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서 싸울 용기의 부재가 죄가 되나요?
문 밖에는 내가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있다. 공포가 있다. 나를 한 입에 집어삼키고도 남을 사자가 있다. 나는 문 안에 갇혔다. 어쩌면 안전하려고 스스로를 가둔 것 일지도.
<문 밖에 사자가 있다>에서는 두려움에 점점 더 매몰되어 가는 노랑이와 비록 문 안이지만, 안전한 내 울타리에서 사자에게서 벗어남을 준비하는 파랑이가 나온다. 노랑이는 계속 계속 두려워한다. 끝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다. 비록 문 밖에는 사자가 있지만, 문 안 쪽은 안전하다는 것을 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사자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가며 문 밖을 나갈 준비를 한다.
기어이 파랑이는 성공할 것인가? 책은 노랑이가 여전히 자신의 노란방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 이 책은 파랑이의 성공과 대비되어 노랑이가 정말 답답하고 불쌍해 보인다고 생각되기 쉽다. 우린 끝끝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 한 노랑이를 실패자로 보고 책을 덮어야 할까?
우리 삶에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도 있을 수 있고, 있어도 괜찮다고 알려주는 건 아닐까? 문 밖에 서 있는 사자를 슬기롭게 헤쳐 나와도 삶은 사실 첩첩산중이다. 크고 작고, 깊고 덜 깊고, 더 굽이치거나 더 반듯한 차이는 있겠지만 문 밖을 나온 것 만으로 생의 모든 미션이 클리어되는 것은 아니다.
문 밖을 나오는 데에 파랑이는 10페이지가 필요했지만, 노랑이는 20페이지가 필요할 뿐일지도 모른다. 삶은 책 밖에 있으니까 말이다. 진짜 이야기는 책을 덮고 시작되니까. 오들 오들 떨고 발전하지 못한 채 끝난 노랑이의 이후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런 노랑이에게 희망을 건다. 당장 앞서 나가는 파랑이와 너와의 차이는 지금은 수천만 광년 같아 보이겠지만 고작 10년, 20년 뒤에는 비슷해질 거다.
완전하게 두려워하고,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음이라는 땅을 단단히 다질 수 있는 시간이다. 다만 네 마음의 땅이 조금 더 무른 땅이라, 더 많은 흙과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지나고 보면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시간이라는 건 없다.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너의 20대가, 30대가, 40대가 되는 것이니까. 너는 매 순간 온전하고 완전하다.
네가 가장 숨기고 싶고 쓸모없게 느껴지는 시간들을 보내는 지금이어도, 훗날의 네가 보기엔 어여쁘고 가엾을 뿐. 쓸모없지 않다. 그저 괜찮은 시간이다.
시간을 쓰레기같이 소비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매 순간일지라도, 그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은 너를 다져주고 있다. 이건 먼 훗날이 되어봐야 알 수 있다. 단지 그 시간 차이로 인해 지금의 네가 힘든 거다.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마음속에 큰 구덩이가 생겼다면 더더욱 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은 흙이 필요하다. (노랑이에게 더 많은 페이지가 필요할 뿐인 것처럼)
흙을 채우는 데는 낭비되는 (좀 많은) 시간만 필요하다면, 구덩이를 잘 채우기 위해 시간을 좀 낭비하면 어떤가!
지금 잘 채워두지 않으면 언젠가 또 구멍이 뻥. 뚫리게 되기도 한다. 네 마음이 충분히 단단해지게 많은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어도 좋다. 다만 매몰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의 일상을 보내자. 문 밖에 사자가 있어도, 내 안전한 방 안에서는 웃을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쉴 수 있다. 언젠가 문을 열고 사자와 맞설 수 있겠는데? 싶을 때 문을 열어도 좋다. (어쩌면 문을 열고 나니,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일수도 있다.)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나면 사자가 제 풀에 꺾여 먼저 사라지기도 한다.
어떤 형태든 좋다. 언제가 되어도 좋다. 네가 아깝게 소비한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들이 쌓여 분명 너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고 있다. 그 오늘들은 너를 분명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책에선 파랑이의 긍정과 노력이 잘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랑이가 불쌍해 보여 답답했을 수 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용기가 부족한 건 죄를 짓는 게 아니다. 마음껏 무서워하고, 우울해하는 것. 방안에 잘 도망쳐 있는 것. 우린 그것을 잘 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노랑이에게 괜찮다 말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