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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노 Aug 25. 2024

겁쟁이

D+91 (회고)

 어린 시절 본 만화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여긴 나에게 맡기고 어서 위로 가. 빨리!" 이때는 왜 이 말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나도 저런 말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뱉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사람이 무척이나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머리가 큰 이후에도, 아직도 그 장면은 멋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시절 내가 꿈꾸었던, 그러한 말을 자신 있게 하는 사람이 아직도 되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동을 했다기보다는, 한 장면 혹은 에피소드의 핵심이 되는 그 사람의 역할이 탐났던 게 아닐까. 즉, 나는 주인공이 되고 멋있는 사람, 남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구나 알 법한 그러한 상황을 한 번 상기시켜 보자. 자신을 희생하고 뒤를 맡아주는 인물. 그 사람은 과연 진정으로 그 장면 혹은 상황 속 주연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오히려 주연을 빛내주기 위한 소모성 인물 혹은 약간의 비중이 더해진 조연이자 엑스트라에 지나지 아니한가.

 주연이 되어 세상의 관심을, 모든 이의 이목을 끌고 싶어 했던 그 아이는 왜 진정으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면 반대로, 주연보다는 잠깐의 주목을 받는 조연이 더욱 멋있어 보였던 걸까. 내가 그 구절을 인상 깊게 기억할 때의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넘치는 당돌한 아이였다는 사실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조연을 도맡아도 주연을 밀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그 말이 더 빛나 보인 게 아니었을까.

 최근 누군가와 성숙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의 대답 그리고 결론은 성숙이란 자아의 온전한 확립이었다.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떠한지,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보다는 스스로 느끼는 가치, 그리고 자아 존중. 그렇기에 이러한 것들은 비슷한 선상에 놓이지 않은 사람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독립적인 것. 즉, 학생으로서의 성숙과 성인으로서의 성숙은 완벽하게 상이하며, 이 둘을 절대 동일 선상에 놓거나 비교할 수 없는 것. 이러한 결론을 다시 떠올려보니 어린 나는 성숙했으나, 지금의 나는 과연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물음에 도달했다.

 지금 내가 그 구절을 처음 봤다면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까. 멋있거나 그 인물이 되고 싶다고 느꼈을까. 혹은 주연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자 계단의 대상으로 여겼을까. 장담컨대, 후자의 시선으로 그 상황 속 인물을 직시했을 것이다. 당차고 자신감 있던, 성숙하던 그 아이는 지금의 내가 아니니까.

 다시금 생각해 보면, 항상 멋진 말을 먼저 내뱉었던 건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한 행동을 먼저 한 사람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보다 어린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적도, 용기 있게 먼저 치고 나간 사람을 시기 질투하거나 원망했던 적도 있다.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두렵다. 그런 멋진 말을 먼저 내뱉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싶다. 최후에 축하를 받고 결국 주연으로 여겨지는 그 인물이 되고 싶다. "여긴 나에게 맡기고 어서 위로 가."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한 후에 누군가 이를 부정해 주길 바란다. "아니, 여길 지킬 사람은 나야. 저 위로 향할 사람은 너야."라고 나의 거짓된 용기를 진정한 용기로 거부해 주길 바란다. 겁쟁이 같은 내 모습이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냈지만, 어쩔 수 없이 주연이 되어야 하는 운명적인 사람. 거짓된 용기가 진정한 용기로 여겨지는 필연적인 주인공이 되고 싶다. 아, 이 모든 것은 허울뿐인 욕심의 껍데기이다.

 성숙했던 어린아이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그 아이의 발자취를 짚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멋있는 사람이자 주연이 되고 싶다는 야망은 나와 그의 유일한 공통점이기에. 이러한 탈이라도 써야, 같은 공통점이라는 가면이라도 써서 스스로를 위로해야 그때의 내가 되지 않을까라는 극도로 어린아이 같은 현재 상황. 과연 나는 성숙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결론에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글이 나의 마지막 회고이자 고해성사이길 바란다. 오랜 시간을 견뎌 허물을 벗고, 마침내 나무 위로 올라가 시끄럽게 울부짖는 매미처럼, 다시 한번 나라는 존재를 자신 있게 드러낼 날이 오길 바란다. 자신보다는 확신을, 후회보다는 호기를 두르고 이제는 진정한 용기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이 겁쟁이와는 오랜 시간 함께할 시간이 없다. 겁쟁이라는 가면이 나에게 뒤를 맡긴다는 말을 할 타이밍을 기다리기는 너무 늦은 것 같다. 내가 먼저, 그때의 나로 돌아가 허울뿐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이제는 내가 먼저 말해줄 때이다. 겁쟁이 같던 나를 이곳에 버려, 아니 남겨두고 믿고 위로 향하고자 한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왔던 그 멋진, 조연 아닌 주연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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