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taOs8wjLb8U
음악을 듣는 사이 작가님들은 피렌체에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The Marzocco now in Piazza della Signoria, a replica of Donatello's/wikipedia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마르초코(Marzocco)는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의 유명한 사자 조각상의 복제품입니다. 앞발에 피렌체의 상징인 백합꽃무늬( il giglio, Fleur-de-lis) 문장을 들고 있는 사자상입니다. 피렌체의 용기, 위엄, 고귀함을 상징하지요.
Piazza Signoria/WordPress.com
마르초코는 자유로운 피렌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강력한 상징 역할을 하는 헤럴드 사자입니다. <마르초코 Marzocco>라는 용어는 이전에 피렌체의 상징이었던 전쟁의 로마 신 마르스를 지칭하는 "마르토쿠스" 또는 "작은 마르스"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집니다. 사자는 중세 시대에 피렌체( Fiorenza)의 전쟁 승리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Marzocco by Donatello/Alamy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는 1418년에서 1420년 사이에 마르초코( Marzocco)를 조각했습니다. 그는 토스카나 지방의 회색 사암인 "피에트라 세레나 Pietra Serena"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석재는 반짝이는 미세한 회색 모래 알갱이가 표면에서 쉽게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마치 노출 콘크리트와 유사한 회색 속살 느낌을 주지만, 채도가 높아 맑은 인상을 주는 석재입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 중 이 석재에 매료되어 전 세계 애플 매장에 납품되게 된 일화도 있지요.
"길리오 Giglio"라고 알려진 흰색 바탕에 붉은 백합이 있는 피렌체 문장을 자랑스럽게 받치고 있습니다. 피렌체는 백합을 도시의 꽃으로 정했습니다. 많은 명문 가문의 문장과 휘장에 백합 문양이 사용되었지요. 이 백합 문양은 11세기부터 피렌체와 깊은 연관을 맺어왔습니다. 강력한 메디치 가문의 후원과 영향력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지요.
피렌체 휘장/나무위키
메디치가문 /나무위키
도나텔로의 마르초코( Marzocco)는 원래 피렌체 공화국이 교황 마르티노 5세(Pope Martino V)의 거처 앞에 세워졌던 수호상이었습니다. 당시 전염병으로 인해 로마로 바로 입성하지 못하고 1년 이상 피렌체에 머물렀던 시기에 산타 마리아 성당 내 세워진 사자상이었습니다.
1812년에 도나텔로의 마르초코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옮겨졌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원래의 중세 사자는 그 당시 도나텔로의 조각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을 위해 원래 도나텔로의 조각상은 1855년에 바르젤로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자리에 복제품이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서 있습니다.
오늘은 피렌체 거리를 수없이 누비고 다녔을 스승 로렌초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1378-1455)와 제자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의 작품을 살펴볼까 합니다.
로렌초 기베르티(Rorenzo Ghiberti, 1378-1455)와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가 활동했던 시기는 14세기말부터 15세기 중엽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 피렌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서 전례 없는 번영과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기베르티( 1378-1455)와 도나텔로(1386-1466)가 활동하던 시기 피렌체는 공식적으로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시민들의 자치 의식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은 시뇨리아( Signoria)라는 시의회를 통해 통치되었고, 주요 공직은 짧은 임기로 운영되어 권력 집중을 견제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말부터 실제 정치권력은 몇몇 부유한 귀족 가문들과 상공업 길드, 특히 은행가 길드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의 길드 ( Arti)는 단순한 동업자 조합을 넘어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4-15세기 피렌체의 공식적인 정치와 경제는 모직상 길드, 면직 공업자 길드, 은행가 길드 등 주요 길드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들 길드는 회원의 상업 활동을 규제하고 보호하며 , 상품의 품질을 보전하고 가격을 안정시키는 등 지역 경제를 독점적으로 통제했습니다. 상인 길드는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시민들로 구성되었고, 많은 도시가 자치 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길드가 시 의회를 지배하며 모든 경제 활동을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길드는 자체적인 규칙과 깃발을 가졌고, 회원들은 서로 돕고 직업과 도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종교적 신앙 공동체의 성격도 띠었습니다.
Thr back of an Italian florin coin/wikipedia
Florin from the Sroda treasure/wikipedia
특히, 은행업은 피렌체의 경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252년에 자체 발행된 금화 플로린( Florin)은 안정적인 가치와 신뢰도를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널리 통용되는 국제 통화가 되었습니다. 이는 피렌체 은행가들이 유럽 전역의 경제 발전에 자금을 대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전쟁(1337-1453) 동안 잉글랜드 왕과 교황청에 자본을 제공하며 국제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는 도시의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환전업으로 시작하여 은행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그는 그들이 예술 후원자가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직물 교역과 은행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피렌체 사회에 등장했습니다. 특히 조반니 디 비치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가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며 유럽 전역에 지점을 확장하여 금융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재산을 기반으로 1434년에 알비치 가문을 축출하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코시모는 공식적인 관직에 많이 오르지 않고 뒤에서 도시의 주요 결정을 좌우하는 '무관의 제왕'으로 불렸습니다.
메디치가계도/Reddit
메디치 가문은 '대중과 함께 즐긴다'는 정신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행동하며 민심을 얻고,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로렌초 데 메디치 ( 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20세의 나이로 1469년부터 피렌체를 지배하며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평화로웠다고 평가되고요. 메디치 가문의 권력 장악은 피렌체 내 다른 유력 가문들과의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치옴피 반란( Ciompi Revolt, 1378-1382)으로 불리는 노동자들의 봉기 같은 시민 반란도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때로 예술 후원을 통해 도시의 통합과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에서는 고전 문헌을 연구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를 지향하는 인문주의가 번성했습니다. 이러한 사조는 시민 계급의 세계관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인간의 삶과 가치를 중시하는 예술 작품들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시대의 예술과 사상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피렌체로 유입되면서 고대 학문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예술 역시 중세 미술의 정형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점차 자연주의적이고 인간의 감정에 중점을 둔 특징을 보였습니다.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와 같은 예술가들은 작품에 서명을 넣기 시작하며 예술가의 개인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러한 예술 발전은 두오모 공방 ( Opere di Santa Maria del Fiore)과 상공업 길드 같은 주요 예술 기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Cath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Reddit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의 건축과 장식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기베르티(1378-1455)와 도나텔로(1386-1466) 모두 이 공방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기베르티는 1425년 두오모의 동쪽 문에 대한 두 번째 의뢰를 받아 구약성서의 장면들을 묘사한 '천국의 문'을 완성했습니다. 이는 원근법과 이상화된 표현을 통해 자연주의를 추구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대표적인 기념물로 평가됩니다.
길드들은 단순한 경제 조직을 넘어 예술 후원의 중요한 주체였습니다. 예를 들어, 산 조반니 세례당은 포목상 길드가 운영을 책임졌고, 피렌체 대성당은 모직업 길드가, 오르산미켈레 성당은 비단 상인 길드와 금속 세공 길드가 건축 및 조각 제작을 주도했습니다. 오르산미켈레 성당 외벽의 14개 감실에 안치된 성인상들은 각 길드의 수호성인으로 . 기베르티의 <세례요한>, 도나텔로의 < St. George>등이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어 길드들의 사회적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길드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과시하고, 예술적 경쟁을 통해 조각기법과 표현의 혁신을 촉진했습니다. 기베르티와 도나텔로는 이러한 피렌체의 정치 경제 문화적 환경 속에서 르네상스 초기 조각의 선구자로서 활약했습니다.
매일경제
먼저, 두 조각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봅니다.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 1378-1455)와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는 피렌체 출신으로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들입니다. 도나텔로는 1404년에서 1407년 사이에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며 금속 세공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 시기에 도나텔로는 청동 주조의 밀랍 및 점토 모델링 기법을 익혔습니다. 두 예술가 모두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피렌체에서 주로 활동했고요. 기베르티는 피렌체 세례당의 문 제작에 평생을 바쳤고, 도나텔로 역시 피렌체 대성당, 오르산미켈레 성당 등에서 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사상을 작품에 구현하며 예술의 패러다임 변화에 기여했습니다. 두 예술가는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도나텔로는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 조각을 연구했고, 이는 그의 작품 경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조각가 모두 청동을 주요 재료료 사용했습니다. 특히 기베르티는 사라졌던 주물 기술인 잃어버린 밀랍 주조법( lost-wax casting)을 부활시켜 그의 작업실을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나텔로 역시 대리석, 청동 등 다양한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었습니다.
기베르티(1378-1455)는 주로 종교적 주제, 특히 구약과 신약 성경의 이야기를 세례당 문과 같은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서 묘사했습니다. 그는 섬세하고 우아한 곡선과 장식적인 표현으로 국제 고딕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도나텔로(1386-1466)는 종교적 주제 외에도 고대 신화 속 영웅 다비드나 실제 인물인 가타멜라타 장군 등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상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생명감 넘치는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인체의 움직임을 면밀히 연구하여 완벽한 신체를 표현하고자 했고요, 그의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기베르티(1378-1455)는 그의 주요 작품인 세례당 문이 건축물의 일부로서 기능을 가졌으며 건축적 배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인물들을 배치했습니다. 도나텔로(1386-1466)는 고대 이후 처음으로 독립적인 누드 조각상을 제작하는 등 건축물로부터 독립된 조각의 가능성을 실험했습니다.
기베르티(1378-1455)는 성공적인 사업가로서 플로렌스 사회에서 부유하고 저명한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 외에도 여러 길드와 교황으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으며 자신의 작업실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훈련시켰습니다. 도나텔로(1386-1466)는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으며,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cici, 1434-1464)와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 묻힐 정도로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기베르티(1378-1455)는 자신의 저서 <코멘타리오 Commentarii>에서 " 이 작품에서 나는 비례와 원근법 모두에서 가능한 한 자연을 밀접하게 모방하려 했다. "라고 언급하며 원근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도나텔로(1386-1466)는 릴리에보 스키아치아토(rilievo schiacciato, 평평한 부조) 기법을 발명하여 낮은 부조에서도 깊은 공간감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회화의 원근법을 부조에 적용한 혁신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원근법의 발전은 당시 화가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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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Doors, 1401-1424, Guilded Bronze, 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wikipeida
로렌초 기베르트(Lorenzo Ghiberti,1378-1455)의 북문(Notrh Doors) 작품입니다. 1401년에서 1424년 사이에 제작되었고요. 피사노와 동일한 콰트레포일(네잎 클로버 모양) 형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7열로 배열된 28개의 콰트레포일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 문은 기베르티의 첫 번째 걸작으로 평가되며, 이후 제작된 유명한 "천국의 문"보다 앞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문은 원래 동쪽 출입구에 설치되었으나, "천국의 문"이 완성된 후 북쪽으로 옮겨졌습니다. 문은 아래에서부터 교회 박사들, 복음서 저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 이야기가 묘사된 패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북문은 또한 '십자가의 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North doors Panels:19. Resurrection by Lorenzo Ghiberti/ www.wga.hu
1401년 피렌체 세례당의 두 번째 청동문 제작 경쟁은 기베르티(1378-1455)와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결승에 올라 예술적 재능을 겨루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베르티는 21세의 나이로 이 경쟁에서 우승했으며, 그의 작품은 청동 주조 기법과 효율성 면에서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브르넬레스키의 패널이 7개의 부분으로 주조되어 붙여진 반면, 기베르티는 이삭을 제외한 모든 인물을 한 덩어리로 주조하고 인물 내부를 속이 빈 형태로 제작하여 더 튼튼하고 가벼우며 비용을 절감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당시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과 표현을 탐구하도록 자극했습니다.
기베르트(좌) VS 브르넬리스키(우), 이사악의 희생/ 매일경제
이 작업은 도면 및 모델 제작부터 28개 청동 패널과 문설주의 주조, 조각, 도금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이었습니다. 기베르티와 그의 공방은 약 20년 만에 이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북문은 20개의 그리스도 생애 장면과 8개의 하단 패널에 4명의 복음서 저자들(성 요한, 성 마태, 성 루카, 성 마르코)과 교회 박사들(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그레고리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각 패널은 콰트레포일(네 잎 클로버 모양) 형태로, 몰딩은 과일, 동물, 식물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 교차점에는 예언자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Saint Mark/wikipeida
North Gate( Called Gate of the Cross,in the North), St. Jerome/www. wga.hu
기베르티는 대규모 공방의 도움을 받아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그의 공방에는 루카 델라 로비아(1399-1481,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조각가), 미켈로초(1396-1472, 건축가), 베노초 고촐리(1420-1497, 화가), 파올로 우첼로(1397-1475,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5-1488, 화가), 그리고 기베르티의 아들들인 비토리오(1418-1496)와 토마소 등 뛰어난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공방과의 협업은 기베르티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기베르티는 1425년 북문 완성 직후, 초청을 받아 동쪽 문을 위한 두 번째 의뢰를 받았습니다. 이 두 번째 문은 후에 "천국의 문"으로 알려지게 되지요.
북문은 1401년의 공모전과 함께 초기 르네상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북문의 서사적 패널들은 역동적인 서사 개념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고요. 14세기 안드레아 피사노(1290-1348,이탈리아 조각가)가 확립한 코트레포일(네 잎 클로버) 형식 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베르티의 뛰어난 디자인과 주조 기술은 피사노의 평면적이고 정적인 디자인을 능가하는 차원과 역동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북문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기베르티를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오염, 기물 파손, 과도한 광택 작업 및 외부 노출로 인해 북문의 패널은 두꺼운 검은 덩어리로 덮여 있었고, 도금된 부분이 손상되었습니다. 1980년, 피렌체의 복원 연구소 전문가들은 "천국의 문" 복원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북문의 복원 기간은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현재 북문은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 파사드의 원래 자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lb415xOjKg
Bargello Museum/Firenze Made in Tuscany
바르젤로 박물관(Bargello national Museum) 내부 모습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에 자리 잡고 있고요. 이 박물관은 1865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첫 국립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으며, 중세 및 르네상스 예술품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르젤로 건물은 1255년에 피렌체 최초의 공공건물로 세워졌습니다. 초기에는 피렌체 시의 최고 치안관인 포데스타의 자리였으며, 이후 1500년대 중반부터는 도시 경찰청장인 "바르젤로"의 본거지이자 수세기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1858년에서 1865년 사이에 원래 형태로 복원된 후 국립 박물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도나텔로 , 미켈란젤로 등 피렌체 시대의 다른 거장들의 작품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박물관은 피렌체에 있는 네 개의 작은 박물관인 메디치 예배당, 오르산미켈레, 팔라초 다반자티, 카사 마르텔리를 포함하는 바르젤로 박물관 그룹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nfzqtxNnT8
Saint George by Donatello, 1415-1417, Bargello Museum, Florence/wikipedia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의 <Saint George>(1415-1417) 대리석 조각상입니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 운동에 속하고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바르젤로 박물관( Bargello National Museum )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피렌체 길드 중 갑옷 및 검 제작자 길드인 '아르테 데이 코라차이 에 스파다이 Arte dei Corazzai e Spadai)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원래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벽을 장식하는 14개의 조각상 중 하나였습니다.
15세기 피렌체는 예술가들에게 유리한 환경이었습니다. 교회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강력한 무역 길드들이 대규모 건물과 공공 예술 작품에 자금을 대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오르산미켈레 건물은 피렌체의 무역 길드들이 사용하던 곳으로, 1499년 시에서 길드들에게 각자의 수호성인 조각상을 의뢰하여 교회의 외벽에 있는 14개의 벽감에 채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길드들은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들을 불러들였으며, 도나텔로 또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도나텔로는 중견 조각가였으나 기베르티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고, 부유한 길드들의 비싼 청동 조각상 의뢰는 기베르티에게 돌아갔습니다. 도나텔로는 갑옷 및 검 제작자 길드와 같은 '중소 길드'로부터 더 저렴한 대리석 조각상 의뢰를 받았습니다.
도나텔로의 <Saint George>는 젊고 용감하며 단호하고 강인한 갑옷을 입은 남자로 조각되었습니다. 성인은 방패를 앞에 두고 굳건히 서 있고요. 원래는 오른손에 청동 검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튜닉은 어깨 위로 넘어가 있고, 갑옷을 입은 모습은 의뢰 길드의 홍보 역할을 했습니다. 머리에는 뚫린 구멍이 있어 원래 헬멧을 착용했음을 시사합니다. 허리 부분의 손은 검을 잡도록 디자인된 것으로 보이고요.
조각상의 눈은 위를 향하고 있으며, 용을 공격하기 전의 불안감과 감정적인 표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눈썹은 찡그러져 있고 이마에는 주름이 있습니다. 클래식한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서 있고요. 그의 오른발은 방패와 같은 각도로 틀어져 있지만, 무게는 양다리에 실려 있습니다. 그의 전체적인 모습은 내적인 집중력과 신체적인 힘을 모두 강조하며, 다양한 방향에서 오는 적들과 맞설 준비가 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조각상 아래에는 용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한 돌 부조가 있습니다. 이 부조는 '스티아치아토 stiacciato: 매우 얕은 돋을새김 조각기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가까운 물체는 상대적으로 높은 부조로, 배경은 낮은 부조로 조각되었습니다.
Saint George by Donatello, 1415-1417/Artchive
1858년에 돌을 던져 작품의 코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1892년에는 오르산미켈레 벽감에서 바르젤로 박물관으로 옮겨졌고요. 원래의 벽감에는 1892년부터 2008년까지 청동 복제품이, 이후에는 대리석 복제품이 놓였습니다. 원본 조각상은 메디치 빌라에서 도난당했다가 1945년 5월 역사가 프레드릭 하트( Frederick Hartt, 1914-1991)에 의해 회수되어 같은 해 7월 20일 피렌체로 반환되었습니다. 조각상의 받침대는 1976년에 다시 추가되었습니다. 현재는 피렌체의 바르젤로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중세 조각상들과 비교해 보세요.)
Jamb figures by Medieval sculptor , Chartres Cathedral, French, 1145/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UAQsYoYZfxs
Porte del Paradiso
-미켈란젤로-
내가 만든 가장 특별한 작품
-기베르티-
The copy of the Doors of Paradise on the East side of the Baptistry/wikipedia
피렌체 세례당 동쪽 문에 설치된 "천국의 문" 복제품은 로렌초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1378-1455)의 원작을 보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1990년부터 원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이 복제품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인 원본 문이 가지고 있던 의미와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Plan of the Baptistery Florence/Pinterest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의 "천국의 문"은 1425년부터 1452년까지 27년에 걸쳐 제작된 금박 청동 문으로, 피렌체 세례당의 동쪽 입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라고 칭송하면서 "천국의 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구약성서의 10가지 이야기를 담은 거대한 금박 청동 패널 10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패널은 여러 장면을 하나의 복합적인 이미지로 결합하여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The Gates of Paradise/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첫 번째 패널은 창세기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 불순종,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기베르티는 이 패널에서 이브를 중심인물로, 아담을 주변 인물로 묘사합니다.
The Gates of Paradise(Cain and Abel)/wikimedia commons
이 패널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여러 장면을 묘사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캠프 옆에 있는 모습, 아벨이 양 떼를 지키는 모습, 카인과 아벨이 제물을 바치는 모습,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모습, 그리고 신이 카인을 영원히 추방하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he Gates of Paradise, Stories of Noah/Flickr
이 패널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방주가 피라미드 형태로 묘사되어 있고요.
The Gates of Paradise, Stories of Abraham/wikimedia commons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른쪽 윗부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있고, 천사가 급하게 내려와 말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배경에는 나무들과 돌들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관람자들이 한번 만져보고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The Gates of Paradise, Issaac with Esau & Jacob/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아버지 이사악(issaac with Esau and Jacob )과 아들 에사우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이 패널은 건축적 구조와 원근법의 선구적인 사용을 보여줍니다. 야곱과 에사우 이야기는 하나의 프레임 안에 7개의 다른 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The Gates of Paradise(Joseph)/wikimedia commons
detail/Arthive
detail/Frilli Gallery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이 패널은 요셉이 노예로 팔리는 이야기를 통해 기베르티의 원근법이 원숙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The Gates of Paradise, Moses on Mount Sinai/www.wga.hu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배경의 바위산은 3차원적인 깊이를 제공합니다. 위쪽의 고요함과 달리 아래쪽은 움직임들이 느껴져 몹시 소란스러워 보입니다.
The Gates of Paradise, Stories of Joshua/ www.wga. hu
<여호수아와 여리고 성의 함락> 패널입니다. 이 패널은 여리고 성이 함락되는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배경의 건축물과 전경의 인물들을 통해 복잡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The Gates of Paradise/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detail/ Alamy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약자가 승리하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두 전사 사이의 키 차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실감 나지요.
The Gates of Paradise, Solomon and the Queen of Sheba/wikimedia commons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패널입니다. 이 작품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의 결혼 장면을 통해 기베르티의 원근법과 다양한 인물 표현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동서양의 통합을 상징하며, 1439년 피렌체 일 두오모 계단에서의 모임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기베르티는 선형 원근법과 고전주의 양식을 완벽하게 구사하여 패널들에 깊이감을 부여했습니다. 인물들을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표현했고요. 그는 주조 및 마감 기술의 대가였으며, 사라진 왁스 주조법을 사용하여 정교한 세부 묘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수세기 동안 "천국의 문"은 홍수, 기물 파손, 과도한 세척, 부식성 대기 오염 등 다양한 재해를 겪었습니다. 1990년에 원본문은 복원 및 보존을 위해 세례당 전면에서 제거되어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자리에 고품질 복제품이 설치되었고요, 복원된 원본은 2016년 박물관으로 반환되었으며, 질소 가스를 주입한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되어 미래의 산화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WkewBPMKEk
David by Donatello, 1440-1443, Smarthistory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의 <다윗>은 르네상스 시대의 상징적인 청동 조각품입니다. 고전적인 나체 조각의 부활과 함께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심지어 동성애적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도나텔로의 <다윗 David>(1440-1443) 작품은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의 의뢰로 팔라초 메디치( Palazzo Medici)의 안뜰 중앙 받침대 위에 전시되었습니다. 1469년에는 메디치 궁정에서 목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요. 1495년에는 팔라초 베키오( Palazzo Vecchio)로 옮겨졌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이후 처음으로 제작된 독립형 남성 누드 조각상이라는 점에서 서양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조각상의 크기는 높이 158cm, 너비 61cm, 깊이 54cm입니다.
David/Khan Academy
detail/ Smarthistory
다윗은 부츠와 월계관이 달린 양치기 모자만을 착용하고 있고, 벌거벗은 채로 서 있습니다. 이러한 누드 묘사는 당시 혁신적인 것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영웅적 누드를 연상시키면서도, 다윗이 물리적인 힘이 아닌 신의 은총으로 승리했음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청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연약한 신체는 그의 승리가 기적적임을 더욱 부각합니다. 그의 얼굴은 아래로 기울어져 골리앗의 머리를 응시하며, 멜랑콜리하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detail/ Firenze made in Tuscany
다윗은 한 발에 체중을 싣고 다른 발은 편안하게 놓는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체 조각에서 인물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도록 하는 조각 기법입니다. 이 기법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시작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유행했으며, 인체에 생동감과 움직임을 부여합니다.
도나텔로의 <다윗>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의 승리의 순간을 묘사하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인간의 힘이 아닌 신의 개입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요. 다윗은 피렌체 공화국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메디치 가문은 이 조각상을 통해 자신들을 자유의 수호자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의 모습은 당시 피렌체의 젊은 남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보여줍니다. 그의 아름다움과 신에게 사랑받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고요. 도나텔로의 <다윗>은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같은 후대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비교해 보세요. <The Young David by Andrea del Voroccio, 1473-1475)
The Young David by Andrea del Voroccio, 1473-1475/www.wga.hu
https://www.youtube.com/watch?v=6kUUJJV_MNA
Church & Museum of Orsanmichele, Florence/ Humana Lens
피렌체 중심부에 위치한 오르산미켈레( Orsanmichele) 교회와 박물관은 르네상스 시대 가장 중요한 피렌체 예술가들의 조각품을 소장하고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이 고딕 양식의 독특한 건물은 피렌체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상층의 큰 비포라스( biforas) 창문을 통해 구시가지의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고요.
오르산미켈레는 오랜 역사를 통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성 미카엘에게 봉헌된 기도실이었습니다. '산 미켈레 인 오르토(San Michele in orto)'라고 불리던 채소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요. 이 이름은 나중에 오르산미켈로 바뀌었습니다.
베데딕트 수도원이었던 이 건물은 1200년대 초에 곡물 시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284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큰 로지아( loggia)가 있는 곡물 거래소로 명성을 얻었고요. 1290년부터는 건물 안에 그려진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 프레스코화 덕분에 교역과 기도의 이중적인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1337년 대화제로 원래 건물이 전소된 후,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구조가 세워졌습니다. 이 새로운 구조는 중세 시대에 획득한 이중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아름다움과 명성을 자랑합니다. 특히 12개의 벽감에는 로렌초 기베르티, 베로키오, 도나텔로 등 위대한 예술가들이 피렌체 길드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성인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5세기에는 메디치 가문의 중요한 거점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1569년 코시모 1세는 상층부를 기록 보관소로 개조했으며, 기록 보관소로 연결되는 외부 아치와 계단이 만들어진 시기입니다.
오르산미켈레 박물관은 1996년에 개관했으며, 2015년부터 바르젤로 박물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박물관 내부에는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르네상스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는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예술가인 오르카냐(1308-1368)가 제작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버내클( tabernacle:성막)이 있으며, 베르나르도 다디( ~1348)의 성모 마리아상이 마치 보석함처럼 보호되어 있습니다.
The Tabernacle/A Sweet Savor
Tabernacle by Andrea Orcagna, 1359& Madonna by Bernardo Daddi,1346/Orsanmichele/Alamy
1960년대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아르키줌( Archizoom)이 설계한 현대적인 대형 계단이 1층과 2층으로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대기 오염 위험으로 인해 대형 조각상들이 복원되어 복제품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원본은 파올라 그리포니( Paola Grifoni)의 계획에 따라 1층으로 옮겨졌습니다. 2020년에는 태버내클과 도나텔로의 성 마르코상에 대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3년간의 작업 끝에 오르산미켈레는 2024년 1월에 확장된 개장 시간으로 대중에게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L2NPJ8WQCg
로렌초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1378-1455)는 피렌체의 오르산미켈레 ( Church & Museum of Orsanmichele) 교회 외벽을 장식하는 여러 청동상들을 제작했습니다. 오르산미켈레는 원래 곡물 시장이었던 건축물로, 피렌체의 주요 길드들이 각자의 수호성인 조각상을 의뢰하여 외벽에 전시했습니다.
오르산미켈레에 있는 기베르티의 대표적인 청동상으로는 <세례자 성 요한>, <성 스테파노>, 그리고 <성 마태오>가 있습니다. 이 조각상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예술적 성과로 평가받으며, 당시 길드들의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작되었습니다.
St. Stephen & St. Matthew/wikipedia
성 스테파노( Saint Stephen) 조각상입니다. 이 청동상은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제조업자 길드)의 의뢰로 1427에서 1428년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2.6미터에 달하며, 1340년에 제작된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1290-1348, 조각가)의 대리석 조각상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성 스테파노상은 기베르티가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를 위해 제작한 세 번째 청동 조각상입니다.
성 마태오 ( Saint Matthew) 조각상입니다. 이 청동상은 아르테 델 캄비오(은행가 길드)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1378-1455)의 예술 경력에서 중요한 성과로 인정받는 작품입니다. 고전주의 정신, 기념비적인 감각, 정확한 해부학적 구조, 그리고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자세를 보여줍니다. 1420년 이전에 조각에서 인본주의적 원칙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성 마태오상은 복원 과정에서 눈 부분에 은박 상감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St. John the Baptist/wikipedia
<세례자 성 요한 ( Saint John the Baptist)> 조각상입니다. 피렌체의 수호성인이자 아르테 디 칼리말라 (외국산 옷감 상인 및 염색공 길드)의 의뢰로 1412년부터 1416년 사이에 제작되었습니다. 이 청동상은 높이가 8피트 4인치 (약 2.54m)에 달하며,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에 세워진 최초의 대형 청동상 중 하나입니다. 기베르티는 이 작품을 통해 피사노의 조각상보다 더욱 움직임이 있고 표현적인 특징을 부여했습니다.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의 청동상들은 수세기 동안 대기 오염과 산성비로 인해 상당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20세기에는 피해 정도가 더욱 심각했지요. 1984년부터 오피피치오 델레 피에트레 두레( Opificio delle pietre dure)에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표면의 파티나와 오물을 제거하기 위해 레이저 기술이 사용되었습니다. 복원 결과, 머리카락과 의복 테두리에 금박 장식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청동상들에서도 도금의 흔적이 나타났고요. 현재 오르산미켈레 외벽에 전시된 조각상들은 복제품입니다. 원본은 대부분 건물 1층에 위치한 오르산미켈레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Equestrian Statue of Gattamelata, 1447-1453/wikipedia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의 <가타멜라타 기마상 Equestrian Staue of Gattamelata>( 1447- 1453년)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청동 조각품이고요. 고대 이후 처음으로 실물 크기로 주조된 기마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파도바의 산토 광장( Piazza del Santo)에 위치해 있습니다.
Condottiero Erasmo da Narni(1370-1443)/wikipeida
<가타멜라타 기마상>은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가 파도바에서 10년간 머물며 작업한 중요한 위탁 작품이지요. 이 조각상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 주로 복무했던 용병대장( 콘토티에로 Condottiero)에라스모 다 나르니( Erasmo da Narni, 1370-1443)를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에라스모 다 나르니( Erasmo da Narni, 1370-1443)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용병대장 ( 콘토티에로)으로, 흔히 '가타멜라타( Gattamelata, 꿀 고양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움브리아 지방 나르니 출신의 제빵사 아들로,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닌 몇 안 되는 성공적인 용병대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체끼노 브롤리아 밑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브라치오 다 몬토네 부대의 중견 지휘관으로 옮겨가 명성을 쌓았습니다. 몬토네가 아퀼라 전투에서 전사하자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용병대장으로 독립했습니다. 피렌체와 계약하여 밀라노에 대항한 전쟁에 참전했고요. 교황청에 고용된 후 높은 명성을 얻었는데, 몬토네에게 빼앗겼던 움브리아 도시들을 재정복 하고 교황청에 반기를 든 도시들을 진압하며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밀라노 공작의 영토 확장 도발을 막아냈고요. 임금 지급 지연 문제로 1434년에 교황군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고용주는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는데,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베네치아의 장군들 중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브레시아와 베로나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 기여하여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439년 베로나를 빼앗겼다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함께 되찾기도 했습니다. 1440년 뇌출혈로 쓰러져 병상에 있다가 1443년 파도바에서 사망했습니다. '
이 작품은 중세 시대에는 사라졌던 대규모 청동 주조 기술을 다시 선보인 것으로, 고전적인 기마 초상화의 웅장함을 되살린 최초의 르네상스 기마상입니다. 이 작품은 국가의 통치자가 아닌 개인을 기념하는 최초의 공공 조각상으로, 이후 군사 영웅들을 기리는 조각상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Equestraian Statue of Gattamelata/Shutterstock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실물 크기로 제작되었습니다. 조각상의 크기는 340*390cm이며, 받침대는 780*410 cm입니다. 도나텔로(1386-1466)는 인물의 실제 힘을 전달하기 위해 감정, 자세, 상징주의를 사용했습니다. 통치자처럼 인물을 실제보다 크게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70대에 사망했지만, 도나텔로는 그를 권력의 정점에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여 그의 위용과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시선을 멀리 두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침착하고 경계하며 주의 깊은 지도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요. 말 또한 경계심 많고 침착하며 용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나텔로는 말의 해부학적 구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군사적 리더십을 상징하는 지휘봉과 긴 검을 들고 있습니다. 말의 왼쪽 앞발은 포탄( orb) 위에 놓여 있는데, 이는 군사적 진보와 베네치아 군대의 힘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구슬은 물리적 균형을 유지하고 조각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도 합니다. 일부 해석에서는 이 구슬이 지구를 상징하며, 그가 세계를 지배했음을 나타낸다고 보기도 합니다.
말 아래의 받침대는 위쪽에 두 개의 부조와 그 아래에 가짜 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문들은 지하세계의 문을 상징하며 무덤의 느낌을 주지만, 이 기념비는 실제 매장지는 아니었습니다. 한 부조에는 두 명의 날개 달린 푸티( putti)가 가타멜라타의 문장을 들고 있으며, 다른 부조에는 두 명의 푸티가 전투 갑옷을 들고 있습니다. 도나텔로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기마상 등 고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말의 들린 앞다리를 지지하는 구체( sphere)를 추가하는 고대 조각 기법을 사용했고요. 2025년 10월에 대규모 복원 작업을 위해 받침대에서 제거된 상태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과 비교해 보세요.)
Equestrian Statue of Marcus Aurelius, The Original, 161-180/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6dWHPHELCKU
https://www.youtube.com/watch?v=xH3rUL9Iieg
Siena,Italy/Britannica
시에나 대성당( Siena Cathedra)과 세례당( Baptistery) 은 이탈리아 시에나에 위치한 중요한 종교 건축물입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대성당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시에나 대성당은 시에나의 역사적인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이고요. 이 대성당은 1179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봉헌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2세기 이상 건축이 계속되었고요. 1226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264년에 완공되었으며, 이전에는 로마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14세기 초에는 시에나의 성장하는 인구와 권력에 맞춰 확장을 계획했으나, 1348년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하면서 계획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미완성된 부분은 오늘날에도 '새 대성당' 또는 '미완성된 파사드( Facciatone)'로 남아있습니다. 대성당은 얼룩말 무늬처럼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시에나 시의 문장 색상을 상징합니다.
Siena Cathedral Pulpit, Nicola Pisano/Flickr
Siena Cathedral Pulpit/Wikiwand
대성당 내부에는 다양한 시대의 수많은 걸작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 1220-1284)의 <설교단 Pulpit>(1265-1268) 작품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 가장 중요한 조각 작품 중 하나입니다.
Piccolomini Altarpiece/ Alamy
피코로미니 제단 <Piccolomini Altarpiece>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성 비오, 성 아우구스티누스 조각상이 있습니다.
Statue of St. John the Baptist , broze figure by Donatello, 1457/Alamy
도나텔로의 <성 요한 세례자> 조각상도 보입니다.
Madonna del Voto/ wikimeida commons
<마리아의 맹세 Madonna del Voto> 작품도 보이고요.
Piccolomini Library/Gettyimages
피콜로미니 도서관입니다. 핀투리키오와 그의 작업실이 1503년에서 1508년 사이에 그린 프레스코화가 특징입니다.
Siena Cathedral, the floor/Michele Busillo
바닥 한번 보시죠. 조르지오 바사리(1511-1574)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고, 가장 웅장한 바닥"이라고 극찬한 대리석 모자이크 상감 및 스그라피토 바닥은 대성당에서 가장 귀한 소장품 중 하나입니다. 이 바닥은 14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완성되었으며 56개의 상감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Facade of the baptistry/wikipedia
산 조반니 세례당(Baptistery of San Giovanni)은 시에나 대성당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1316년에서 1325년 사이에 지어진 초기 르네상스 예술의 중요한 증거가 되는 건물이지요. 세례당은 산 조반니 광장에 위치하며, 대성당의 아래에 독특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파사드 상당 부분은 미완성 상태이고요. 내부에는 중앙에 육각형 세례반이 있는데, 이는 도나텔로(1386-1466),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 야코포 델라 퀘르차(1374-1438) 등 당대 주요 조각가들이 1417년에서 1431년 사이에 제작했습니다. 세례반의 청동 패널은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묘사합니다. 천장에는 베키에타( Vecchietta)와 그의 학파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The baptismal font, 1417-1427/wikipedia
시에나 세례당의 세례반 부조 중 로렌초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가 제작한 부분은 1427년경에 만들어진 금박 청동 작품으로 , <세례를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주제로 합니다. 이 부조는 시에나 대성당 아래에 위치한 세례당의 세례반 한쪽 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초기 조각의 중요한 예시 중 하나이고요.
Baptistery of San Giovanni/Italy
Lorenzo Ghiberti, battesimo di Cristo, 1427/wikimedia commons
기베르티(1378-1455)가 제작한 <세례를 받으시는 그리스도> 작품입니다. 작품의 중앙에는 흐르는 강물 위에 서 있는 예수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세례자 요한이 오른팔을 들어 예수를 세례 하는 모습이 있고요. 하늘에는 성부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 아래로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내려옵니다. 천사들의 무리도 함께 자리하여 예수의 세례를 축하하며, 화면에는 성스럽고 경건한 분위기가 흐릅니다.
기베르티의 부조에서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표현 방식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신체의 근육과 동세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옷의 묘사와 배경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에서 초기 르네상스의 시도가 돋보입니다. 반면, 왼쪽에 등장하는 천사들과 세례자 요한의 신체 표현은 중세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무겁게 떨어지는 옷 주름은 중세 조각의 도식화되고 패턴화 된 특징을 보여주고요. 이 부조는 매우 평평하고 얕은 "스티아치아토(stiacciato) 부조 기법"을 채택하여 회화적인 품질과 원근감을 구현했습니다. (아래 도나텔로의<헤롯의 향연> 작품과 비교해 보시죠.)
Prompted by her mother, She said,
"Give me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on a platter,"
And the King was sorry ... but he had John beheadede...
and his head was brought on a platter.
- Mattew 14: 6-8
Feast of Herod by Donatello, 1425/wikipedia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의 <헤롯의 향연>(1425-1429)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청동 부조 조각품입니다. 이 작품은 60*60cm 크기의 청동 부조 작품으로, 살로메가 헤롯 안티파스에게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한 후, 그 머리를 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원근법과 사실주의를 혁신적으로 사용하여 주목받았습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를 보고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요. 도나텔로의 초기 부조 조각 중 하나이자 그의 첫 번째 청동 부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도나텔로(1386-1466)는 건축가 브루넬리스키(Brunelleschi, 1377-1446)가 개발한 일점 선형 원근법 개념을 조각에 적용하여 , 그림과 같은 효과를 청동에 구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도나텔로가 원근법을 능숙하게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초기 부조 조각 중 하나입니다. 도나텔로는 여러 층의 아치와 배경 인물들의 건축적 요소를 활용하여 깊이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릴리에보 스키아차토( rilievo schiacciato)또는 얕은 부조 기법을 사용하여 깊이의 환상을 만들었으며, 이는 대기 효과와 더 큰 깊이감을 주었습니다.
릴리에보 스키아차토(rilievo schiacciato)는 도나텔로가 1425년경 피렌체에서 고안한 매우 낮은 보조 조각 기법입니다. 이탈리아어로 '납작하게 눌린' 또는 '으깨진'부조를 의미합니다. 바스 릴리프( bas-relief)의 극단적인 형태로, 깊이가 불과 몇 밀리미터에 불과합니다. 이 기법은 돌에 새기는 일종의 조각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대리석 표면을 끌로 다듬어 빛을 포착하는 들쭉날쭉한 부분과 돌출된 부분을 만들어 하이라이트와 그림자를 생성합니다.
dr richard stemp
도나텔로는 하나의 소실점에 집중하는 대신, 'V'자 형 소실점을 사용하여 보는 사람의 시선을 장면 전체로 유도했습니다.
detail/Giode artostoque de la Province de Sienne
detail/ Guide artistique de la Probince de Sienne
이 작품은 살로메의 춤, 세례 요한의 참수, 그리고 헤롯 왕에게 머리를 바치는 장면과 같이 세례 요한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여러 요소를 하나의 프레임에 담아냅니다. 헤롯과 그의 일행이 잘린 머리에 반응하는 감정적인 표현을 강조했고요. 헤롯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분명히 드러나며,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호기심에서부터 공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도나텔로는 이전 작품들이 이 요소들을 분리하여 보여준 것과 달리, 연속적인 서술 기법을 사용하여 이 장면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이 기법은 참수 장면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고도 요한의 순교를 묘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S7nAsjE_VQ
Penitent Magdalene by Donatello, 1440,wood/wikimedia commons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Penitent Magdalene>는 목조 조각상입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도상학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성 막달라 마리아를 비범하게 사실적이고 심리적으로 깊이 있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당시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도나텔로의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The Penitent Magdalene by Donatello, 1453-55/Artchive
detail/Smarthistory
이 조각상은 메리 막달라 마리아가 수년 동안 사막에서 고행하며 금식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피렌체의 세례당을 위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 현재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 Museo dell'Opera del Duomo)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뛰어난 해부학적 사실주의와 깊은 심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요. 도나텔로(1386-1466)는 이 작품을 통해 메리 막달라 마리아의 고통스러운 회개와 구원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녀의 모습은 역경에 직면한 육체적, 정서적 끈기를 보여줍니다. 그녀의 고통이 영적 성장을 가져왔음을 보여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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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미터에 달하는 인상적인 크기의 목조 조각상입니다. 도나텔로는 이 작품을 흰 포플러 목재( White Poplar wood)로 조각했습니다. 포플러 목재는 가볍고 작업하기 용이하여 15세기 조각에서 자주 사용된 재료였습니다. 도나텔로는 목재를 정밀하게 속을 파내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조각의 무게를 줄이고 표현력을 극대화했습니다.
현재는 목재 본연의 갈색을 띠고 있지만, 복원 작업을 통해 이 조각상이 원래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초기에는 섬세한 폴리크롬( polychrome, 다양한 색상으로 건축 요소, 조각 등을 장식하는 관행) 채색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조각상에 더욱 생생한 현실감과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을 것입니다. 조각상의 머리카락은 길고 흐트러져 사실적으로 무릎과 허벅지 위로 떨어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행으로 인해 헝클어진 모습을 강조하며 동시에 겸손과 세속적 허영으로부터의 단절을 상징합니다.
Penitent Magdalene by Donatello/ArtWay.eu.
성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묘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회개하기 전의 아름다운 창녀나, 회개 후에도 젊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종종 그리스도의 발을 씻긴 행위를 상징하며, 동시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요소로 사용되었고요.
Mary Magdalene with Eight Scenes from her life, 1280-85/wikipedia
Noli me Tangere by Giotto, 1305/bridgeman images
그러나 도나텔로는 이러한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완전히 배제하고, 고행과 참회의 결과로 인해 초췌하고 쇠약해진 막달라 마리아를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깊이 파인 눈과 움푹 들어간 뺨, 그리고 거칠어진 피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막에서 금식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요. 이러한 모습은 물질적 소유를 포기하고, 오직 고통과 영적 정화에 몰두한 성인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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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는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조각상에 반영하여, 뼈와 근육의 윤곽을 드러내며 극심한 쇠약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는 막달라 마리아의 영적 고통이 신체적 변화로 나타났음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그녀의 모습은 성인으로서의 이상적인 아름다움 대신, 인간적인 취약성과 회개의 변혁적인 힘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람객에게 성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종교적 인물을 단순히 숭배의 대상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 인간적인 감정과 경험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도나텔로의 예술적 천재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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