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거주하고 있는 서든 캘리포니아(Southern California) 지역은 햇볕량이 많은 곳입니다. 오히려 겨울철 귀한 비님이 내리면 나무들이 푸릇해져 생기가 돌지요. 옷차림이 다른 주에 비해 가볍고 케쥬얼 합니다. 정장도 잘 어울리지만, 편안한 티와 청바지 혹은 반 바지 차림의 샌들이 더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무상으로 쏟아지는 강렬한 빛 덕분이지요. 햇볕양 많아 멀리서 보면 다들 명랑, 쾌활하지요. 가까이서 보면 고민덩어리 몇 개쯤 안고 살 테지만요.
요즘 그 태양빛이 이상기온 현상으로 얼굴을 잘 디밀지 않습니다. 지구촌 곳곳이 예외가 없듯이 이곳도 그 영향권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제가 끄적이고 있는 이 시간에도 밖은 바람과 희뿌연 회색빛으로 이미 울상입니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거든요. 공짜인 듯 무상으로 쏟아질 땐 당연하다 생각하고 귀한 줄 몰랐습니다. 4월인데도 주섬주섬 껴입어야 하니 새삼 강렬한 햇볕 소환하고 싶어 집니다. 조금만 떼어내어 마음의 온도라도 높이고 싶어서 말입니다.
서양 미술사에 '빛'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있지요. 다들 알고 계시는 그분 맞습니다. 오늘은 빛을 영화의 조명처럼 드라마틱하게 활용했던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와 페미니즘 화가로 널리 알려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의 시간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인류 역사상 문화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로 르네상스를 꼽습니다. 르네상스는 종교화가 신앙심의 근원인 동시에 위엄과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요. 더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위선 또한 많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화가가 있습니다. 카라바조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교인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림만큼 훌륭한 도구도 없지요.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성화가 필요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 본연의 심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16세기 뒷골목을 오가는 불량배, 거지, 매춘부 등을 그림 속에 끌어들입니다. 그들을 예수의 모습으로, 때로는 성서 속 성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성모님의 모습으로 둔갑시키면서 말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 어디에도 인간을 초월한 신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출처:프레시안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39살)는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였던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로 밀라노 근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풍습에 따라 이름에 아버지 고향 이름을 붙였습니다. ( da Caravaggio;카라바조 출신) 최근 기록에 의하면, 2007년 카라바조가 밀라노에서 태어난 사실이 만학도 아마추어 미술사가에 의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6살이 되던 해,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13살에 화가의 길로 일찌감치 들어서지요. 그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명암표현법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그림 대부분을 보면 암흑에 가깝도록 어둡게 처리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에 빛이 떨어지도록 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마치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말입니다. 대상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이지요.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 혹은 1656년 사이)는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화가입니다.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어머니 프리덴 시아 디 몬토네(Prudentia Montone)와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틀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3-1639)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 자녀 중 맏이이고요. 아버지 오라치오는 로마 화단의 도발적인 화가였던 카라바조(Caravaggio)의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카라바조와 함께 한 때 로마 거리에서 다른 화가를 비방하고 헛소문을 퍼뜨린 혐으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1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아버지가 혼자서 네 남매를 키우게 됩니다. 당시 미술학교 입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재능 있던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물감을 섞고 안료를 빻으며 자연스럽게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그림1.<Young sick Bacchus>,1593/wikipedi그림2.<Suanna and the Elders>,1610/wikipedia
집시와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오로지 그들만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다.
-Caravaggio-
그림왼쪽.<The Fortune Teller>,1594/wikipedia 그림오른쪽. <The Cardsharps>,1595/wikipedia by Caravaggio
그림 1. <병든 바쿠스 신 Young sick Bacchus>(1593)은 카라바조 초기작품 중 하나입니다. 카라바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길 없으나 북쪽 밀라노에서 로마로 혼자 떠나게 됩니다. 로마의 뒷골목을 헤매며 구걸도 하고 길거리 화가로 지내다 그만 깊은 병에 걸립니다. 몸이 망가져 로마 주변에 있던 빈민구제소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납니다.
<그림 1>에서 보듯 젊은 바쿠스의 모습이 어딘지 핼쑥하지요. 입술 색도 아직 병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모습이고요. 겨우 살아 돌아온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을 신의 모습에 빗대 표현한 작품입니다. 신의 모습치고 꾀죄죄합니다. 손톱에 때가 낀 모습까지 보여주니 말입니다. 술의 신인 바쿠스가 인간처럼 병에 걸리는 모습을 일반인들이라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발상이 참 기발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합니다. 밑그림이 없는 작품 제작 방식을 선호합니다. 강렬하고 연극적인 연출 방식의 표현법에 뛰어나고요. 보수적인 미술계에서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카라바조의 방식은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젊은 작가들은 카라바조의 스타일에 열광합니다. 마치 디오니소스 뒤를 따랐던 광신도들처럼 말입니다. BTS로 표현하면 느낌이 확 와닿을까요. 그의 화풍은 젊은이들 사이에 트렌드가 되고 자신들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카라바조 자신이 로마 뒷골목 생활을 하며 인간 군상들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길거리 생활을 몸소 체험하며 성스러운 도시 로마 사람들의 밑바닥 삶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림왼쪽>을 보면 젊은 여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손금을 봐주려나 봅니다. 청년은 장갑을 쥔 손을 칼에 올리고 젊은 여인에게 손을 맞긴 채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입니다. 당시 집시들은 치마를 한쪽 어깨에 매달아 입고 거리를 다녔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점을 봐주고 돈을 받는 거죠.
깃털 달린 모자와 화려한 옷차림 그리고 칼은 청년의 신분이 귀족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장갑 낀 손을 칼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부유함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손금을 봐주는 척하고 청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훔치려 하네요. 귀족 청년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궁금한 귀족청년. 훔칠 기회를 노리는 집시여인. 카라바조는 집시 여인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경을 모두 생략합니다. 길거리 캐스팅을 해 직접 집시 여인을 불러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림오른쪽>은 미국 텍사스의 킴벌미술관에 전시된 카라바조의 작품 <카드 사기꾼>입니다. 짜고 치는 타짜들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카드 패를 보려고 흰자위가 엄청 커진 타짜남의 모습도 보이시죠. 영국에서 7천만 원에 판 그림이 170억 원 상당의 카라바조 작품으로 감정되자 옛 주인이 화가 나서 경매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 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2014.10.28)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국인 랜슬롯 드와이츠는 2006년 경매사 소더비를 통해 4만 2천 파운드 (한화 7천100만 원)를 받고 그림 한 점을 내다 팔았습니다. 드와이츠의 집안에서 1962년 140파운드에 사들인 이 그림이 카라바조 시대의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당시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림을 사들인 저명 예술가이자 수집가인 테니스 마흔 경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진품이라면서 1천만 파운드(약 170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발표를 했고요. 드와이츠는 소더비가 제대로 감정을 하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낸 거지요. 소더비는 과실이 없었다는 입장이고요. 현재 이 그림은 170억 원의 보험에 가입돼 있으며 감정가는 5천만 파운드 (847억 원)라고 하네요.
내 딸은 견줄만한 화가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나다.
-오라지오 젠틀레스키(Orazio Gentileschi)
<그림 2>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가 17살에 그린 < 수산나와 두 노인들> 작품입니다. 벌거벗은 한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남자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 남자는 빨간 망토의 남자에게 귓속말로 뭐라 속삭이고 있습니다. 빨간 망토의 남자는 여인에게 무언가 말을 전하고 있고요. 여인은 그 말에 진저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수잔나와 두 노인들>이라는 성서 이야기입니다.
스산나와 요아킴은 유대인 부부입니다. 남편 요아킴이 유명인사라 집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그중에는 유대인 재판관 두 명도 끼어있습니다. 이 두 재판관은 아름다운 수산나를 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들 모두가 돌아가고 수산나가 정원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두 노인은 수산나에게 다가가 성관계를 요구하지요. 만일 거절할 경우 젊은 남자와 간통했다고 고발하겠다며 협박합니다. 수산나는 거짓이 두려워 겁탈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거절합니다. 결국 이들의 모략에 수산나는 간통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수산나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절실한 수산나의 기도가 닿았는지, 성령이 어린 다니엘의 몸에 내려왔고, 다니엘이 진실을 밝혀 수산나의 누명이 벗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복제됩니다. 여자의 누드가 금지되던 시대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매개로 여자의 누드를 그릴 수 있었지요. 정원 풍경 속 여자의 누드는 그림을 매입하는 사람도, 그리는 사람도 모두 남자였던 사회에서 최고의 관심거리였습니다. 체면상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예술이란 이름을 빌어 소유하고 싶었던 귀한 거지요. 남자들의 입장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라 희생자인 수산나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두 노인을 유혹하는 여자로, 때로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연약한 모습으로 재현되기 일쑤였습니다. 여자의 위치가 아버지와 남편의 재산의 일부로 여겨지던 때라 가늠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습니다. 여자의 누드에만 초점이 맞춰진 여타의 그림과는 달리 그녀의 그림 속 수잔나는 수치심과 저항감이 온몸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다른 화실의 수습생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남몰래 아르테미시아를 탐하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가 사사건건 이들을 방해합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들>에서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제목과 다르게 노인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수산나의 모습에 자신이 느끼는 불쾌감을 , 두 노인 중 한 명의 모습에 자신을 탐하는 타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선배화가 틴토레토(Tintoretto)의 같은 주제 <Susanna and the Elders>(1555-1556) 그림과 비교해 보시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Tintoretto, <susanna and the Elders>,1555/wikipedia
그림1. <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99/wikipedia그림2.<Judith Beheading Holofernesa>1620/wikipedia
끔찍한 장면이라 공포영화가 따로 없지요. 카라바조의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입니다.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입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섭니다. 유디트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 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디트는 하녀 아브라와 함께 이 계획을 실현하여 성공시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의 대조 속에 홀로페르네스의 고통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유디트의 자세는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해.' 하는 다소 모호한 모습입니다. 이 작품을 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강렬한 명암대조와 홀로페르네스의 얼굴 표정입니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는 카라바조, 루벤스와 같이 바로크 시대 미술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입니다. 남자를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살인을 저지르기에 너무 가녀린 모습으로 그려지거나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순진한 얼굴의 유디트의 모습도 있습니다. 심지어 장군의 목을 베면서까지 관능적인 표정을 짓는 유디티의 그림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이렇듯 유디트의 모습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입맛에 맞게 재생되어 왔습니다.
<그림 2>. 그들의 작품들과 달리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디트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아르테미시아가 표현한 유디트는 단호합니다. 마치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치의 망설임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놀라울만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군이 꼼짝할 수 없게 위에서 짓누르는 하녀를 보세요. 저 정도 압박이 아니면 장수를 당할 수 없겠죠. 그리고 유디트의 힘이 잔뜩 들어간 팔뚝과 장군의 목에서 솟구치는 동맥혈은 현장감까지 느껴져 더 끔찍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아르테미시아는 성폭행 피해자입니다. 당시 17살의 아르테미시아는 로마법정에 서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시빌레'라는 손가락 마디가 우스러 지는 고문을 견디며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가해자 앞에서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아르테미시아의 원근법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는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러나 형량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고 유유히 자신의 일자리로 복귀합니다.
이 사건 이후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그림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입니다. 사정을 알고 나니 그림이 좀 덜 무서울까요. 아니면 여전히 간담이 서늘하신가요.
재판 건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불공평하다 싶은 마음은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악몽 같은 기억이 자꾸 떠오를 때마다 아르테미시아는 붓을 잡았습니다. 거친 호흡을 잠재우고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그림에 다 쏟아 놓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풀어낼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우아하게 복수하는 방법은 그림밖에 없었습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로마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습니다.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의 모습으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타시(Tassi)의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죠.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이 보통 자신의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은 건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의 모습으로 그것도 이렇게 잔인한 역할로 그려진 적은 없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티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합니다. 적장의 목을 베는 주인공으로 말이죠. 아르테미시아는 이 일을 계기로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와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보는 이마다 넋을 잃을 만큼 빼어났다는 성서 속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지혜, 용기, 의지를 실행하고 관철할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건강한 육체로 다르게 해석하여 표현해 냅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아픈 서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다른 거장들의 작품이 기억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힘이 센 이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N8NlznHtE
이후로도 그녀의 작품은 시간을 달리해 같은 주제로 여러 편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역사 속 여성들의 삶을 그녀의 경험을 녹이고 더해 기존 남성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해석으로 표현해 냅니다.
그림1.<Judith &Her Maidservant>/wikipedia그림2. <유디트와 하녀>,1613-14/wikipedia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ew>,1599-1600/wikipedia
<성 마태의 소명>이라는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걸작 중의 하나로 예수님이 마태에게 그를 따르도록 영감을 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저요?"
하고 물어보는 듯한 수염 난 남자가 마태오입니다. 직업이 세금징수원이었으니 그의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돈을 세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 출현에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돈을 세느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도 보입니다. 작품을 X-ray로 촬영해 보니 예수의 손가락 방향이 세 번이나 수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로마 다른 화가의 공방에서 정물을 담당하는 도제에 불과했던 카라바조였습니다. 당시 정물이란 성화의 배경을 장식하는 사소한 분야로 여겨졌지요. 당연히 주문자가 있었을 리 없는 가난한 화가였고요. 그런 그가 음악과 미술에 당대 최고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델 몬테 추기경의 눈에 띄게 됩니다.
델 몬테 추기경은 피렌체의 후원을 받아 메디치 가문의 예술품 매입에 도움을 주던 사람입니다.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그린 그림을 그 자리에서 삽니다. 그리고 숙식을 제공하고 스튜디오도 마련해 주지요. 카라바조는 그곳에서 다양한 창작을 실험해 보고, 테크닉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합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바쿠스 Bacchus, 1596>와 <메두사의 머리 Head of the Medudsa, 1577>가 그것이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yxSjUvh0g8
그림에 신성함이 없어,
자네에게는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앟아,
자네에게도 신성한 기운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예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보르게세 추기경의 경고-
그림1.<Death of the Virgin>,1604-1606/wikipedia그림2. <Madonna &Child with St.Anne>,1605-1606/wikipedia
<그림 1>.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대형 제단화입니다. 당시 성당이 있던 지역은 로마의 빈민가였습니다. 성직자들이 빈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지요. 그만큼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던 의뢰인들은 성모의 죽음이 영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작품이 공개되자 의뢰인들은 경악합니다. 그리고 급기야 작품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작품을 거부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묘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거룩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성경의 내용과 무관하게 익사한 임산부를 등장시켰습니다. 더욱이 카라바조는 그가 사랑했던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관례를 어겨버립니다. 아무리 주제가 성모의 죽음이더라도 실제 죽음을 묘사하지 않는다는 금기 사항을 어긴 거지요.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의 모습은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퉁퉁 불어 버린 발을 내보이고 침대 위에 숨진 채 누워있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종교계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성모와 매춘부 사이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파괴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요. 결국 제단화는 철거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으로 교체됩니다. 카라바조의 눈에 성모의 죽음과 매춘부의 죽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림 2>.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드로 대성전을 수리하면서 새로 생긴 공간에 그의 작품을 걸기로 하고 제작을 의뢰합니다. 카라바조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세계 교회의 심장인 베드로 대성전에 남게 된다는 것은 더 없는 영예이기에 흔쾌히 수락하고 심혈을 기울여 단기간에 완성합니다. 한 달가량 성당에 걸리면서 예기치 못한 반응들이 터져 나옵니다.
성 안나를 묘사한 오른편의 늙은 여인의 모습은 당시 마을을 떠돌던 집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빨래하는 아낙네처럼 치마를 걷어 올린 모습이고요. 상의 노출이 심한 옷차림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이미 많이 자란 모습인데 갓난아기처럼 벌거벗은 채 그려져 있고요. 성스러워야 할 성화를 이런 식의 세속화된 인물들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을 듣게 됩니다. 더군다나 교황좌가 있는 베드로 대성당에 걸기에 너무 조잡해서 분심스럽다는 여론에 밀려 철거됩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도 반대를 받아 다시 철거되게 됩니다. 그림값이 뚝뚝 떨어지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악명 높은 교황의 친척이었던 보르게세(Scipio Borghese) 추기경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가문의 소장품으로 남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카라바조의 명성은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이 여파로 그는 로마를 떠나야 했고 , 그에게 이 같은 절호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림1.<The Beheading of St. John the Baptist>,1608/wikipedia그림2. <세례 요한의 목과 살로메>,1610-1615/wikipedia
카라바조의 인지도는 로마에서 점점 추락합니다. 급기야 1606년 5월 28일 로마에서 살인죄까지 저지르며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카라바조를 보는 즉시 참수해도 좋다는 교황령이 떨어집니다.
한창 잘 나가고 있던 화가였는데 어쩌다 이지경까지 이르렀을 까요? 삼촌과 동생이 성직자였던 집안입니다. 누구보다 신앙심 깊었던 사람이고요. 머리로는 알지만 그렇게 살아내질 못하고 관성의 법칙처럼 쾌락에 탕진하는 자신의 모습이 카라바조 역시 두렵습니다.
카라바조는 나폴리를 거쳐 1607년 7월 초에 몰타(Malta)로 도피합니다. 이 작품은 1608년 도망자 신분으로 몰타에서 그린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입니다. 그가 나폴리에서의 보장된 성공과 안전을 포기하고 몰타로 이주했던 이유는 기사 작위를 통한 사면의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카라바조는 파사지오(Passaggio)라는 관례에 따라 성 요한 기사단에 그림을 헌정하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몰타의 대 영주와 귀족들은 카라바조의 어두운 과거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사면의 특혜를 주어 카라바조의 그림을 얻고 싶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삶을 용서받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그림 속 <세례자 성요한의 죽음>에 표현된 피에 자신의 서명을 합니다. 그는 세려자 요한의 잘린 목 밑으로 흥건히 고인 붉은 피를 찍어 'F. michel'이라고 서명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Frater of Michelangelo'의 약자로 보이는데, 이는 카라바조가 성 요한 기사가 되면서 진심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를 이름으로 새겨 넣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몰타에서 목숨을 잃은 120명의 성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영웅적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교도의 침공을 막다가 작렬하게 전사했고, 그들의 시신은 수습되어 ,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 >이 그려진 산 조반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도록 <세례자 성 요한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과감히 탈피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장면을 어두운 몰타 감옥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다른 그림에서는 표현하지 않은 몰타의 성벽과 대문을 배경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또 성벽 오른쪽에는 감옥에 갇여있는 두 명의 죄수들을 그려 넣어 창살 밖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했습니다. 중앙 땅바닥에 두 팔이 뒤로 결박된 채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목이 잘린 채 죽어가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몸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겉옷은 순교를 상징하듯이 세례자 요한의 붉은 선혈과 함께 상체와 하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참수형을 선고받고도 계속 돌아나니면서 그림을 주문받습니다. 절박한 시기였던 카라바조의 그림이 깊어지며 좋은 작품들을 많이 그려낸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목이 잘리는 작품들이 이 시기 많습니다.
참수형을 피하기 위해 나폴리로 다시 도주합니다. 그림 실력으로 몰타 기사단의 인정을 받아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위를 받은 후 6개월 후 기사단원과 싸워 중상을 입히고 또다시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몰타 기사단의 습격을 받아 얼굴이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게 되고요.
<그림 2>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세례자 요한의 모습도 함께 보시고 비교해 보세요. 기존 남성들의 시선과 다른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쟁반 위에 놓인 세례자 요한의 참수된 머리를 보고 , '어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맞나? 한번 보자'하는 식의 살로메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림 속에서 남자를 이렇게 과하게 표현했던 페미니즘 화가도 드물 것 같습니다.
그림1.<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1610/Caravagio.org그림2.<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1639/wikipedia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로 교만함을 무찔러야 한다.
키라바조는 평생 충동이 조절되지 못했습니다. 더욱 파괴적으로 나타났지요. 주택침입죄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공증인 파스콸로네를 폭행해 체포되기도 했고요. 임대료를 6개월이나 납부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이 사는 방의 창문에 돌을 던진 혐으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카라바조를 후원했던 이들은 인내심에 바닥을 드러냅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605년 살인사건으로 카라바조 삶이 점점 끝을 향해 갑니다.
그림 1.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소년입니다. 필리스타인의 투사 골리앗은 괴물처럼 큰 덩치에 청동투구와 비늘 갑옷을 입고 무장한 모습으로 등장하지요. 골리앗은 이스라엘군에게 1:1로 싸워지면 상대의 종이 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때 소년 다윗이 갑옷과 투구를 모두 거절 한 채 맨 몸으로 막대기와 돌멩이를 손에 들고나가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던집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 속 다윗을 과거 소년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골리앗의 얼굴에는 습격을 받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도달해 더는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카라바조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젊은 시절 조절되지 못했던 충동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죠. 자신의 널뛰는 본성을 다스리지 못해 영원한 형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끝없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 그림 한 장 들고 교황에게 사면을 청하러 카라바조는 떠납니다. 중간에 폭력배들에게 칼도 맞고 잠시 억류되어 있다가 그만 그림을 실은 배가 먼저 떠나가고 맙니다. 먼저 간 이 그림을 찾아 교황님께 용서를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수포로 돌아갔고 이 그림을 찾으러 가는 길 위에서 객사하고 맙니다. 교황은 이미 사면을 내린 상태였지만 카라바조는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후였죠.
https://www.youtube.com/watch?v=xDXx3aNK4TA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림 2> 젠틀레스키의 작품 중 화가로서 자부심을 완벽히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회화의 알레고리로 그려진 자화상>이라는 작품이고요. 제목에서 읽히듯 젠틸레스키 자신을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고백합니다. 작품 속의 그녀는 일반적인 자화상들과 달리 정면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무척 파격적인 구도인 거죠. 두 손에 들린 팔레트와 붓은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의 캔버스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화면 밖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당대 유사한 자화상들이 자신을 귀족처럼 표현한 것과 달리 그 어떤 화려한 옷도 장신구도 없는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자신을 담아낸 거죠.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던 화가의 세계. 바로크 당시에도 유일한 여성화가였던 젠틸레스키가 화가로서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보란 듯이 팔레트와 그림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이 자화상은 회화의 우화로서의 16세기 체자레 리파(Cesare Ripa)의 미술 핸드북 <이코놀로지아 Iconologia>에서 표현한 아름다운 여성의 표준 도상학을 실천해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완전한 검은 머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치형 눈썹, 그녀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치고...' 제안한 글 디렉션 대로 실천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는 미술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많은 그녀의 작품은 아버지 오라치오 작품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지요. 1900년대 초가 되어 그녀가 재발견되면서 한동안 그녀의 삶과 그림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나치게 성적인 편견이 가득한 가십거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1970년대와 1989년대에 페미니스트 미술사 학자들에 의해서입니다.
1976년 전시회 "여성 미술가(Women Artists:1550-1950)에서 미술사학자 앤 서덜랜드 해리스(Ann Sutnerland Harris)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서양 미술 역사상 최초의 여성화가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화가'라는 의미 부여를 하면서부터입니다.
특유의 드라마, 빛의 효과, 색의 혼합을 통해 그녀는 바로크 미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라는 주제의 위계를 과감히 무너뜨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로 부르나 봅니다.
바로크 미술의 시작점이자 중심이자 그 자체였던 카라바조의 삶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였던 젠틀레스키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술가들도 사람이죠. 기쁨이 있고 슬픔, 우울함, 그리고 말 못 할 분노 등 우리랑 똑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입니다.
우리가 편하자고 분류해 놓은 미술사조 안에서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는 '빛'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과 주변의 삶을 표현했던 화가들입니다. 벨기에의 루벤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그리고 <아이리쉬맨 > 영화의 감독 마틴 스콜세이지 까지 한 줄기 빛은 멀리 아주 먼 곳까지 뻗어 나갑니다.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