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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20. 2023

저희는 사는 방향으로 결정했습니다.

체한 것이 분명했다.

체한 것을 내리려 누워있는 남편 손을 끌고 복도를 걸었지만 점점 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갈 뿐이었다.

남편을 다시 병실로 데리고 가서 몸을 조이고 있는 교정기를 벗기고 침대에 눕힌 후 간호사에게 소화제를 부탁했다. 병실로 돌아와 금속처럼 차가워진 남편의 손을 손 끝으로 구석구석 주물렀다.

배를 만져보니 딱딱하고 차가워 귀를 갖다 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활기차게 ‘꾸르륵’ 소리를 내야 할 위장이 파업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손을 비벼 따뜻하게 만들어 갈비뼈 아래 갖다 댄 후 시계방향으로 지그시 누르듯이 원을 그리며 문질렀다.

10분쯤 반복하자 손바닥으로 잔잔한 파도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귀를 갖다 대자 ‘꾸르륵, 졸졸졸’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내 체온을 나눠주지 않아도 될 만큼 남편의 배와 손이 다시 온기를 되찾았다.

남편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항암 2차 6일째 되는 날 내일 있을 퇴원을 앞두고 당장 필요한 물건을 제외한 것들은 큰형님을 통해 돌려보내기로 했다.

음식을 넘기기 힘들어하는 상호씨에게 줄 죽을 미리 포장 주문 해뒀는데, 이 동네를 떠나기 전 설이에게 동네 구경도 시켜줄 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네로 함께 떠났다.

8차선 도로 횡단보도 앞에서 동그랗고 통통한 설이의 손을 잡자 회색으로 잠겨있던 세상이 다채로운 원색으로 다시 물들었다.



“그런데, 엄마. 우리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벌새 같은 걸 봤어. 꽃의 꿀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어.”

“벌새가 우리 동네에 있다고? 에이, 설마 혹시 그… 나방 아니야?”

“몰라. 벌새처럼 아주 작고, 날개로 이렇게 날았어.”

설이는 팔을 접어 몸에 붙이고는 손을 재빠르게 퍼덕였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본 것 같아. 날개가 아주 빨리 움직였던 것 같아. 맞아?”

“응! 맞아, 엄마! 바로 그거야! 생각났다! 박각시나방.”

설이는 4살 때 공룡, 5살 때 바다생물에 이어 육지 생물, 6살부터 곤충과 꽃에 관심이 많았다.

평소 설이와 곤충도감과 곤충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죽집으로 가는 길 화단에 핀 꽃을 찍어 이름을 검색하고, 나비를 따라 천천히 길을 걸었다.

설이와의 데이트는 30분 만에 병원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고모, 나 엄마한테 그 비밀 얘기해도 돼?”

“설이야, 지금은 안돼. 그건 아직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형님은 크게 당황했다.

‘비밀이야기? 서프라이즈 같은 건가?’

형님은 전형적인 K맞이로 동생들을 꼼꼼하게 케어했는데 남편이 아프기 전에도 우리에게 필요해 보이는 물품을 준비하거나, 맛집에 가면 꼭 포장해서 우리 집 현관문 앞에 걸어두고 톡을 보냈었다. 벨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오는 일도 없었다. 노티드도넛, 뚱카롱, 소금빵, 앙버터 등 SNS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형님 전용 홈딜리버리로 받았다.

이례적으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일은 우리 집 인터넷이나 에어컨을 교체하기 위해 집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경우 이거나, 우편물을 직접 수령해야 하는 경우가 전부였다.

남편은 아낌없이 주는 형님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속상했는지 화만 냈다. 형님은 주고 싶은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동생에게 서운해했다. 난 평화의 수호자로 남편 대신 선물을 수령해 주고, 남편에게 형님의 깊은 마음을 길게 설명해 줬다.

‘이번에도 상호씨 간병에 필요한 제품을 구매하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2차 항암 시작일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우리는 퇴원 준비로 분주했다.

빈혈 수치가 떨어져 이틀간 수혈을 받았고, 혈액수치가 정상범위가 되어 일정대로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병원 이전을 위한 서류를 준비해야 했고, 면역항암제 ‘옵디보’ 환급을 위한 서류도 준비해야겠다.

특히, 면역항암제 환급 서류가 까다로웠는데, 권교수님이 인턴을 통해 설명을 지시하셨고, 퇴원 전 직접 오셔서 제대로 서류가 준비되었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주셨다.

집으로 갈 때 타고 갈 129를 예약하고, 퇴원 약이 제대로 나왔는지도 체크했다.

하나도 빼놓으면 안 된다. 한 시간 반 거리를 다시 올 수는 없는 일이니까.


며칠 전 전원을 결정하고, 회진 시간 권교수님에게 얘기했다.

“전원 할 병원은 결정하셨나요?”

“남편이랑 상의했는데, 지금 몸 상태가  멀리 항암을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자주 응급실에 갈 일이 발생할 것도 같고요. 아무래도 집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희 집 근처 종합병원이 안산 고대병원, A병원, B병원이 있는데 셋 중 한 군데로 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날 오후 회진 시간.

“제가 알아봤는데, B병원은 최근 의사 선생님이 그만두셔서 의사 1분당 담당 환자수가 많아 좀 걱정되네요. 안산고대는 워낙 좋은 병원이고, A병원도 좋은 병원이니 둘 중 한 군데로 결정하시면 될 것 같아요.”


다음날 오전 회진 시간.

“혹시 진료예약은 했나요?”

“네, 전원 상담원에게 상호씨 현재 상태를 설명했고, 상호씨를 담당해 주시겠다는 교수님이 계셔서 외래 예약했어요. 최**교수님 이세요.”


그날 오후 회진 시간.

“최교수님에게 설상호씨 처음 우리 병원에 왔을 때부터 현재 상태까지 설명을 했습니다. 젊고 능력 있는 분이신 것 같으니 걱정 말고 진료 잘 받으시면 될 것 같아요.”


퇴원 당일 아침 남편과 복도를 거닐며 이런 대화를 나눴다.

“상호씨, 아마 이런 병원은 다시 못 만날 것 같아. 매일 하루 두 번 담당 교수님이 회진을 도는 경우도 없고, 주치의 선생님은 하루 4~5번은 왔다 가시지. 이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조치가 지연되거나 우리 얘기를 허투루 듣는 경우도 없었어. 마치 VIP가 된 것 같았어. 그런데, 우리가 이 병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 주위에서 들어서 알잖아? 그동안 질문에 답만 하면 됐지만, 이제 질문을 만들어야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 그냥 여기서 계속 항암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도 생각해 봤지. 항암까지는 지인이나 카카오밴을 타고 올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갑자기 응급실에 갈 일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그럴 땐 가까운 병원에는 우리 의료데이터가 없는데? 이사까지 생각해 봤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지? “

“알지.”

“전원 할 병원 다녀보고, 정말 적응이 안 되면 그때 돌아올 방법을 알아보자.”

“그리고, 단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 교수님은 너무 빈말이 없으셔. 너무 데이터를 기반한 확률만 말씀하시잖아. 알지, 당신 같은 상태의 위암 4기 뼈전이 환자의 5년 생존율이 5% 라는 거. 하지만, 난 희망적인 말이 듣고 싶어.”

“맞아. 나도 그래. 아, 내가 예언하나 할게. 우리 퇴원할 때 담당 교수님이 배웅 나오신다에 한 표.”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돼. 너무 비현실적이야.”


1층 퇴원수속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곧 129 응급대원이 병실로 올라올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로 나가자 복도 앞에 권교수님이 서 계셨다.

거짓말처럼 우리가 떠나기 전 배웅을 나온 것이다.

“보호자분, 퇴원 수속 다 마치셨나요?”

“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우리 남편 정말 많이 회복되었어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권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손바닥 만한 이면지를 내밀었다.

종이에 꾹꾹 눌러쓴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혹시 연락할 일 있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병동 간호사실 번호와 외래 전화번호입니다. 집으로 가셔서 치료 잘 받으시길 바랍니다.”

권교수님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었고,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병동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다 다시 권교수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저희는 사는 방향으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는 그것 말고 선택권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많이 회복되고 용기를 얻어 갑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권교수님은 잠시 그대로 멈춰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 옆 탕비실로 급하게 들어갔다.


129 구급차 뒷 자석에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처음 집을 떠나 낯선 이 길을 역순으로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창 밖은 그날처럼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그날처럼 남편이 누워있긴 하지만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내가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나들이 갔던 백운호수가 보이고, 낯익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 화까지 첫 병원에서 지내며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에 받았던 많은 배려와 진심 어린 응원에 가슴 깊이 감사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권정미 교수님, 허지웅 선생님, 정형외과 김용찬 교수님, 김성민 선생님, 눈썹이 진한 선생님, 처음 이 병원을 추천해 준 단원병원 신경외과 최석광 교수님, 암병동 간호사 분들과 사우분들, 가족들과 지인 분들.

그리고 우리를 응원해 주시는 브런치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다음 화는 전원한 병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라이킷과 댓글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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