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 Mar 26. 2024

삼체 :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문과는 뭘 할까?

혹시 기내에 통사론 전공하신분 계신가요?

"혹시 기내에 통사론 전공하신분 계신가요?"


와 같은 말을 하게 될 승무원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비슷하게


"혹시 기내에 에밀리 디킨슨을 연구하신 분 계신가요?"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내에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 과연 치과의사나 한의사가 나서야 하는가 하는 농담에서 나온 이 생각이 한 SF드라마를 보다 성골 문과인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과연 나는 인류 위기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베리교수님의 통사론 강의중


얼마전 넷플릭스에 공개된 드라마 "삼체(Three Body Problem)"를 봤다. 글을 위해 작품을 조악하게 소개하자면 인류에게 외계인에 의한 위기가 닥쳐서 과학자와 군인, 정부요인 등이 각종 문제를 해쳐나가는 이야기이다. 제목에 사용된 삼체 문제는 본래 물리학, 천문학에서 3개의 체(body)가 얽힐 때 나오는 복잡성에 관련한 난제를 칭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이 드라마와 류츠신의 원작 소설은 항성 3개를 가진 행성에 사는 종족을 다루면서 이 종족이 항성 운동의 불규칙함으로 인해 아주 느리고 부침이 있는 문명 발전을 겪었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구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 삼체인이 척박한 모성 대신 지구에 새로이 정착하기 위해 지구로 진격하며 동시에 지구의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기 위해 양자 수준의 교란을 일으킨다.


적어도 인류측에서는 이야기가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사건으로 삼체인에게 지구의 정보를 흘린 이도,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극 중 주인공도 과학자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외계의 침공이 닥치기까지 400년이 주어진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상대를 마주하는 일은 정부기관에 더불어 수학자나 공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이 주도할 것이라는 생각은 이상하지 않다. 그들과 우리의 핵심적 차이는 (적어도 극중에서는) 과학기술의 차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내가 비슷한 자리에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아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과연 뼈문돌이인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혹은 같은 분야의 뛰어난 분들은 뭘 할까?)


1. 인간과 삼체인의 대화분석


언어학과 사회학의 중간즈음에 "대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 CA)"이라는 분야가 존재한다. 이는 담화분석(Discourse Analysis)으로 통칭되는 분야의 하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방법론 중 하나이다. 여기서 연구자는 실제로 수행된 대화를 전사(Transcribe, 그대로 적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대화참여주체가 어떻게 대화를 만들어나가며 어떤 전략을 사용하는지 살펴본다. 작중에서 삼체인과 인간이 거짓말이라는 개념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플롯의 흐름상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자세히 말하진 않겠지만 이를 기점으로 삼체인들의 전략이 크게 바뀌기 때문이다.


CA(대화분석의 줄임말)의 관점에서 보면 삼체인과 인간 사이에 지속된 대화 자체가 귀중한 데이터가 된다. 작중에서도 다루어지지만 삼체인은 인간의 모습과 언어를 이용해 인간과 소통하곤 한다. 하지만 작품의 면면에서 그들의 사고가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미 CA 분야에서는 인간이 아닌 주체와 인간의 대화를 연구해온 바 있다. HCI(Human-Computer Interaction)라는 분야로 가볍게는 빅스비, 시리 등 언어모델과 인간의 대화를 생각하면 된다.


이처럼 삼체와 인간의 대화가 CA를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나 CA가 이미 비인간주체와의 소통을 연구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삼체의 세계에서 명확히 적용가능한 연구프로그램일 것이다. 그럼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작중 대화에서 사람들은 삼체인과의 대화 데이터만으로 그들이 거짓말에 대한 개념이 없음을 알았다. 이처럼 대화 데이터가 충분하다면 그들의 인지적 전략이나 세계에 대한 지식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기호학, 이론언어학


사실 기의와 기표에 대한 소쉬르식 기호학과 현대 언어학계에서 실시되는 연구가 직결된다고 생각하긴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어쨌거나 언어는 감각 가능한 무언가(기표)와 그 내용(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음운이나 음성적 요소, 문자가 아닌 손짓으로 표현되지만 인간 언어의 특성을 '완벽히' 가지고 있는 수어(수화)의 존재에서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수어는 소리나 문자가 없지만 손짓이라는 감각 가능한 물리 수단을 통해 기의와 연결하여 언어로서 작동한다. 즉, 삼체인들끼리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정확히는 감각 가능한) 매개체를 통한 기의의 교환이라는 방식의 소통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들이 인간과의 소통에서 인간의 자연어를 쓰는 이상 이러한 분석은 유효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삼체인이 인식하는 세상이나 소통 체계의 특성의 유추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언어학에서 다루는 언어는 꽤나 인간적인 신호체계이다. 돌고래나 개미, 꿀벌의 신호체계도 언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언어학 내에서 이들의 신호체계는 인간언어의 특질을 갖추지 못해 언어로 인정받지 않는다. 인간 언어는 상당한 복잡성과 우연성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구조적 기저를 갖추고 있는 체계이다. 그러면서도 언어 기호 자체는 자의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현대언어학에서는 현장과 사용 중심의 언어 연구도 중요한 부분이나 통사론 등을 위시한 이론언어학 분야에서는 주로 구조적, 추상적인 도구를 통해 인간 언어의 본질을 파악하려 한다.


생성문법 전통의 언어학에서는 모든 인간언어는 일종의 보편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족 수준에서 다른 언어들끼리도 (예를들면 독일어와 몽골어) 추상적 구조화를 거치면 상당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인간언어를 연구한 결과 드러난 인간언어만의 보편적 특성을 삼체인의 언어사용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삼체인이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는 이상 이 연구가 유효한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구조적 도구를 통한 추상적 이론언어학은 드러난 데이터의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아내는 작업이며 흐린(fuzzy한) 현상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가령 이를 통해 삼체인이 인간 언어를 사용해도 같은 사건(event)을 묘사하는 통사 구조가 인간과 비교해 특징적이라든가, 언어 이외의 다른 신호체계가 발견된다면 이와 언어체계의 대조를 통해 삼체인의 신호체계를 연구할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언어 사용자(주로 모국어 화자)가 특정 문장을 정문(문법적 문장)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문법성 판단 또한 유효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는 어느정도 언어직관을 다루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이론적 작업으로 특정 문장, 발화의 구조적 특징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문장, 배열을 정문으로 인식하고 사용하는지를 살펴보면 삼체인의 인지적 특징을 일부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3. 그런데 주인공은 아닐듯


물론 이렇게까지 설명이 길어져야 한다면 딱히 언어학 전공자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차세계대전을 다룬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독일군의 암호를 푼 것도 수학자였다. 물론 언어학자가 주인공인 컨택트 (Arrival)와 같이 특이한 사례도 있지만. 게다가 삼체인의 출현, 침공과 같은 일이 닥치면 분야를 막론하고 무엇이든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할 것이다.


그저 '뭐라도 해야지' 라는 생각에서 과연 뭘 할 수 있을지 빈약한 지식으로 한 번 생각해 본 것 뿐인데, 예상보다 연구거리는 많을 것 같다. 역시 일단 뭐든 '각'을 보긴 봐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햄릿의 '재미' (?) 에 대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