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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노 May 18. 2024

나만이 걷는 거리

:re (입대 D-9)

 아무것도 없던 그 길. 논, 밭, 그리고 약간의 사람 혹은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포장도로. 여름밤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풀벌레들의 소리. 그리고 작은 가로등 불빛 하나. 그 작은 빛과 내 앞에 보이는 좁은 도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서서히 지나간 후 남아있는 땀에 젖은 찝찝함. 한 손에는 음료 혹은 작은 맥주 한 캔과 함께 누군가와 발을 맞춰 걸어가던 그때. 5~6년 전의 오늘.

내가 걷던 그 길은 나와 몇몇 친한 친구들만이 알던 한적하고 조용한 거리였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올 것만 같은 느낌을 주던 그 거리는 나와 함께 걷던 누군가가 속을 털어놓기에 참 좋은 공간이었다. 그 길은 생각보다 길었으며, 한참을 걷고 나니 우리는 시작점과 꽤 멀리 떨어진 공간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있었으며, 가끔씩 산책을 하는 어르신들을 보기도 하였다. 걸어서는 절대 가지 않는 꽤 머나먼 곳에 도착한 우리는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지나갔음을 알 수 있었고, 우리의 생각보다 그 머나먼 곳이 가까웠음을 체감하였다. 그 당시 내 나이는 고등학생이었다. 1학년 혹은 2학년.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1학년 그리고 2학년 모두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한 손에는 거의 다 마셔버려 시원함이 많이 사라진 작은 맥주 한 캔, 입에는 두껍고 독했던 담배 한 개비. 옆에 있는 친구들. 이것이 내가 한 가장 큰 일탈이자 가장 소소한 행복이었다.


 아무도 없던 그 길은 나와 내 친구들이 함께 다니던 학원 뒤 편에 위치했다. 개구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나무 계단을 시작으로 불빛 하나 없던 작은 골목을 지나고 나면 넓은 평지와 함께 고요한 백색소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때의 그 분위기를 나는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숙제를 뒤로 한 채 그저 걸었다. 계속 걸었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던 적도 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어떠한 대화 없이도 어색함 또는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했기에 난 오늘도 그날 그때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그 길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개구리 소리가 울려 퍼지던 작은 나무계단 하나만을 남겨둔 채 그 거리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머나먼 그곳까지 도달하는, 아무도 없던 그 길 위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그 무언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자취를 하던 시점에서 난 이사의 소식을 들었다. 오랜만에 본가를 가기 위해 집 주소를 찍고 처음으로 집 앞에 도달한 순간, 난 나의 새로운 집이 그때 그 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그때의 그 길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길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제 그때의 그 길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한번 걸어보았다. 불이 모두 꺼진 학원 뒤 편으로 몸을 돌리고 그 나무계단으로 향했다. 더 이상 어떤 개구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약간의 골목을 지나니 내가 몇 년 전에 보았던 넓고 탁 트인 시야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던 벤치, 풀벌레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울리던 논과 밭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거실이 되었고, 아이들이 떠드는 놀이방이 되었다. 그때의 그 길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길이 아닌, 각자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분할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함께 걷던 친구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이기에 안부 인사의 느낌은 아니었다. 우리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 속에는 무게감이 생겼다. 더 이상 어린 시절 순수하고 해맑던, 아무 걱정 없이 마냥 해맑기만 했던 어린아이들의 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에 대한 생각, 조직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예견. 무언가가 생기고, 변한 것은 그 길뿐만이 아니었다.


 1시간 정도 그 친구와의 대화와 함께 걷던 그 길은 어느 순간 끝을 맞이했다. 분명 더 넓고 길었을 그 길이지만, 어느 순간에 난 그 길의 원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너무 많이 변해있었기에. 마시고 있던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함 끝에 몰려오는 청량감이 아닌, 미지근하면서 오묘하게 쓴맛만 내 목 아래로 흘러 들어왔다. 청량감보다는 더부룩함이 몰려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바람을 맞이했다.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품고 있는 그 길. 그와 반대로 누군가와 함께 걸었지만 지금은  홀로 그날을 기억을 다시 만져보려는 오늘날의 나. 앞으로 몇 년 간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그 길. 그와 반대로 몇 년 간 나 홀로 새로운 곳으로 넘어가 그동안의 인연을 잠시 묻어두어야 하는 나.


 비어있던 공간은 무언가 새롭게 들어오기 마련이다. 또한, 너무 많이 품고 있는 경우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다. 그 길과 나. 우리는 서로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을 통해 배운다. 걷는 것을 통해 느꼈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무언가 변한다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변할 징조를 드러내며 서서히 조금씩 움직이다 결국 어느 순간에 멈춰버린다. 변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시간이 충분히 흘러갔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또한, 나조차도 다시 조금씩 움직이다 한순간에 멈춰 변해버릴 수 있는 것. 아무도 없던 그 길을 나만이 걸었다. 가득 찬 그 길 또한 나만이 걷는다. 나만이 걷는 조금은 변한 거리. 내가 다시 돌아와 그 길을 걸을 때 또한 나만이 걷는 거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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