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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JI Jun 20. 2024

내면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구덩이>

스스로의 동굴로 들어간 너에게

구덩이 / 다니카와 슌타로 글 , 와다 마코토 그림 / 김숙 옮김 / 북뱅크

일본의 국민 시인으로도 유명한 다니카와 슌타로가 글을 쓴 그림책이다. (그는 유명한 그림책 작가 사노 요코의 남편이기도 했다)어느 일요일 아침 주인공 히로는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구덩이를 파기로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히로의 구덩이 파는 모습을 보며 가족들이나 친구가 참견도 하고 간섭도 하고 관심도 보인다.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탠다.   

얼마나 오래 집중한 걸까? 히로는 파는 일을 멈추고 구덩이에 앉았다. 

히로가 만들어낸 작은 세상. 히로만의 구덩이.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세상에 앉아 있는 히로에게 또 다녀간다. 히로는 한참 구덩이 속 세상을 즐기다가 영차, 구덩이에서 올라온다. 땅 위에서 바라본 구덩이는 깊고 어둡다.   

  

‘이건 내 구덩이야.’라고 한 번 더 생각한다.

 이야기의 끝에서 히로는 어떤 선택을 할까?          


구덩이를 팔 때 저마다 한마디씩 애정(혹은 참견)을 담아 건네는 주변 사람들이 히로가 자신의 세상을 깊이 있기 팔 수 있게 도와준 것 같다. 또 구덩이에 앉아 있을 때도 오가며 말을 거는 사람들의 지나치지 않은 관심.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지 않는 배려가 히로를 편안하게 한다. 한참을 자신의 작은 세상에서 하늘을 떠다닌 히로는 스스로 구덩이 밖으로 나온다.  


   

내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낮과 밤이 뒤바뀐 채 쪽잠을 자며 간신히 살아내고 있을 때도 이따금 집에 찾아와 안부를 살펴주던 친구들이 있다. 밥을 왜 못 먹느냐며 보채지 않고 닦달하지 않고 묵묵히 내버려둔 엄마가 있다. 그들의 적절한 관심과 지나치지 않은 무관심 덕에 나의 구덩이가 완성되었다.     



스스로 만든 나만의 구덩이인 내 방에 들어가 앉은 뒤, 히로처럼 가끔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부분은 위로도 안 되고 의미도 없는 공허한 하늘만이 흘러갔다. 나와는 달리 훨훨 자신들의 꿈을 향해, 찬란한 10대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이 나비처럼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똑똑 노크한다. “밥 차려놨다.”던가 “식탁 위에 갈치 올려놨다.”라며 말을 건넸다.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자신이 한 행동만 나에게 알려줬다.   

  

이윽고 어느 순간, 별것도 아닌 일이 계기가 되어 구덩이 밖으로 영차. 나왔다. 이 구덩이로 무엇을 할지는 ‘내’ 의지로 정할 수 있다. 구덩이를 흙으로 덮어도, 덮지 않아도 좋다. 그런 구덩이가 있었던 것조차 잊을 정도의 시간을 살아내면 된다. 열일곱. 산산이 부서져 조각났던 나의 파편이 아직 그 구덩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랴. 그 또한 괜찮다. 이미 그 파편이 아쉽지 않을 시간을 살아냈으니 말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로 생을 채운다. 그러면 된 것이다.

히로가 느꼈을지도 모를 구덩이에서의 안정을 나도 내가 만든 벙커. 내 방안에서 느꼈다. 그 공간은 충분한 위로가 되어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한다. 스스로 만든 공간. 그 안에서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네가 너의 안전함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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