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그림을 그려왔다.
기억력이 나빠서 대부분의 어릴 적 기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커서 화가를 하라고 했던 말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밥 먹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상이었고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는 것도 항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나를 이루어온 가장 큰 정체성은 항상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림 그리는 것 외에 나에게 꽤 의미 있었던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글쓰기였다. 어릴 때 그림대회 상장 못지않게 글쓰기 대회 상장도 종종 받아왔다.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고 꽤 잘하는 편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림만큼은 아니지만 커서도 글을 종종 써왔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쓰진 않았기에 그림보다 더 자유롭게 글과 친해질 수 있었고 글로 표현되는 나의 생각들은 그림을 그리며 답답했던 부분을 해소해 주기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메모장에 가끔씩 자유롭게 즐겁게 생각들을 기록해 왔다. 막연히 그 생각들이 언젠가는 그림처럼 나의 도구가 되어줄 거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글과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만큼 쓰다 보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러면서 글은 그림 다음으로 나에게 새로운 숙제가 되었다. 둘을 같이 풀어내는 게 내가 넘어가야 할 큰 산이 되었다. 글이라는 건 아무래도 그림보단 좀 더 직접적으로 나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오기 때문에 자유롭게 드러내기가 더 어려웠고 두려움이 늘 앞서 있었다.
좋은 글을 써야 할 것 같고 좋은 영향을 줘야 할 거 같고 가벼워 보이기 싫으면서도 무거워 보이기 싫었다.
생각해 보면 그 무엇보다 내 생각의 밑바닥이 드러나게 되는 걸 가장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있어 보이는 말도 뭔가 가식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번을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다 포기했고 그냥 계속 그림만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림만 그리는 작가로 살아온 지 10년이 되었고 글 쓰는 재미도 점점 더 잊혀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는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였고 또 가장 큰 성장의 시간이었다.
한편으론 시간의 제약이 많이 생겨서 그림 작업이 멈추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또 내가 잊고 있던 부분을 꺼내보게 되는 시간도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되고 나니 그전에 의식하던 시선들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을 끄집어낼 용기가 생겼다.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내 생각에 좀 더 집중을 할 수 있었다. 뭐 글 내용이 구구절절이면 어떻고 깊이가 없으면 어떤가. 그냥 쓰는 거지 뭐. 하는 마음도 생겼다.
엄마가 되기 전 제약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엔 스스로 수많은 제약을 두며 살았었는데 오히려 환경적인 제한이 생기고 나니 다양하게 더 도전을 할 수 있는 자신감과 배짱이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처음으로 용기 내어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원래 뭔가를 쓰기 전 주제나 내용을 확실하게 다듬고 써내려야 할 것 같은 생각도 있었지만 정말 그냥 쓰기 시작하는 것. 행동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기로 했다. 그래서 이 글 다음부터는 우선 그동안 내 메모장에 숨겨두었던 생각들을 찾아서 차곡차곡 올려보려 한다. 그리고 다양한 생각과 그림을 어떻게 같이 풀어갈지 고민하는 과정 또한 써 내려가 볼 생각이다.
그렇게 오늘부터 나는 이제 ‘그리는 사람’에서 '그리고 쓰는 사람’으로 새롭게 정체성을 바꾸기로 했다.
by. JE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