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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붓 끝에서 피어난 환영과 관능

장-앙투안 바토 & 프랑수아 부셰



The Swing by Jean-Honore Fragonard, 1767-8, The Wallace Collection, London, United Kingdom/wikipedia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Jean- Honore Fragonard, 1732-1806)의 < 그네, The Swing>( 1767-8) 작품입니다. 현재 영국 런던의 월리스 컬렉션( The Wallace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고요. 화려하게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나무에 걸린 그네를 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이 젊은 여인은 한껏 치장한 옷차림으로 시선이 아래를 향한 채 상기된 표정입니다. 그네가 공중으로 치솟는 순간 신발 한쪽이 공중재비를 돕니다. 신발이 떨어질 것 같은 위치에 숨겨둔 연인이 보입니다. 그 또한 볼이 붉그레하게 상기된 채 기쁨과 놀라움으로 여인의 은밀한 치마 속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두 남녀의 '묻지 마' 유희를 지켜보았을 큐피드 역시 '쉿'하고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신호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희미하게 보이는 나이 든 남성의 실루엣도 보입니다. 그네를 밀어주는 모양새로 보아 남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상황을 아예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이 묘한 관계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은밀하고 도발적인 이 모든 설정이 그림을 주문한 후원자의 구체적인 요청 사항이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의 쾌락적이고 은밀한 삶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네를 타는 여성의 자유로운 모습, 날아가는 신발은 성적 유혹과 도덕적 경계를 넘는 자유로운 사랑을 암시합니다. 아래에 숨어 있는 젊은 남자는 사랑과 욕망의 상징으로, 금지된 사랑을 표현하고요. 뒤에서 그네를 미는 나이 든 남성의 존재는 숨겨진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이 그림은 당시 사회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담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프라고나르는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당시 귀족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쾌락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면서도, 사랑의 장난과 유희를 경쾌하게 그려냅니다.








cupid-large.jpg?format=jpg&mode=crop&width=412 Menacing Cupid by Etienne Maurice Falconet/ Art Renewal Center






특히 왼쪽에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비밀을 지키라는 듯한 큐피드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 Etienne Maurice Falconet, 1716-1791)의 < 위협하는 사랑 Menacing Love>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조각가로,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양식을 아우르는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가 제작한 큐피드는 이상화되었지만 장난기 넘치는 모습입니다. 비밀을 약속하는 듯하며, 동시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간의 모든 운명에 대한 자신의 힘을 인식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누구도 위협하지 않지만 침묵을 요구하는 그의 손가락에 무게가 실립니다.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 시대 결혼은 종종 가문 간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한 계약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랑은 그 와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었고요.







특히, 이 작품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요구했던 보다 진지한 예술과 대비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당시 퇴폐적이고 사치스러운 귀족 사회의 상징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공개 전시보다는 개인 후원자들의 사적인 공간에 맞게 제작되었던 작품입니다. 그 은밀한 주제와 시각적 유머는 당시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렇듯 <그네, The Swing>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기존 아카데미 중심의 역사화에서 벗어나 사적인 후원자들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은 로코코 시대의 두 화가 장 앙투안 바토( Jean-Antoine Watteau, 1684-1721)와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장 앙투안 바토( Jean-Antoine Watteau, 1684-1721)는 바로크 화가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자신의 감성을 더해 새로운 화풍을 창조했습니다. 이는 나중에 로코코 양식으로 발전했고요. 동료들로부터 '우아한 축제의 화가 '또는 '페트 갈랑트의 화가'로 칭송받았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바토는 색채와 움직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며 로코코 회화의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삶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면서도, 실제 병약했던 그의 삶과는 달리 그림 속에서는 행복해 보이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의 작품은 신화적이고 장식적인 주제를 통해 당대 프랑스의 미적 가치와 문화를 표현했습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고요. 그의 섬세하고 화려한 스타일은 미술사적으로 로코코 시대의 아름다움과 취향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그의 누드 및 신화적 주제 표현은 후대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요. 그의 작품을 통해 18세기 유럽이 받아들인 '프랑스적인 것'의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귀족 문화와 연관되어 한때 평가 절하되거나 외면받기도 했으나, 19세기 중반부터 미술사적으로 다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CK-J4f1Ifw






valenciennes-paris-1473783.png Valenciennes, France/stepmap







장-앙투안 바토( Jean-Antoine Watteau, 1684-1721)는 로코코 양식의 '페트 갈랑트( fetes galantes)'를 그린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684년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붕을 올리는 목수였고,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습니다. 몸이 병약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수 일을 할 수 없었고요.





1702년 18세 무렵 무일푼으로 파리에 도착하여 장식 미장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폰트 노트르담의 작업장에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전통의 인기 있는 장르 회화를 모사하는 일도 하고요. 20세 즈음 오페라 무대 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 클로드 질로( Claude Gillot, 1673-1722)를 만나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의 작업실에서 이탈리아 희극(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들을 접하게 되었고요. 이후 왕실 화가 클로드 오드랑 3세( Claude Audran III, 1658-1734)의 지도아래 궁정 장식 일을 맡게 되면서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뤽상부르 궁과 루브르 궁에 소장된 위대한 걸작들을 연구하며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세밀하고 섬세한 자연주의를 터득했습니다. 특히,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1709년과 1712년에 로마 대상을 위한 경연에 참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712년에 아카데미 준회원으로 받아들여졌고, 1717년에는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을 입회 작품으로 제출하며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아카데미는 '페트 갈랑트 fetes galantes'라는 새로운 회화 분야를 만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시골이나 자연에서 우아한 복장으로 노는 걸 말합니다. 로코코 시대의 귀족들과 상류 부르주아들이 잠시나마 피로함을 잊기 위해 만든 '이상화된 자연'을 말하고요. '가상현실'처럼 인위적이다 보니 우리가 종종 와토( Watteau)의 그림에서 느끼는 것은 허무와 쓸쓸함입니다.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는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소묘가, 판화가입니다. 그는 고전적인 주제의 전원적이고 관능적인 그림과 장식적인 알레고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당시 루이 15세의 집권 시기와 활동 기간이 일치합니다. 그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 작품들로 궁정과 귀족, 상층 부르주아뿐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프랑수아 부셰는 1703년 9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니콜라 부셰 역시 화가이자 레이스 디자이너였습니다. 17세 무렵 , 부셰는 역사화가 프랑수아 르무안느 ( Francois Lemoyne)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승의 권유로 1723년 아카데미의 로마상 ( Pric de Rome)을 수상하여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재정 문제로 인해 유학이 미뤄지게 되고, 생계를 위해 판화작업을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개척자인 앙투안 와토( Jeann-Antoine Watteau, 1684-1721)의 드로잉 연작 100개가 넘는 작품을 동판화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는 그의 양식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여성 인체에 대한 우아하고 균형 잡힌 묘사 능력은 이 과정에서 탄탄하게 다져지게 됩니다.





1727년부터 4년간 개인 비용으로 이탈리아에 머물렀습니다. 로마 외에 제노바, 페라라, 베네치아, 파르마, 볼로냐 등지에서 주로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도시 풍경을 사생하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이탈리아 유학 후 1731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그해 11월 24일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에 입회했습니다. 이듬해 1734년에는 <리날도와 아르미다 >( Ronaldo and Armida)를 입회 작품으로 제출하여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요.






그는 가볍고, 밝고, 호화롭고, 우아하고, 세련되며, 장식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부드러운 색채, 우아한 형태, 뛰어난 기교, 섬세한 세부 묘사가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납니다. 특히 로코코 미술에서 중요한 비대칭적인 균형을 통해 작품에 움직임과 생동감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핑크, 블루, 라벤더, 크림색 흰색 등 부드럽고 섬세한 파스텔 색조를 선호했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밝고 공기감 있는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신화, 목가적 풍경, 일상생활, 그리고 초상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초기에는 종교와 신화와 같은 주제의 그림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740년대 그의 전성기에는 특히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신화 그림들은 '사랑의 신화 '( mythologie galante)로 불렸는데, 메시지보다 화면의 감각적 아름다움, 특히 여성의 누드가 부각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젖가슴과 엉덩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만 붓을 잡는 화가
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화가
-드니 디드로-


부셰는 당대 루이 15세 왕실의 취향을 정확히 반영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습니다. 특히 계몽사상가이자 최초의 미술평론가 중 한 명인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1713-1784)는 부셰의 작품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www.wikiwand.com/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은 18세기 초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 스페인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벌인 대규모 국제 분쟁입니다. 약 13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스페인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유럽의 세력 균형을 뒤흔드는 대사건으로 유럽 전역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와 스페인 식민지에서도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위트레흐트 조약(1713)과 라슈타트 조약(1714)으로 종결되었고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원인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갈등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카를로스 2세는 어릴 적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것이 확실했습니다. 이로 인해 스페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아메리카 등 광대한 스페인 영토의 주도권 계승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했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을 주장한 주요 왕가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였습니다. 프랑스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훗날 필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의 유언에 따라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위 계승이 확실한 왕세자가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어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위협할 수 있었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매우 곤란한 선택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의 영토 확장과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측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이 국제적인 질서의 일부가 되는 데 기여했고요. 프랑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영국, 프로이센, 하노버 등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근대 유럽 국제 질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요. 또한 전쟁은 각국의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자원 동원과 군사비 지출은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요.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의 왕조를 합스부르크에서 부르봉으로 바꾸고, 유럽의 영토 지형을 재편하며, 향후 국제 관계에 "세력 균형"의 개념을 확립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The Portal at Valenciennes, 1709/wikimedia commons






장 앙투앙 바토( Jean-Antoine Watteau,1684-1721)의 < The Portal at Valenciennes>(1709) 작품입니다. 유화 작품으로, 현재 미국 뉴욕의 프릭 컬렉션( The Frick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 < The Portal of Valenciennes>는 1912년 추가된 것으로, 그림이 실제 바토의 고향인 발랑시엔의 특정 장소를 묘사한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해 보입니다. 다만, 이 작품은 바토의 군사 관련 그림 중 가장 기술적으로 뛰어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에 속하며, 알려진 유일한 경비 장면(guard scene)입니다.







그림은 황금빛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두 쌍의 병사들이 그림 공간을 가로질러 대화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전경의 세 인물은 잠들거나 몽상에 잠겨 있습니다. 작품은 약 6명가량의 병사들이 요새나 도시의 성벽과 유사한 오래된 돌 구조물 옆에 한가롭게 모여 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병사들은 삼각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은 채 소총을 들고 있으며, 때로는 행진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주로 전투 사이의 휴식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토는 전투 자체의 잔혹함보다는 병사들의 일상적인 활동, 예를 들어 잠자기, 몽상하기, 담배 피우기, 카드놀이, 대화하기 등을 강조합니다.







앙투앙 바토의 전형적인 '페트 갈랑트'작품과 달리 군사 생활의 한적한 순간을 묘사한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 당시 군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전투의 피로와 혼란 속에서 병사들이 겪는 망설임, 지루함, 혼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병사들은 전투 중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거나 야영지에서 식사하는 등 전장과 떨어진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토는 병사들의 내면 생활과 전쟁으로 인한 소외감을 보여주려 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Les Fatigues de la guerre,1713/ A Watteau Abecedario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장르 회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토 특유의 로코코 미학을 군사 주제에 접목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으로 중요합니다. 바토는 스케치북에 개별 병사들을 그린 후, 이 인물들을 완성된 그림에 삽입하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때때로 인물들 간의 단절감을 유발합니다. 비록 바토의 주요 주제는 아니었지만, 그의 다재다능함과 예술적 깊이를 보여주며, 전쟁의 피로 ( Les Fatigues de la guerre, 1713)와 같은 다른 군사 작품들과 함께 그의 인기를 높이는 데 한 몫한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NLbm7bxyo







breakfast-francois-boucher-1739.jpg The Breakfast by Francois Boucher, 1739/Artchive






프랑수아 부셰의 1739년작 <아침 식사 The Breakfast>는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8세기 프랑스 상류 부르주아 가족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 장르화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정확하게 반영하며, 밝고 가볍고 우아하면서도 호화스럽고 세련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 아침 식사 The Breakfast>는 파리 상류 부르주아 가정의 일상을 묘사한 장르화로, 화가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들, 그리고 유모가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가족은 당시 파리의 성공한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음료인 초콜릿을 배달시켜 마시는 중입니다. 화면 왼쪽에 서 있는 카페 배달원(garcon limonadier)은 뜨겁게 데운 초콜릿을 은제 주전자에 따라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프랑스 회화사뿐만 아니라 역사 면에서도 작은 혁명으로 평가됩니다. 부르주아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 중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을 동시에 등장시킨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까지 아이들은 종교나 신화를 다룬 주제에서만 그려졌으며, 어른들의 일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는 장면 자체가 '가족사의 전환기'였던 당시에 새로 등장한 유행을 보여줍니다.





800px-thumbnail.jpg 18th -century perfume-burner in the form of a magot/wikipedia






그림 속 배경에는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공예품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벽에 고정된 촛대, 시계, 벽난로 위의 거울 등은 당시 유행했던 장식 예술의 역사를 짐작하게 합니다. 식탁 위와 좌측 선반 위에는 당시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중국에서 넘어온 인형 (magot)이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로코코 시대를 전후하여 유럽에서 유행한 중국의 유물과 모티브를 활용한 쉬누아즈리( Chinoiseries) 양식의 한 예시로 보여줍니다.




프랑스어 'Chinois'(중국인, 중국풍)에서 유래한 용어로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미술 및 장식 양식입니다. 이 스타일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예술, 디자인,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유럽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변형하여 회화, 건축, 공예품, 정원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습니다. 실제 동양 문화를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유럽인들이 상상하고 이상화한 이국적인 동양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부셰는 수 백 점의 중국 유물 수집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이는 당시 중국에 대한 환상과 동양 유물에 대한 유럽 귀족들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그림 속 인물들 뒤에 있는 병풍 역시 중국 공예품의 유행을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입된 소품들로, 부셰는 이들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OKwC5YQeVY






The Truumph of Venus, 1740, Nationalmuseum, Stockholm Sweden/wikipedia






프랑스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의 <비너스의 승리 The Trumph of Venus> 작품입니다. 유화 작품이고 현재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루이 15세 치하에서 상대적인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졌던 시기입니다. 부르주아 계급과 귀족층의 사교적이고 낭만적인 생활양식이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고요. 로코코 미술은 왕실 예술보다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사교계 예술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거 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로 아늑함과 감미로움을 추구했습니다. 부셰는 그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들로 궁정과 귀족, 상류층 부르주아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부셰의 작품은 퐁파두르 부인과 같은 권력층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이 당시 프랑스 귀족의 취향을 반영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 역시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 아래 제작된 작품 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이 그림은 스웨덴 외교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칼 구스타프 테신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수집한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정난을 겪으면서 1749년에 자신의 컬렉션 일부를 스웨덴 국왕에게 팔았고, 이 작품도 스웨덴 왕실에 인수되어 결국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의 영구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구도 면에서는 물, 공기. 빛이 엮인 구성을 통해 인물들이 유동적인 요소들 속에서 떠다니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파스텔 색조와 섬세한 붓놀림, 정교한 세부 묘사는 꿈결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우아함과 관능미 또한 강조되고요. 물결치는 바다의 에메랄드 색은 스릴 넘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물결이 인물들의 창백하고 진주 같은 몸을 감싸고 있고요. 비너스의 매끄러운 피부, 생기 넘치는 표정, 그리고 거의 초자연적인 존재감은 그녀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작품에는 다양한 상징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너스가 앉아 있는 거대한 조개껍데기는 바다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그녀의 신화적 기원을 직접적으로 나타냅니다. 파도, 조개, 그리고 'S'자 형태의 흐르는 천들은 물의 유동성을 반영하며 비너스의 해양 기원과 초자연적인 본질을 더욱 강조합니다. <승리 Trimph>라는 제목은 사랑과 아름다움이 다른 모든 힘을 압도하는 승리를 의미하며, 이는 쾌락과 조화를 찬양하는 로코코 미술의 일반적인 주제입니다. (같은 주제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The Birth of Venus by Jean-Honore Fragonard, 1753-1755/wikipedia




The Birth of Venus by Sandro Botticelli,1485, Uffizi Gallery-Room 11-12/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slR9md_rWmM









The Embarkation for Cytnera, 1717, Louvre Version/wikipedia






이 작품은 앙투안 바토( Jean-Antoine Watteau, 1684-1721)가 1717년 파리 왕립 아카데미 ( Academie Royale de Peintyre et de Sculpture)에 제출한 입회 작품입니다. 당시 아카데미는 이 작품을 위해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낼 정도로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바토는 1718-19년 사이에 제작된 또 다른 버전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Schloss Charlottenburg)에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루브르 버전에 비해 더 큽니다.




1718-19, Berlin/wikipedia





<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이 제작된 1717년은 루이 14세의 엄격한 통치가 끝나고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는 로코코 시대로 전환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상류 사회는 화려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겼으며, 바토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귀족들이 한적한 자연 속에서 사랑과 낭만을 나누는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바토가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 입회를 위해 제출한 수용 작품 ( reception piece)이었고요. 그 독창성 때문에 '페트 갈랑트'라는 독자적인 장르가 신설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페트 갈랑트, fete falante'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귀족 남녀가 목가적인 숲이나 정원 같은 이상적인 공간에서 로맨스를 즐기는 모습을 표현하는 장르입니다.




detail/Artnet News



detail/Artchive






이 그림은 몽환적이고 이상화된 풍경 속에 세련된 옷차림의 여러 인물 그룹을 배치하여 유연하고 역동적인 화면 구성을 이룹니다. 부드럽고 은은한 파스텔 톤이 주를 이루며,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조화로 낭만적이고 우아한 분위기가 강하게 전달됩니다. 나무 사이로 흩어지는 빛, 정교한 의상 묘사 드로잉이 특징적이고요. 하늘과 인물들 사이에 떠다니는 큐피드(사랑의 요정)들이 사랑과 욕망의 테마를 강조합니다.





오른쪽에는 상반신 누드에 꽃으로 장식된 아프로디테(비너스) 조각상이 자리해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화를 상징합니다. 교통수단으로 왼쪽에는 빨간 장막으로 꾸며진 황금색 곤돌라가 보입니다. 이 작품의 중심 주제는 사랑의 이상향으로 상징되는 키테라 섬을 향한 사랑과 행복의 여정입니다. 키테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하거나 머무는 장소로 전해지며, 사랑과 아름다움, 이상적 행복을 나타냅니다.







그림 속 커플들은 종종 사랑과 행복의 순간이 얼마나 덧없고 일시적인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됩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사랑의 여러 단계를 보여주는데, 첫 만남부터 점차 깊어져 가는 애정을 표현합니다. 작품 제목과 달리 관람하는 이들 사이에선 이들이 키테라로 향하는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는지에 관해 해석이 갈립니다. 많은 시각에서는 사랑을 이룬 뒤 섬을 떠나는 모습으로 보며, 이는 사랑과 기쁨의 무상함과 씁쓸함을 암시합니다. 바토는 이러한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남겨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었습니다. 큐피드들이 연인들을 밀착시키고 유도하는 모습은 장면 전체에 걸친 사랑과 욕망이라는 주제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ZlH2JswO3Q







Diana Resting after her bath, 1742/wikipedia





나를 흥분시킨 최초의 그림
첫사랑처럼 평생 사랑해 온 작품
여성의 몸을 가장 잘 이해 한 사람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의 < Diana Resting after her Bath>(1742)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부셰의 우아함과 섬세한 예술적 특징이 돋보입니다.





이 그림은 로마 신화의 여신 다이아나를 누드 형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목욕 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고요. 그녀는 순결과 사냥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몸인 채 길가에 앉아 있고, 역시 알몸인 님프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모습니다. 다이아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요소들도 함께 표현됩니다. 그녀는 초승달 모양의 보석이 달린 황금색 장식이나 진주 왕관을 쓰고 있어 사냥의 여신이자 달을 관장하는 여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치에는 활과 화살통, 그리고 최근 사냥한 동물들이 놓여 있어 다이아나의 사냥 여신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사냥으로 잡힌 동물 중에는 사랑의 상징인 비둘기 두 마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종종 비너스의 속성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림 왼쪽에는 두 마리의 사냥개가 있는데, 한 마리는 여신이 방금 나온 연못에서 물을 마시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다이아나가 앉아 있는 실크 원단은 사치스러움을 상징하며 시골 배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이애나와 악타이온, 1556-1559, 티치아노/Sicilia in Rete





전통적으로 다이아나의 목욕 장면은 사냥꾼 악타이온이 여신을 훔쳐보고 벌을 받는 신화적 에피소드와 연관되지만, 부셰의 그림에서는 악타이온이나 다른 남성적 형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화가가 관음증적 요소를 생략하고, 대신 순수하고 고요한 여성 누드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관람자가 신화 속 이상화된 세계를 엿보는 듯한 시선을 유도하지만, 동시에 다이아나와 님프의 무구하고 초연한 모습은 세속적인 세계와는 다른 순수한 세계를 느끼게 합니다.






이 작품은 1742년 살롱( Salon)에 전시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살롱은 1667년부터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식 프랑스 연례 미술 전시회였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부셰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 부셰는 그의 아내를 디아나의 모델로 사용했고, 그림 속 풍경은 부셰의 보베이 ( Beauvais) 지역 시골집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제목의 르누아르 작품도 감상해 보시죠.)




800px-Pierre-Auguste_Renoir_020.jpg Diana by Pierre-Auguste Renoir,1867,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18세기 초, 루이 14세 사후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고, 동양 문화의 영향과 프랑스 사회, 문화적 변화가 로코코 미술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상류층의 권력이 약화되고 중산층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문화 활동의 중심이 궁궐에서 도시의 상류층으로 이동하면서 로코코 미술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Portrait of Madame de Pompadour,1756/Arthive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Portrait de madame de Pompadour>(1756)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는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영향력 있는 예술 후원자였던 마담 드 퐁파두르( Jeanne-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를 그렸습니다. 작품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퐁파두르 부인을 그린 7 연작 초상화 시리즈 중 일부로, 그녀의 우아함과 지적인 면모를 강조합니다.







작품의 구도는 마담 퐁파두르를 중앙에 배치하여 그녀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변 소품들을 통해 인물의 지성과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고요. 그녀는 읽던 책을 손에 들고 온화한 눈길로 화면 저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기대어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요. 배경의 깊은 색조의 푸르스름한 어둠은 그녀의 화사함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부셰는 옷감의 실크 질감을 회색 밑칠 위에 얇은 핑크 워시로 표현하여 은빛을 띠게 만들었습니다. 옷의 섬세한 레이스, 리본 디테일, 그리고 옷주름의 표현이 뛰어나 그녀의 귀족적 위엄을 강조합니다.






작품 속에는 마담 드 퐁파두르의 지적 추구와 사회적 역할, 그리고 왕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발치에는 드로잉과 판화 도구가 떨어져 있으며 , 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 문학에 대한 열정과 고상함을 나타냅니다. 또한 악보, 건축 도면 등도 그녀의 예술적 소양과 후원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jjddRkKjY





마담 드 퐁파두르 (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는 1721년 파리 은행가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양을 쌓았습니다. 그녀는 1745년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고, 궁정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국정을 통치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의 애정 관계가 약화되기 시작한 1750년경부터 왕을 즐겁게 하는 애국적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예술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미술사학자들이 로코코 예술의 '대모'라고 부를 정도로 로코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부셰를 포함한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주요 후원자로서 로코코 양식의 창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부셰는 퐁파두르 부인과의 파리 출신 배경을 공유하고, 오페라와 최신 유행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궁정에서 고립감을 느끼던 그녀에게 큰 자산이 되었고요. 퐁파두르 부인은 왕과의 낭만적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후에도 자신의 궁정 내 불안정한 위치를 인식하고 자신감과 충성심을 보여주며 왕의 측근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부셰에게 1750년부터 1759년 사이에 11점 이상의 초상화를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특히 부셰가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매력적으로 이상화하여 표현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퐁파두르 부인과 왕의 우정을 기념하며, 그녀의 미모, 패션, 지적, 영적인 자질, 충성심을 강조하는 도상학을 통해 루이 15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Pompadour at Her Toilette,1750/ Harvard Art Museums , Cambridge, MA




https://www.youtube.com/watch?v=lnJRkY0mZh4











The Italian Comedians, 1720 /National Gallery of Art





장 앙투안 바토( Jean-Antoine Watteau)의 <이탈리아 희극 배우들 The Italian Comedians>(1720)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720년경 런던에서 바토가 의사 리처드 미드 ( Dr. Richard Mead)를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토는 결핵으로 그에게 진찰받고 있었으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미드 박사의 소장품에 있었다는 사실은 바론( Baron)의 판화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즉흥 연극 형태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배우들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흰 옷을 입은 팬터마임 캐릭터인 피에로( Pierrot)가 서 있습니다. 그는 순수함과 순진함을 상징하지요. 피에로는 약간 미소 짓고 있으며, 눈빛이 초점이 없어 그의 표정을 읽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는 머리에 짚으로 된 모자를 쓰고 주름진 깃을 두른 흰색의 헐렁한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피에로 옆에는 화려한 녹색-금색 정장을 입은 브리겔라( Brighella)가 서 있고, 기타를 치는 메제탕( Mezzeti), 검은 마스크를 쓴 할리퀸( Harlequin), 그리고 검은 벨벳 의상을 입은 스카라무슈( Scaramouche)와 같은 다른 코메디아 델라르테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림에는 푸른색 망토를 두른 육중한 젊은 남성, 피에로 옆에 서서 어깨를 잡고 있는 젊은 여배우(플라미니아 또는 실비아),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 의사 발로아르도( Dr. Baloardo) , 그리고 왼쪽에 광대 복장을 한 어릿광대와 두 명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막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박수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피에로 발치에 흩뿌려진 꽃들은 공연의 성공을 나타냅니다.








바토의 붓놀림은 유려하고 부드러움이 특징입니다. 그는 종종 인물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푸마토( Sfumato)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이탈리아 희극 배우들>에서 공간 배열은 신중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토는 풍부하고 분위기 있는 배경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깊이감을 만들어내며, 이는 서사를 강화하고 관람객이 장면에 몰입하도록 합니다. 그의 구도와 색상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로코코 스타일을 정의하는 데 중요했으며, 현실주의 와 환상을 융합하는 그의 능력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선례를 남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STQGrvGAw








The Scale of Love/National Gallery, London





장 앙투안 바토( Jean- Antoine Watteau, 1684-1721)의 <사랑의 척도 The Scale of Love>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토가 1717년에서 1718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The Scale of Love 'La Gamme d'Amour'>라는 제목은 그의 사망 후 몇 년 뒤에 제작된 판화에서 유래했습니다. 1912년 줄리어스 워너 경( Sir Julius Wernher, Bt)에 의해 런던 국립미술관( The National Gallery)에 소장되고요.






그림 상단에는 헤르메스(?)조각상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조각상은 피타고라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파티고라스는 수학적 비율에 기반한 음계를 발견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요. 피타고라스에 대한 언급은 ,<사랑의 척도>라는 작품 제목과 연관될 수도 있습니다 . 이 제목은 음악적 음계, 유혹과 구애의 다양한 단계, 또는 이들을 촉진하는 음악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커플이 땅에 앉아 있고, 세 번째 커플 사이에는 아이가 보이네요. 이 여성은 나중에 남성 동반자와 함께 떠나는 여성일 수 도 있습니다. 아이가 그들의 관계의 결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바토의 유사한 그림의 판화에 추가된 시구에서 암시됩니다. 이 시구에서는 그림 속 아이들을 '부드러운 사랑의 열매'로 지칭합니다. 기타리스트는 환상적인 의상을 입고 있지만, 그의 기타는 1650년부터 1730년까지 파리의 보봄( Voboam) 가문 악기 제작단들이 만든 유형을 정확하게 나타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E8gP_kLd0w&t=46s






https://www.youtube.com/watch?v=Lm0SHLpedh0










Pan and Syrinx by Francois Boucher,1743/wikimedia commons









프랑스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1770)의 <판과 시링크스 Pan and Syrinx>(1743) 작품입니다. 유화작품이고, 현재 개인 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판과 시링크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목신 판(Pan)과 님프 시링크스(Syrinx)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입니다. 이 신화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 Ovid)의 <변신 이야기 Metamorphoses>(689-70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판은 제우스와 님프의 아들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 부모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는 염소와 닮은 모습으로 태어나 머리에 작은 뿔이 있고, 수염과 털, 발굽이 달린 산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판은 목동과 가축의 신으로 아르카디아 지방에서 유래했으며, 점차 그리스 전역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변덕스럽고 화를 잘 내며, 잠든 사람에게 악몽을 불어넣고 나그네에게 공포를 주기도 하는 인물입니다. 판은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으며, 늘 '시링크스'라는 이름의 팬파이프를 가지고 다니며 춤과 음악을 즐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시링크스( Syrinx)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아름다운 숲의 님프로, 사냥옷을 입은 모습이 아르테미스 못지않게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판은 어느 날 숲 속에서 시링크스를 만나 첫눈에 반해 유혹하려 했지만, 시링크스는 그의 추격을 피해 라돈 강까지 달아났습니다. 강물에 막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시링크스는 친구인 물의 님프들에게 구원을 청했고, 그녀의 목을 휘감으려는 판의 팔이 닿는 순간 한 묶음의 갈대로 변해 버렸습니다. 판이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자 갈대에서는 구슬픈 소리가 울려 나왔고, 이에 매료된 판은 시링크스가 변한 갈대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시링크스'라는 이름을 붙여 늘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이 일화는 팬파이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작품의 구도는 판과 시링크스의 역동적인 만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면 전경에는 시링크스가 부셰 특유의 부드러움과 빛나는 광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흐르는 옷 주름은 그녀의 연약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더 강조하고요. 그녀의 표정은 놀라움과 약간의 불안감을 나타내어 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판은 강렬한 존재감으로 묘사되어 열정과 좌절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시링크스 옆에는 두 명의 형상이 보이는데, 이는 작은 신 또는 영혼들로 걱정과 호기심을 담은 표정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무성하고 푸른 풍경으로, 신비롭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인물 주변의 나뭇잎들은 풍부하게 묘사되어 깊이감과 함께 은밀하고 자연적인 공간감을 더합니다. 나뭇잎의 생생한 초록색부터 인물의 부드러운 살색, 그리고 시링크스 옷의 인상적인 붉은색까지 다채로운 색상이 조화롭게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여성 인물의 피부는 어두운 배경과 대조를 이루며 빛나는 듯 표현되어 관능미를 더합니다. 인물들의 배열과 옷의 흐르는 듯한 선들은 시선을 부드럽게 유도하여 순간의 감정적 강렬함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부셰는 말년에 예술적 명성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때로는 자신의 그림을 성의 없이 테피스트리로 옮겨 작업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한 디드로( Diderot)를 비롯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너무 장식적이며 즐거움만을 추구한다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신고전주의가 출현하면서 그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로코코 시대의 미적 감각과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세심한 기법과 우아한 디자인은 후대 에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요.(같은 주제의 루벤스 작품도 실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_tZs8eHUcc



pan-and-syrinx.jpg Pan and Syrinx by Peter Paul Rubens, 1617-1619/Peter Paul Rubens






https://www.youtube.com/watch?v=C_REbSgGV9E




Maps-Americas.jpg





잃어버린 걸작이 10년 전 영국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 매우 반가운 놀라움이었다.
- 게티 미술관-




La Surprise, 1718/wikipedia






앙투앙 바토의 < La Surprise>(1718-1719) 작품입니다. 현재 이 작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J. 폴 게티 미술관(J. Paul Getty 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로코코 양식으로 주요 특징인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장르에 속하며, 바토가 창안한 우아한 연회 또는 사랑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 작품의 구도는 기타를 든 남성(메제탱 복장)을 중심으로 연인들의 은밀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옆에는 작은 개가 자리하여 그림의 무게감과 균형을 잡아주며 삼각형 구도를 형성합니다. 개는 연인들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안정감을 부여하고 , 사랑의 증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작품은 바토의 친구이자 켈렉터였던 니콜라 에낭( Nicolas Henin)이 소유했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의 상속인에 의해 쌍둥이 작품인 <The Perfect Accord >(현재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와 함께 판매되었고, 두 작품 모두 판화로 출판되었습니다. 이후 < La Surprise>는 1770년부터 1848년까지, 그리고 1848년부터 2007년까지 두 번에 걸쳐 사라졌다가 2008년 3월, 영국의 한 시골 저택에서 전문가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848년부터 해당 가족의 소장품이었으나, 가족 구성원들은 그 중요성과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2008년 7월 8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1,500만 유로 (약 2,500만 달러)에 판매되었으며, 현재 J. 폴 게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The Perfect Accord, 1719, Los Angeles Country Museum of Art ,Los Angeles/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B9UReONp0pw








The Shop sign of Gersaint, 1720-1721, Charlottenburg Palace, Berlin/wikipedia






앙투안 바토의 <제르생 화랑의 간판 The Shop Sign of Gersaint 또는 L'Enseigne de Gersaint>(1720-21>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로코코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친구인 미술상 제르생의 골동품 상점 입구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습니다. 가로 306cm, 세로 163cm의 크기로, 현재 독일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바토의 마지막 작품으로 죽기 직전 8일 만에 완성한 그림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유행이 지난 17세기 양식의 작품들을 창고로 보내는 장면을 통해 루이 14세 시대의 절대 왕정이 저물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르생의 상점 간판>은 18세기 파리의 활기 넘치는 미술 상점 내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 제르생의 좁은 상점의 크기를 과장하여 , 마치 상점의 벽이 사라진 듯한 착시 효과를 주어 관람자가 직접 상점 안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상점의 출입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주요 공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쪽 부분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예술 작품을 다루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 남자는 그림을 조심스럽게 포장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루이 14세의 초상화로 해석됩니다. 이는 구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섭정 시기)의 도래를 상징합니다. 다른 인물들은 명상에 잠긴 듯 그림을 관찰하거나 작품을 옮기고 있습니다. 상류층 고객들이 선호하는 호화로운 그림들은 당시 부유한 예술 애호가나 수집가들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The Central couple watch the boxing up of Louis XIV/wikipedia




오른쪽 부분에서는 상점 내의 예술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어집니다. 이곳의 인물들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로코코 양식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을 빛에 비춰보는 등의 행동을 보입니다. 중앙 인물은 등을 돌린 채 묘사되어 상점 내 일상적인 거래의 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인물들은 당시 유행하는 의상을 착용하고 있으며, 그들의 세련된 복장은 사회적 지위와 후원의 품격을 드러냅니다. 특히,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누드 그림을 열정적으로 감상하는 장면은 18세기 상류층의 은밀한 욕망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른쪽 귀퉁이 상점 안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강아지는 활기찬 인간 활동과 대비되어 장면에 평온함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작품 전체는 18세기 예술 문화와 사회적 교류, 그리고 당시 예술 시장의 패션을 우아하게 담아내어 귀중한 역사적 문서이자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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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는 빛과 색채의 효과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작품에 생동감과 깊이를 부여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실크 드레스와 레이스의 섬세한 질감은 빛에 의해 부드럽게 빛나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어두운 실내 공간과 옷감의 화려한 색상이 만들어내는 극명한 대비는 인물들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바토는 인물들을 리드미컬하고 무용적인 움직임으로 배치하여 전체적인 구성에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는 관람자가 그림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리도록 유도하며,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자세와 즉흥적인 순간의 포착은 바토의 경쾌하고 빠른 붓질의 결과입니다. 바토는 전통적인 역사화나 종교화와 달리, 일상적인 장르화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으며, 그의 작품은 그림 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적 현실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800px-Antoine_Watteau_050.jpg Detail (possibly Claude Glucq and Mme Gersaint)











https://www.youtube.com/watch?v=bHejnXWnBHk




https://www.youtube.com/watch?v=DxcIJgCDajE




https://www.youtube.com/watch?v=L0r51IM1E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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