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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Nov 08. 2024

도망치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홍시가 아니라 단감

11월이 되면

학교에는 의미심장한 공문이 하나 온다.

바로 내신과 관련된 공문.

교사가 현임교 경력 2년부터 5년 정도면

다른 지역이나 학교로 전출 가야 하는 제도인데, 나는 이것이 공립학교 교사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장점이라면, 한 곳의 고인 물이 되지 않아 지역 교육에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단점은 새로운 학교에 가면 어김없이 과중한 업무나 기피 업무를 맡게 된다는 점이다.

내신 공문이 오기 꽤 오래전부터

이동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나는 4년 차로 내년까지 근무할 수 있지만 말이다.

1년 가까운 병가 끝에 복직한 나에게

어느 누구도 고깝게 말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고통을 안겨준 공간에서

겨우 봉합해 놓은 상처가 열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가해자들은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기 일쑤였고,

어쩌다 마음을 털어놓은

동료교사들은

나의 '착함'과 '물러터짐'을 원인으로 생각했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기에

나는 하마터면 내 잘못인 양 인정할 뻔도 하였다. 어쩌면 나의 고집스러움일 수도 있지만.


열린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는 도망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멀리---

물러터졌다고 생각하는,

나를 그런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멀리, 더 멀리--- 가자고.

그러다 생각이 퇴직에까지 미치자,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당장 행복은 하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나는 내 마음을 노력해 보기로 했다.

물러터진 홍시가 아니라

단단한 단감이 되기로 했다.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상담치료도 받고.

내 수업을

좋다고

말해주는 학생들 속에서

수업하며...


도망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 수많은 고민 끝에 패배한 장수의 기분으로 이 학교에 남기로 했습니다. 앞날이 꽃길은 아니지만, 비장해지지 않고 더욱 단단하고도 따뜻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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