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밖 시간 2
양/음력달력의 공존으로 한해에 생일이 두 번인 것 처럼 산다. 양력은 대외용, 음력은 가정용. 둘 중에 메인은 매년 바뀌는 음력생일이다. 늘 긴긴 겨울방학에 점령당해 여차하면 나조차 잊던 양력생일은 카카오톡 생일알림이 생기고 나서야 구색을 갖춘 듯 대외용이 되었다. 그래서 마치 가짜 생일을 만들어 사람들을 유인하는 기분이 들 때가 왕왕 있다.
가정용 생일은 소소한 이벤트 마냥, 엄마가 신년 달력에 4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면 알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앞선 것은 정월대보름에 태어난 내 동그라미이다. 덕분에 생일상은 줄곧 미역국에 오곡밥 내지는 찰밥. 나는, 오곡와라라락밥이던 찰철철밥이던 둘 다 굉-장히 싫어한다. 생일자가 이토록 싫어하는 밥이 줄기차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정보람 말고 정월인지 대보름인지 어쩌구의 생일이 맞다. 이름도 '보름'이 되려다 바뀐 것이니, 그 날에 마음뺏겼을 젊은 날의 부모님이 아차차 급하게 핸들을 틀었을 것이라는 의심도 합리적이지 않나.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든 내가 즐기는 생일은 아니었다.
올해는 정월을 삼 일 남기고 외가에서 엄마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물었다. 찰밥 할까? 나는 습관처럼 대답했다. 아니, 하지마, 맛 없다니까 왜 자꾸 찰밥 해. 이 습관적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린 깨닫고 말았다. 만들어봤자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로인해 엄마는 지난 3년간 찰밥을 짓지 않았다는 것을. 자연스레 대외용이 메인 생일이 된 것을. 지난 30년간 굳이굳이 오곡와라락찰철철밥이 지어졌던 이유는 정월대보름도 내 생일 때문도 아니었다. 오곡와라락찰철철밥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던 아빠가 딸 찬스를 쓰는 날이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밥이 굳이 한 솥이나 지어져도 됐던 건, 소분된 밥을 하나씩 꺼내 렌지로 돌돌돌 신나게 돌려 먹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뜨악. 누가 먼저 현란한 드립력으로 이 어색한 마를 끝낼 것인가. 일상에도 데우스엑스마키나가 필요하다.
다행히 엄마가 먼저 호흡을 잡았다.
그래도 네 생일이니까 찰밥을 해 보자. 대신 진짜 조금, 딱 너랑 나 한그릇씩 먹을 만큼만.
아니 그냥 흰밥하자.
아니 너 생일이잖아.
하....그러면 그냥 엄마랑 나랑 반 그릇씩 양만. 한그릇씩은 다 못 먹을걸?
한 그릇을 어떻게 짓냐? 그냥 먹어라.
엄마도 나도 꼬박 3년만에 굳이굳이 지은 오곡와라락찰철철밥을 반에 반 그릇도 못 먹었다. 여전히 맛 없는 건 맛 없는 것이다. 그리운 맛 조차 될 수 없다. 아빠가 다 먹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평생 정월이 보름이 축하해줘도 되니까, 이 맛 대갈대갈 없는 오곡와라락찰철철밥을 아빠가 다 그냥 막 왁 뺏어 먹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