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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하리 Oct 22. 2024

주짓수양록

체육관 사람들

 육아 우울증을 겪고 있던 중, 코로나19가 겹치면서 나는 20대 후반에 이혼하게 되었다. 

그것이 육아 우울증이었는지, 아니면 갑과 을 사이의 결혼생활에서 느낀 피로감으로 인한 우울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내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일상적인 활동을 힘겹게 이어갔지만, 마음속에는 어떤 희망도 목표도 없는 무기력함이 가득했다. 다가오는 현실은 나를 점점 더 짓눌렀다. 

사랑받지 못하고, 상대의 뜻대로만 움직이며, 내 의견은 무시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존재가 희미해지는 듯한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던 상대의 말을 따라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원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들렸지만, 마음속에는 우울함과 미안함, 그리고 죄책감이 점점 더 깊어졌다. '내 아들을 위해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재촉하며, 오히려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데, 난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주변 사람들과 나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했고, 그럴수록 내 안의 절망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친정에 내려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전화번호도 저장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화가 왔다.

 “얘기 들었어. 왜 이혼해? 괜찮아? 나한테만 말해봐. 무슨 일이야?”

참으로 황당했다. 나와 많은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 나의 이혼에 대해 조언을 하려는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어이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소문 듣고 걱정돼서 사람들한테 물어봤지.”

 “그동안 어린 나이에 사모님 돼서 집에만 있는 여자라고 비아냥거리던 분이 제 소식 듣고 번호까지 알아내서 연락 주시니 감사하네요.”

 나는 전화를 끊고 모르는 번호를 차단했다. 매번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나를 호구로 봤던 것이 화가 나서 그랬을까? 아니면 나만 아픈 것 같아 억울해서 그랬을까?

 “엄마, 왜 화났어? 보이스피싱이야?”

아무것도 모른 채 할머니 집에 와서 신나 있던 아들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당시에 나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었다. 이혼 서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들을 갑자기 데려갈까 봐 두려웠다. 

 집을 나오기 전, 시어머니는 "너 아들 없으면 못 살지? 너 가버리면 우리 아들 장사는 어떻게 하니? 내가 너 못 나가게 하려면 니 아들이라도 데리고 가야겠다."라며 강제로 데려가려 했었다. 

 하지만 무기력한 내 곁에 아들을 온종일 둘 수는 없었다. 나의 어두운 감정이 아들에게 전염될까 두려웠다.


 "운동 하나 시켜. 그래야 애도 스트레스 풀리지. 돈은 아빠가 다 해줄게, 걱정 마."

친정 아빠의 조언에 따라 나는 체육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눈물이 많고 늘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아들이 내가 없이 뭔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태권도였다. 요즘 아이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가는 학원이니, 아들도 잘 적응할 거라 생각했다. 멀리서 아들이 잘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며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지만, 체험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들은 "태권도 싫어."라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주짓수 같은 거 한번 시켜봐. 이젠 그런 걸 해야 돼.”

매번 이런 얼굴로 서럽게 울던 아들

 친정 아빠의 무심한 한마디에 나는 다시 핸드폰을 붙잡고 주짓수 체육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시골 동네에 주짓수를 가르치는 곳이 있을까?’

 그러다 결국 합기도&주짓수 도장을 찾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어 방문 상담을 신청했다.     

 

 "아들이 적응할 동안에만 저도 같이 수업을 들어도 되나요? “

 이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여기서도 아들이 싫다고 하면 더 이상 선택지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주짓수는 학년별로 하지 않아요. 수업 시간에 맞춰서 오시면 됩니다.”

 예쁜 미소를 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분명 나와 통화했던 그분이다. 과하지 않은 친절함과 따뜻함이 내 마음을 끌었다. 마음이 병들어버린 나에게는 이런 세심함이 선택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


 첫 수업, 쭈뼛쭈뼛 아들의 손을 잡고 체육관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각자 몸풀기에 바빴고, 누구 하나 새로운 얼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적어도 내가 왜 이혼했는지 궁금해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전까지 아들과 함께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아들 잘생겼네, 아빠는 어디 가셨어?"라는 말을 던지곤 했다. 아빠가 없는 내 아들에게는 이런 악의 없는 말들이 오히려 큰 상처가 됐다.

 '이곳에서도 어린아이가 왔으니 분명 누군가가 "아빠"라는 말을 꺼내겠지?'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운동 시작하자! 오늘 새로운 얼굴이 있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줘.”

 “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답하고는 곧바로 준비 운동에 들어갔다. 누구도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운동에만 몰두했다.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 운동한다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였다. 수업에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오로지 운동에만 집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운동 자체에 몰입하게 된 그 시간이, 내 안에 있던 긴장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주짓수 등록 후, 처음 아들과 함께 도복입고 찍은 사진

 

 이전에는 어디를 가든 조언을 해주려 하거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캐물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던지는 말들이 흡사 가십거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오직 운동만이 주를 이뤘다. 그 덕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고, 이 운동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러다 직장 문제로 잠시 운동을 쉬게 되었지만, 다시 시작할 때는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나의 미래를 함께 그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의 주짓수 대회 영상을 보고 주짓수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준이가 매트에서 경기를 하는데, 혼자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더라. 체육관 사람들, 특히 함께 운동하는 형, 누나들이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고마웠어. 그걸 보니 나도 마음이 울컥하고 눈물이 났어."


엄마없이 간 주짓수 시합장에서의 모습


 그의 말에 체육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 떠올랐다. 

그들은 단순히 함께 운동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아이의 성장을 함께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든든한 존재들이었고, 그 덕분에 나도 이 운동을 계속해 나갈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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