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활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장병과 주말을 보내다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월요일이라는 탈출구가 기다려진다.
(죄 없는 자 나를 돌로 치소..)
카페인의 힘을 빌려보지만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은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한의원이나 재활의학과를 전전해 보아도 몸의 개운함은 그때 잠시뿐이다. 그렇게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휘청거리며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던 어느 날,
아이들과 오래,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전략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체력장 날은 내게는 곧 수치의 날이었다. 나는 'ㄱ'으로 시작하는 내 아버지의 성씨를 줄곧 원망했었다. 삼 년 내내 학급에서 제일 먼저 시범을 보이는 출석번호 1번, 시범조였기 때문이다. 운동신경까지는 물려주지 않으신 아버지 덕분에 내 시범은 매번 폭소폭탄이었다.
몸개그 정도로 끝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텐데. 그중에서도 '오래 달리기'는 내 몸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이었다.숨이 차게 뛰는 건 쉬는 시간 10분 안에 매점으로 뛰어가 한 손엔 삼각김밥을, 한 손엔 레쓰비를 들고 다시 교실까지뛰어오는 것만으로도족한일이었다.
"난 못 뛴다. 안 뛴다. 오래달리기 기록을 생활기록부에 꼭 쓰셔야 하냐." 겁을 상실했던 18살의 나와, 당시 젊은 피였던 28살 담임선생님이 외나무다리 한가운데서 대치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결국,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운동장을 함께 뛰어주셨다.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오죽했으면 그러셨을까.
달리면서 만난 풍경과 기록.
달리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던 내가 내년 봄에 열릴 마라톤 참가를 목표로 달리기 연습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은사님이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것 같다. (아 아직 무덤에 계실 땐 아닌가.)
물론 처음엔 1km도 뛰지 못해서 걷다 뛰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잡다한 생각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다. 뛰다 보면 몸이 힘들어서 생각을 멈췄고,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니 선명하게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달리기는 나 자신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자 내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내게 집중하다 보니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마련이었다. 글쓰기가 그랬다. 매일 즐겁게 술술 써지지는 않지만 반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이 분명히 생겼다.
출처: 유튜브 '채널 십오야'
출처: tvn <텐트 밖은 유럽> 캡처
유해진 배우를 볼 때마다 나도 그와 같이 단단하고 탄탄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텍스트로는 표현되지 않는 강단이 tv화면 밖으로 흘러넘쳤다. 당차 보이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진가를 드러낸 나의 마라톤 롤모델.
속도와 싸우지 않는다는 그 처럼,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가는 달팽이처럼, 꾸준한 여정의 한걸음을 내딛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