인 하려는 마음에선가보다.
팽팽 돌아가는 듯하나 정작 하나의 생각으로 수렴하지 못하는 내 두뇌를 진정시킬 겸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자리에 돌아왔다. 오늘, 아니 이 책을 완독한 이후부터 머리 주변에 몇몇 문장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사라졌다. 왜 그때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방에 한 문장이라도 기록하지 않았을까. 글을 쓰기 위해 책 속지를 촤르륵 훑어보자마자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여태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한 마디씩 말을 얹고 싶은 문장들이 무수하다. 책을 읽는 사람도, 읽었던 사람도, 요새 읽지 않는 사람도 각자의 이유가 있다. 때문에 떠올랐던 나의 단상들도 개인적 경험과 밀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책만큼은 자아를 거대하게 드러내기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크다. 고로 크게 3부로 구성된 목차에 기대 맛보기로책의 내용을 전달해 보겠다.
김지원 저자는 경향신문 기자로, 현재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를 기획하고 발행한다. '인스피아'는 한 회에 적게는 두 권 많게는 네 권의 책을 다루고 있어서 서평 뉴스레터로 정의되곤 하지만, 정작 저자는 이 뉴스레터를 쓸 때 '읽는 맛, 읽을 가치가 있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를 쓰는 데에 초점을 둔다고 밝힌다. 뉴스를 구실 삼아 색다른 이야기에 대해 책으로 접근해 보자는 취지다. 실제로 뉴스레터를 읽어보니 단순히 책 줄거리를요약하기보다는, 발행자가 해당 회차의 주제를 잡은 후 함께 고민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지며 그것들의 답 혹은 답의 실마리를 여러 책에서찾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다면 왜 그 방법이 책이어야 할까.
1부. 잃어버린 즐거운 읽기 경험을 찾아서
필요한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스마트폰 구글창에 검색하면 된다. 요새는 검색하면 상단에 바로 '특정 게시물의 본문 내용이 대표 발췌'돼있어 추가적인 클릭 단계조차 필요 없다. 그러나 그 정보는 '나쁜 텍스트'일 여지도 있다. 최다 조회 기록으로 인해 먼저 노출됐을지언정 다른 게시물의 '복붙(복사하기+붙여넣기)'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원 출처의 신뢰도가 낮거나 앞뒤 문장 생략으로 인해 맥락을잘못짚었을지 모른다. 정보 수집이 간편한 만큼, 이를 선별하고 판단해야 할 개인의 피로도는 늘어난 셈이다.
이에 반해저자는 책이라는 매체에는 '굳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며, 번거롭게 엮고 교정하고 인쇄하는 과정 덕분에 그만큼 진위를 파악하고 유익한 가치를 담아낸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책이라고 마냥 진지한 주제만 다루는 것도 아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 책 속에는 그 시대의 유머가 녹아있다. 그리고 이 재미는 오늘날로 한정해도 밈이나 유행어 같은 온라인 텍스트 생태계에 비해 '피로감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일 확률이 크다. 단순히 '책에 있는 정보만이 진짜다'가 아닌, 종이책에서 '즐거운 읽기'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저자의 서술에 수긍이 갔다.
2부. 책은 [ ]다
2부부터는 목차 문장의 괄호 안을 바꿔가며, 지금 시대에 책이 지니는 의미를 나열한다. '그래, 이런 게 책의 매력이지'하며 끄덕이는 지점이 많았다. 특히 2부 6장 '책은 가치 있는 텍스트를 모은 방주다'를 읽을 때는 저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녔다는 반가움과, 그간 형언하지 못한 내 행동에 이름표를 찾게 됐다는 쾌감을 느꼈다. 평소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어서면 조용한 공간이 조성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번잡한 생각이 잦아들고 발걸음도 사뿐사뿐 옮기게 된다. 그렇게 원하는 책장에 다다르면 항상 내가 본래 찾고자 했던 책 외에도 '1. 마침 읽어보고 싶다 염두했던, 2. 처음 보지만 제목에 이끌리는, 3. 별다른 이유 없이 괜히 꺼내 펼쳐보고 싶은' 책들이 항상 한두 권은 존재했다. 그곳에서 한참을 머문 이후 출구로 나가기 전 300번(경제, 정치)과 900번(역사) 책장을 방문한다. 내 기준 솔직하게 원초적 흥미가 생기진 않지만 항상 더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되뇌는 분야다. 약간의 의무감을 지니고 다다르지만, 막상 살펴보면 이곳에서도 내 지식수준 내에서 읽어보고 싶은 책을 발견한다. 저자는 도서관 청구기호(분류법)에 따라 조직적으로 배치된 도서 시스템의 강점이라며, '느슨하게 주제별로 형성된 서가에서는 내가 미처 알려고 생각조차 못했던 정보를 찾을 수 있다(p.87)'고 표현했다. 이를 두고 독일 예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는 '서가 옆 책'의 법칙이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 '서가옆', '책의 법칙'이라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있는 듯한 아늑함을 선사하는 이 이름표를 얼른 주변에 알리며 입에 머물게 하고 싶다.
3부. 도구로서의 책 읽기
저자의 문장을 빌려보자면 3부에서는 '책을 원래 잘 활용했던 사람들에게도, 책을 원래 안 읽던 사람에게도' 책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는 읽기 방법을 알려준다. 뉴스레터 발행을 위해 항상 여러 책을 거느리고 있을 저자의 실제 책읽기 노하우가 켜켜이 담겨 있으니, 저자 대신 내가 자신 있게 권해드린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앞뒤 문장 맥락만으로 단어 뜻을 유추하기 어려운, 그리고 실제로 사전에 검색했을 때 그냥 넘어가지 않길 잘했다 싶은 생소한 단어들이 종종 등장했다. 새로운 자극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흘러 살아가다 보면, 생활습관뿐만 아니라 나의말과글도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말보다는 행동, 뜻만 통하면 된다는 실용적 관점에도 동의하나, 어쩐지 그냥 '재미있다', '좋다'라고만 말해버리면 '딱 그 정도의 재미와 좋음만 누릴 것 같아 아쉽다. 순우리말이든 한자든 새로운 단어를 안다면 그 상황이나 대상에 적확한 명시가 가능해진다. 이는 내 삶을 보다 다양한 색채로 물들이고 오래 기억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런 연유에서 '벼려(어떤 일을 이루려고 마음속으로 준비를 단단히 하고 기회를 엿보다. *여태 원형이 '벼르다'라고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벼리다'였다!), '무람없이(예의를 지키지 않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것 없이)', '해찰(마음에 썩 내키지 않아, 물건을 이것저것 부질없이 집적거려 해치는 일)' 등의 활자를 곳곳게 단정하게 배치해 둔 저자의 능력이 탐났다. 그리고 나도 더 자주 읽고 자주 써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올해 여름은 유독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답답하고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은 현실에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함께 같은 책 읽고 글로 생각을 나누는 게 즐거워서, 그야말로 쏜살같이 한 해가 흘러가고 언젠가 이 날들을 잊을 거란 게 아쉬워서, 그럴 때마다 빈백에 널브러져 집안 곳곳에 펼쳐진 읽다만 책을 집었다. 고백건대 항상 집중해서 읽지는 못했다. 그저 지적 허영으로 바득바득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 고민만 잔뜩 하다 용두사미형으로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글도 빈번했다. 분명 처음 예상했던 결말부는 이게 아니었는데, 분량이 길어지자 귀찮아서 끄적여둔 후반부 문장들을 드르륵 긁어 지웠다.
꾸준히 읽고 쓰려는 스스로의 노력을 뿌듯해하면서도, 극강의 몰입에 이르러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내심 나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 '3무 독서법', '해찰하며 읽기' 등을 접하고 나니 꼭 애를 써서 읽고 써야 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업무로 바빠질 하반기부터, 혹은 먼 훗날 책과 글과 단절됐다 싶은때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지진 말아야겠다. 읽고 쓰려 애쓰지 않아도, 돌고 돌아 다시 읽고 쓰는 상황이 찾아올 테니까. 누구나.
* 정말 마지막으로, 재밌게 읽었던 무게도 내용도 가벼운 '책 관련 책' 다른 두 권을 추가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