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둔 시점까지 도달한 나는 주위사람들의 질시 어린 부러움의 대상이다. 남들은 50대 중반이 되기 훨씬 전에 벌써 명예퇴직을 당하고 자신이 하던 직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저임금의 직업을 반강제적으로 선택한 것에 비하면 몇 개의 회사를 옮겨 다니며 정년을 불과 4년 여를 남겨둔 시점까지 원래의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 나는 부러움의 대상일 게 분명하다.
내 나이대의 여느 베이비 부머들과 다를 바 없이 나의 사회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였다. 80년 대 후반의 취업 시장은 인서울이 아니더라고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면 대부분 회사를 골라 갈 정도로 구직자 중심이었다. 나도 이러저런 회사에 응시하여 지금도 건재한 모 재벌 그룹의 계열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현금이 든 월급 봉투를 받던 시대였고 쓸 데 많은 혈기왕성한 20대 후반에 지금의 청년세대처럼 비트코인을 하네 주식 투자를 하네 따위의 재테크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다 보니 저축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미혼이라면 누구다 들었을 '결혼을 해야 돈을 모은다"는 주문같은 부모님의 말씀처럼 결혼을 하고 나니 재산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기가 높은 부동산 투자로 내 자산을 불려왔다. 소심란데다 위험을 꺼리는 성격 탓에 주식 투자는 멀리 했고 펀드를 통한 투자가 금융투자의 전부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수입의 많은 부분이 교육비로 사용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가 공감하듯이 대한민국은 아이들을 키우는 비용이 가계 수입 대비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당연하게도 제테크를 위한 여유 자금은 줄어 들었고 목돈이 들어가는 자녀 교육은 내가 정년퇴직하던 해가 되서야 끝이 났다. 다행인 것은 그 시작의 이유야 어찌되었든 국민연금을 1회부터 납입하여 최고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가와 연동되어 있기는 하나 국민연금 수령액만 가지고는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퇴직 후에 여유로운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렸다. 따라서 가족을 위한 수입원을 추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 상가, 오피스텔 투자였다. 대출을 끼고 어렵게 마련한 이 두 종류의 부동산은 지금도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굳이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는 조기퇴직이든 정년퇴직이든 국민연금 이외의 수입원을 마련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본인의 투자성향을 세심하게 확인하고 본인의 시드 머니에 따라 최적의 투자 방법을 찾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과정은 크든 작든 금전적인 손실을 동반하는 배움의 과정이다.
어느 정도의 고정적인 수입을 확보했다면 이제 은퇴 후의 제2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이다.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해서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일을 해야되는 형편-누구나 피하고 싶은-이 아니라면 이제 나의 버킷 리스트를 실현에 옮길 때이다. 베이비 부머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생각조차 못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종이와 연필을 내밀고 버킷 리스트를 열 가지만 적어보라고 해도 그 열 개를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모르는데 그에 대한 계획은 당연히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게 분명하다. 정년이 거시거리에 들어 오는 나이가 되면 자신의 버킷 리스트 를 만들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리스트가 만들어지면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있으면 즉각 실행할 수 있는 것과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들을 분리하고 리스트에 적힌 항목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결과는 세심하게 만들어진 계획과 그에 따른 실행에서 얻어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 개월 또는 수 년이 걸려야 성과가 만들어지는 계획을 인내심을 가지고 실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내가 퇴직 후의 수입이 아닌 다른 일들을 정리해 보기 시작한 것은 정년퇴직을 5년 쯤 앞둔 어느 날이었다. 정년이 아직 연장되기 전이 55세이던 때에 이미 퇴직 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이유로 조금 일찍 은퇴 후의 삶에 대한 준비를 운 좋게도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는 아내와도 의견이 일치한 '다른 나라에서 오래 살기'였는데 태생적으로 패키지 관광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 우리는 늘 맘에 드는 나라, 도시에서 은퇴 후에 적어도 6개월 씩은 살아보자를 되뇌이여 자유 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막상 6개월을 그러면 뭐하며 보낼 것인가에 서 고민이 생겼다. 나라에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관광은 1-2개월이면 충분할 듯 싶었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들은 현지의 주민처럼 살아야 할 터인데 딱히 무엇으로 소일할 것인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없었다. 그러다가 전세계에서 K-팝, 드라마와 영화에 더하여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뜨겁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한국사람이면 십중팔구 나도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내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읽기/쓰기/말하기/듣기 모두를 가르칠 수 있는 정도의 학문적 깊이가 있을 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원을 양성하는 고려사이버대학교 한국어다문화학부에 입학했다. 정년퇴직과 함께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받을 수 있도록 4년의 여유를 가지고 한국어 교원이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고 지난 8월에 졸업을 하였다. 다 늙은 나이에 하는 공부가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 4년을 다녔으니 왜 저러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런 공부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여러 명의 외국인을 가르치는 경험을 쌓았다.
다시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던 때로 돌아가면 그저 바람들을 적은 리스트가 한 줄씩 늘어날 때마다 할일을 찾았다는 안도감보다 이 바람들이 구체적으로 실현이 될 지 확신이 없었기에 오히려 불안함이 더해졌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은퇴 후의 삶은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이니 불안함은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그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획에 따라 실행에 옮기면 적응의 동물인 인간은 내재된 불안함을 잊고 목표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안개처럼 덮치던 시간들을 지나온 사람으로 우정어린 충고를 드리자면 "실행하고 목표에 집중하라"이다. 그러면 불안감은 단계별로 이뤄내는 성과물과 노력한 시간에 비례해서 사라지고 안도감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불안감을 떨치고 내가 선택한 길을 믿고 가다 보면 꿈꾸던 지점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교원 자격증"은 내게 은퇴 후에 또 다른 삶을 살아갈 도구 중에 하나가 되었듯이 말이다.
우리는 자신 만의 버킷 리스트에서 나온 성과들로 자기 만의 살아갈 수단을 준비할 수 있다. 그 시작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종이 한 장과 연필 한자루면 충분하다. 내일하지 말고 오늘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