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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JI May 23. 2024

내면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그 녀석, 걱정 외>

<나는 소심해요>  걱정이 넘치고 많이 소심한 너에게

폭력의 희생양이 된 후 힘들었던 건 반복된 그 순간의 재생을 무시하기 힘들었던 탓도 있다. 언제고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로 지독하게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갔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목덜미에 털이 다 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진짜 그렇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정말 그렇다. 


완전한 망각은 하지 못 했다. 10년 차까지는 여전히 생생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정말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제는 조금 정신을 집중해야 다시금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여름. 우연히. 거의 10여 년 만에 하굣길 고등학생들과 함께 시내버스를 탄 적이 있다. 대단히 거친 것도 아닌 평범한 수준이었을 아이들이었다. 금방 거북함을 느꼈다. 이미 그들의 관심사 밖일 수밖에 없는. 중년의 아줌마일 뿐인데 악어 앞 병아리라도 된 듯 심장이 천천히 쪼여옴을 느낄 수 있었다.    


호흡하며 애써 진정을 해본다. 내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주며 진정시키는 와중에 창가 쪽의 영혼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멍하게 앉아있는 학생을 보게 됐다. 버스는 학생들로 꽉꽉 들어찼고 하필 비도 왔던 날이라 습도마저 높고 창문도 닫혀있었다. 둘, 셋씩 짝을 이뤄 이런저런 사소한 수다 중인 아이들 틈에 꼿꼿한 자세로 창밖을 보고 있지만 시선이 또렷하지 못하게 뭔가 멍-해 보이는 학생이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 학생에게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쳐다보다가 저 학생이 내 시선을 알면 어쩌나.’ 싶어 시선을 거두다가 하복 아래로 뻗은 하얀 팔에 죽죽 그어진 수많은 선을 보았다.     

그 학생이 무슨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가정에서의 이유가 출발점일 수도 있고, 나와 같거나 비슷한 이유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이해를 구한 적 없는 이유일 수도 있다.     


나라면 분명 용기가 없고 소심해서 감췄을 텐데, 그 학생은 당당했다. 멋졌다. 물론 아파 보였다. 아직은 선명하게 붉은빛이 도는 상처들은 그 학생의 마음속 비명을 형상화한 것 같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아팠다.     


막연히 언젠가 내 상처에 대해서, '내가 겪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언젠가 글로 써서 남들에게 내비쳐 봐야겠다.' 생각했었다. 현생이 바쁘니 차일피일 미루고, ‘나까짓 게 무슨 책이냐' 싶어 일 년 이년 미루던 일을 그날 그때 단호하게 결심했다. 


'열일곱의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하겠구나. 그들에게 무엇도 될 필요 없고, 무언가와 맞설 필요도 없으며 그저 그냥 그 순간을 살짝 피해서 견뎌내기만 하라고 알려주고 싶다.'라는 내 안의 뜨거운 욕망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수용, 인정, 소심함, 신중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두렵다. 학폭 피해자니까 나를 물로 볼까, 우습게 보일까 두렵고. 네가 잘 못 한 게 있으니까 맞았겠지. 하는 시선이 있을까 미리 거북스럽다. 학폭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두르게 되면 사람들 눈에 띌까 봐 또 두렵다. 남들과 같은 학업 코스를 밟아 온 게 아니니, 보통과 달라서 따돌림받을까 봐 또 걱정된다. 이젠 가정까지 이루고 있으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누가 될까 봐 그것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무섭다.     


큰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까지는 여전히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선을 긋고 살았다. 제법 굵은 안전선을 그어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면 '나도, 우리 가족도 안전하니까.'라고 생각하며 잔뜩 날이 선 상태로 선을 긋고 살았다.     



걱정, 두려움, 마음, 알아차림

그즈음부턴 과거에 목덜미 잡혀 끌려가지 않았다. 학폭 피해자라는 사실보다는 또 상처받지 않겠다.라는 각오가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자꾸 숨기려고 할수록 더 짙게 보이는 과거는 나를 더 짓누르고 만다.    

 

누구나 소심한 면이 있을 것이다. 예민한 면도 분명 분야가 다를 뿐, 각자 존재한다. 누구나 걱정도 가지고 있다. 걱정하는 부분이 다를 뿐, 그 녀석 걱정은 모두에게 존재한다. 나의 치명적 단점인 것 같아서 감추고 숨기려고 할수록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무게감만 늘어난다. 별거여도 별거 아닌 양 내뱉고 나면, 별거 아니게 되어버린다. 나 소심해. 나는 걱정이 많아. 나는 학교폭력 피해자였어. 

  

언제고 이 모든 것이 별거 아닌 게 될 만큼 평안해지길. <나는 소심해요>와 <그 녀석, 걱정>을 나에게 읽어주며 다독여본다. 너만 소심하고 걱정 많은 게 아니야.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이제 제법 평범의 범주 안에서 부대낌 없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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