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가 전부는 아니니까
어느 피의자 선생님의 고백
나는 그날 혼자였다.
비좁고 차가운 조사실에서
피의자 신분이 되어 자리하고 있었다.
조사실의 모든 물건은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나만 맞지 않는 퍼즐조각처럼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학부모는 아동학대로도,
뭐로도,
나를 고소할 수 없자,
녹음 기능을 켜둔 내 휴대폰을 빌미 삼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나를 고소했다.
요즘 세상에 녹음을 하지 않는 교사는 거의 없다.
열의 하나 정도-꽤 높은 비율로- 있는 악질적인 학부모들이
교통사고처럼 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음은 나의 의무이자 노력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고, 내가 받은 악성민원의 증거가 된다.
통화 중 다른 사람과의 대화까지 녹음됐다는 게 고소의 이유였다.
고소를 위한 함정에 순진하게 빠진 것 같다.
조사실에서의 감정은 너무 다양했다.
잘못이 없었기에, 조사에만 임하면 된다는 당당함이 있었고,
기어코 고소를 감행해 피의자 신분으로 만든 학부모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1프로의 전혀 다른 감정도 느꼈는데,
그것은 재미와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그 학부모는 어떤 표정으로 고소를 했을까,
그때의 경찰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도대체 조사실은 어떤 곳일까,
저 경찰관은 이런 걸 조사하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수많은 조사실에 사람이 모두 차 있는 걸까
등등.
그리고 이 경험을 아주 나중에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가벼운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기까지 했다.
찔끔 눈물도 났지만,
나를 고소한 학부모의 아이를 담임으로 다시 보는 게 걱정도 됐지만,
참을 만했고 정신줄도 챙겼다.
조사를 받고 한 달쯤 뒤,
우리 집으로 서류가 도착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그리고 학교에도 같은 서류가 도착했다.
그리고 교육청에도 같은 서류가 도착했다.
관리자가 말했다.
"서류가 왔네요. 혐의 없음이니 잘 끝난 거네요."
교육청에서도 전화가 왔다.
"무혐의라고요? 그럼 됐습니다. 다른 서류 필요 없으세요."
아니요, 이보세요들.
서류가 전부가 아니잖아요.
여기 사람이 있잖아요.
별것 아닌, 작은 위로 같은 걸 한 번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이후에도 몇 달 동안은
교권보호센터, 공무원연금관리공단, 교육청과 서류로 대화를 했다.
서류가 아니면 대화는 할 수 없는 것처럼.
주변 선생님들은 나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랬다고 아주 아주 나중에 들었다.
운이 나쁘게도 그로 인해 나는 인간적 대화보다
서류상의 대화를 더 많이 하게 됐다.
종이에 파묻힌 기분이랄까.
서류상 피의자였던 나는
서류상 무혐의가 되었고,
서류상 교권침해 피해자였다가,
서류상 공무상 병가를 내고
서류상 복직을 한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서류가 전부는 아니다.
무너져 가는 교육의 파편을 맞고,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나만 잘살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버둥 치며 사는
나의 일부도, 전부도 서류는 알지 못한다.
주변 선생님들이 차마 건네지 못한 말의 문을
내가 열었어야 했다.
그래서 일부라도 더 많이 더 멀리 알렸어야 했다.
서류가 전부가 아니니까.
종이로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사연이 있으니까.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서류 이전의 대화가 충분할 수 있길 바란다.
아직 어린 우리의 아이들이 정제된 표현이 가득한 서류로, 너무 빠른 어른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의 세계에선 기나긴 대화로, 마음과 마음이 풀리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다.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서류로만 하는 경험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엔 귀엽고 철없는, 약하디 약한 아이가 한 명쯤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