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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미 Nov 28. 2024

집에서 노는 여자.

첫눈이 내린 뒤, 온종일 기온이 영하 1도 언저리쯤 머물러 있다. 이런 날씨엔 이불 밖이어도 위험하지 않은 곳이 딱 한 군데 있지.


바깥의 소음과 분주함이 잠시 잦아드는 공간이자 가장 단순하고도 완전한 평화를 느끼는 곳.

사.우..


나는 사우나를 좋아한다. 뜨끈한 물속에 목까지 잠길 정도로 들어가 있으면, 죽어서 간다는 천국이 바로 여기인가 싶다. 피로를 녹이는 따뜻한 물의 온도와 열기가 온몸을 감싸면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는 힐링의 시간이 된다.



가족여행 중, 일본 후쿠오카 사가현의 한 온천에서.


눈 내린 어느 날, 어김없이 사우나를 찾아 고요함 속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데, 옆에 자리를 잡은 할머님이 말을 걸어왔다.


"애기엄마, 거기 폭포수 버튼 좀 눌러줘요. 허리에 폭포 물줄기를 맞으면 시원하거든."

"네." 대답과 함께  밀려오는 노곤함에 눈을 감으려던 찰나, 할머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면 혈액순환도 되고 좋아."


천국 어디쯤의 구름 위를 걷고 있었는데 할머님의 스피커는 멈출 생각 없이 계속 재생 중이다. 허리 통증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용하다는 어느 정형외과 이야기로 이어졌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아들 자랑까지 하시더니 급기야 내 호구조사를 하는 것으로 대화의 경로를 이탈하고야 말았다.

  


조사를 마친 어르신의 깊고도 넓은 오지랖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저씨 혼자 벌어서 다 돼?

K주부, 가정교사, 가사도우미, 라이딩 로드 매니저, 병아리 작가까지. 이래 봬도 제가 부캐가 이리 많습니다 어르신. 혼자서 몇 명의 몫을 감당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라는 걸 들킬까 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 말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고  뺨에 사르르 도는 홍조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애기엄마는 집에서 놀아?"

별 대답을 않자 바깥양반에서 나로 변경된 타킷에 순간 마음이 곶감처럼 쭈그러들었다. 온탕 안에서 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로 뒤범벅이 되었고, 오히려 내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내 존재를 들킬까 조마조마 했다. 젊음도, 직장도, 동료도, 계획도,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뒤집혀 여기까지 온 지 모르는 데에 비해 할머님이 툭 던지신 한마디는 너무 거칠게 느껴졌다. 텍스트 그대로 '술 권하는 사회'임이 틀림없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억울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 천국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나 고민을 했다.



"일이 사무실에서 그리고 8시부터 6시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만 한정되기 때문에 갈등이 자꾸 발생하는 거예요. 제 일이 왜 집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 고정된 0.5평짜리 사무실에 앉아서 해야만 하는 일인지 그 누구로부터 한 번도 이해할만한 설명을 듣지 못했어요."
발췌 : <슈퍼우먼은 없다>, p51. 앤 마리 슬로터 지음.



사실, 브런치스토리 가입 절차 중 자기소개 직업란을 작성할 때 시간이 적지 않게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부라는 두 글자에 냉장고 묵은 반찬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래, 에세이를 쓸 거니까 에세이스트로 해두자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가 나 같지 않아서 새삼 몸서리를 쳤었다.


집에서 노는 여자. 그 안에는 내가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작은 세상이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엄마, 아내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단단하게 쌓아 올리고 있다. 나는 '노는사람'이 아니다. 매일 은은한 별빛과 달빛을 만들어내며 우주를 품을 힘을 기르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세계에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다.








사진출처 : by Elegant_Inspiration_Art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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