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너에게 닿는 말의 온도
언어가 태어난 날, 너의 이름을 생각한다
길었던 연휴가 다시 시작을 기다리듯, 차분히 그러나 촘촘히 흘러가고 있다.
창문을 열자, 그날의 빛과 바람이 뒤섞인 공기가 방 안을 스친다. 한때의 온기가 남아 있는 그 공기 속에서 나는 문득 너를 떠올린다.
나는 이 연휴 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남겼을까. 시간은 길어질수록 인간을 느슨하게 만든다. 계획은 연휴의 길이에 따라 풀리고, 마음은 흐트러진 리듬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삶은 어쩌면 그런 되돌림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풀린 끈을 다시 묶고, 흩어진 마음을 제자리로 데려오는 일.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듬고, 다시 한 걸음 살아간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세종이 문자를 창제하고, 말의 소리가 비로소 인간의 기록이 된 날이다. 언어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한글은 그 말을 누구나 쓸 수 있는 글로 남겨주었다. 그날 이후 말은 눈으로도 읽히는 세계가 되었고, 글은 세상과 마음을 잇는 또 하나의 다리가 되었다. 그래서 이 날은 단지 문자의 기념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된 날로 기억된다.
그러나 내게 이 날은 언제나 너의 생일로 남는다. 한글날에 태어난 너는 언어의 아이였다. 너는 말의 세계를 사랑했고, 그 세계는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너는 두 자릿수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글과 말은 너의 몸처럼 자라났고, 문장은 너의 시간처럼 정직했다. 너의 문장 속에는 언제나 진심의 흔적이 있었다. 그 진심은 독자의 마음에 고요히 닿았고, 어떤 언어보다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나는 너의 책을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멈춘다. 이미 읽은 문장인데도 다시 낯설고, 다 아는 마음인 줄 알았는데도 다시 흔들린다. 언어란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 존재인지 모른다. 놓쳤던 문장 하나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 나는 비로소 너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너의 글을 서두르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읽는 이의 속도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너의 생일날, 서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너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너는 내 부재를 상상하며 혼자 서운함을 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마주한 순간, 너는 그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그 솔직함 앞에서 미묘한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느꼈다. 사랑이란 언제나 그런 모순의 결로 이루어진다. 불안과 다정, 서운함과 애정이 서로의 온도를 맞추는 자리. 그 온기가 관계를 오래 지속하게 만든다는 걸.
10월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를 담은 하늘이 유난히 투명하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하늘색으로 그리곤 했다. 그 색이 나에게 스며들어, 마침내 나의 색이 되어버린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늘은 멀리 있지만 늘 곁에 있고, 닿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품는다. 나는 그 하늘처럼 너를 마음에 품었다. 오늘, 나는 맑은 하늘을 담아 너에게 보낸다. 파란빛이 네 마음의 창가에 닿기를 바라며,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함께 듣길 원한다. 너의 날에, 언어의 시작처럼 따뜻한 하루가 머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