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러시아의 한 마을에 살고있는 카라마조프가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작품은 각 인물들의 시선으로 사랑과 신앙을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과 사회적 불평등을 탐구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수많은 도덕적 질문을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인간 본성과 자유에 관한 다양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나는 수도사 알료샤(알렉세이)와 그의 형 이반(바냐)이 술집에서 나눈 "대심문관"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도 무교로써 이반이 품은 의문처럼 신이 있다면 세상은 왜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건지 항상 궁금했었기 때문이다."대심문관"은 이반이 창작한 서사시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에 관한 철학적 고뇌가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 광장에 재림한 예수는 은혜를 베풀어 눈먼 자를 고치고 죽은 소녀도 살려낸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의 발자국에 입을 맞추며 그를 경배한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대심문관은 예수를 감옥에 가두고 보편적인 인간들은 감히 행할 수 없는 "예수의 신앙적 자유"를 비판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인간에게 선물한 "고귀한 자유"를 실천하기엔 인간은 보편적으로 너무 나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심문관은 악마와 결탁한 교회가 지상의 빵과 기적 그리고 권력을 인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예수대신 자유로부터 오는 고난을 소거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향한 대심문관의 추문에는 원망이 서려있었다. 교회의 입장에서 예수의 재림은 교회가 그간 인간세계에 구축해 놓은 질서를 혼란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는 대답대신 대심문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형벌에 처하는 대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감옥의 문을 열어주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대심문관"은 인간에 대한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작품의 전반을 관통한다. 대심문관을 향한 예수의 입맞춤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그리고 용서와 이해다.
망나니 같던 악독한 아버지(표도르)의 살인사건을 둘러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그들의 종교관을 막론하고이반이 "대심문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어진 자유 앞에서 나약한 인간으로 표현된다.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으나 배심원의 오판으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은 패륜아 드미트리(미챠).
아버지를 향한 살의를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실현한 뒤 죄책감으로 인해 섬망을 앓는 이반.
아버지를 직접 살해한 뒤 자살한 스메르쟈코프.
결국 형제들은 이반이 외치기도 했던"카라마조프가의 저열함이 가지고 있는 그 힘"으로 스스로가 초래한 부패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네 형제 중 오직 알료샤만이 내면의 선(善)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통해 카라마조프적 길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러한 알료샤의 모습은 작품을 읽는 내내 비열함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대조되었다.
그 중에서도 성자 조시마의 시신이 부패해 가는 것을 두고 추악한 양면성을 보여준 사람들의 가벼운 모습은 존경하는 스승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진 알료샤의 깊은 슬픔과 비교됨으로써 작가가 알료샤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인간본성에 대한 메시지가 더욱 극대화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듯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완 작품이다. 비록 지식이 풍부하지 않아 많은 이야기를 쓰지는 못했지만 "대심문관"은 본고에서 논한 용서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설 속 소설이다.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죄"를 되돌아본 뒤, "스스로를 구원받고, 또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입맞춤과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 작가가 나타내고자 했던 주제의식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