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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추상과 열정 사이

잭슨 폴록& 페기 구겐하임


미학적 안목, 끊임없는 헌신, 그리고 경영적 능력까지 돈이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운영이 고도화되지 않으면 힘든 것이 미술관 운영입니다.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좋은 작품을 팔고 사는 갤러리와 달리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은 '판다'라는 개념은 생각하기 어렵거든요. 또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입장료나 후원금이 전부인 곳도 있으니까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제품들이 걸려 있고  보관자체도 온도 습도를 맞춰줘야 합니다. 보험을 들어줘야 하는 작품들도 많고요. 어린이를 상대로 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해야 하니 노력과 재원이 많이 들어갑니다. 크리스티나 소더비를 통해 좋은 작품을 사는데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돈 좀 있는 가문의 여성들이 대부분 대표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녀들 말입니다. 




뉴욕에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 있어요. 뉴욕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에 의해 1931년 설립되었죠. 네덜란드계 이민자로 운송업을 통해 부자가 된 친정가문이 밴더빌트 가문입니다. 네덜란드계 신흥부자인 셈이죠. 올드 머니를 가진 시댁 휘트니 가문을 만나 돈과 명예를 함께 지니게 되었죠.





 본인이 조각공부를 했던 사람입니다. 이렇다 할 문화가 따로 없었던 미국 땅에 예술가들을 위한 교류의 장을 만듭니다. 예술가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고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해 주는 일종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들어 예술에 투자합니다. 





휘트니 미술관 덕분에 화가들의 자율성이 최대한  존중받게 됩니다. 화가들의 재정적 문제를 덜어주며 미국의 문화예술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 시작합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새로운 예술가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곳도  휘트니 미술관이었습니다. 상류층의 부를 단순히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해 주는 차원을 넘어 어떻게 하면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여인이기도 합니다. 




사생활에 있어서 이와는 결이 다른 행보를 걸었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과 그녀가 발굴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그림1<Going West>,1934-1935/ wikiArt.org그림2, 타이타닉호&벤저민 구겐하임/ 한국철강협회-홍보관




<그림 1> 잭슨 폴록은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살던 와이오밍은  광활한 지역입니다.  미국의 주중에서 가장 인구수도 적고요. 그 대신 엘로스톤 국립공원이라는 보물을 품고 있지요.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4명의 형제들과 함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습니다. 자녀 4명 중 잭슨을 포함한 3명이 예술가로 자랐고요. 폴록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측량을 나가면서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또한 멕시코의 벽화가 두 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림 2>'미술 컬렉터'라고 하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어서 말이죠. 그림이 고위층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으니까요. 그래서 이 시장의 최정점인 미술 컬렉터를 보는 시각은 극과 극입니다. 미술에 투자하며 예술계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오직 돈을 좇으며 미술계를 왜곡하는 '검은손'으로 지탄받기도 합니다. 




잔설적인 미술컬렉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도 호평과 혹평을 고루 받았습니다. 페기 구겐하임은 미국 명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898년 필라델피아에서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합니다. 유대계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은 광산업으로 어머니 가족은 은행업으로 부자가 됐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에서 자랐지만 페기의 유년은 우울함으로 가득합니다. 친가, 외가, 양쪽 모두 불행이 닥칩니다. 집안 내력처럼 이모, 외삼촌들의 성격과 행동은 어딘가 기이하고 괴팍했습니다. 그런 가족을 참지 못한 이모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외삼촌 중 한 명도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요. 




<타이타닉 Titanic,1997> 영화들 보셨지요. 영화에 보면 상류층으로 마지막 신사도를 발휘해 자리를 양보한 노신사 벤자민 구겐하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의 기념일을 챙기기 위해 승선했다가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신경질적인 어머니는 페기에게 머나먼 존재였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미술관과 여행을 다니며 좋은 취향을 길러 주려 헸습니다. 복잡한 여자관계로 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 딸 셋의 기념일은 꼬박꼬박 챙기던 아버지셨다고 합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후 명문가 여자의 삶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사촌들과의 비교는 페기를 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로 만들고요. 성인이 된 페기는 탈출하듯 미국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전 세계 예술가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았던 파리였습니다. 1920년 파리로 건너간 페기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아웃사이더들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낍니다.  미국에선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여겼던 페기가 보헤미안들로 가득한 파리에 녹아들며 예술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1.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Prometheus>,1930/NYCultrure Beat그림2.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Our Present Image>,1947


그림 3. 토마스 하트 벤튼 벽화, 1930-31/NYCulture Beat





세 그림 모두 잭슨 폴락의 초기 그림에 영향을 주었던 스승들의 그림입니다. 

<그림 3> 폴록의 스승인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 1889-1975)의 작품입니다. 미국 지역주의 화가였던 벤튼은 멕시코 벽화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화면으로 작품을 구성합니다. 잭슨 폴락은 그에게서 큰 화면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능숙하고 재빠른 붓터치를 배우게 됩니다. 






<그림 2> 폴록은 1929년 뉴욕에 가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 시기 멕시코에서 벽화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벽화 운동도 혁명의 일부였거든요.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프리다 칼로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1886-1957)였습니다. 그는 민중봉기 등을 주제로 삼아 거대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디에고와 함께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입니다. 





시케이로스는 1930년대에 뉴욕으로 건너와 벽화 작업을 이어갑니다.  폴록은 시케이로스의 조수가 됐고요. 시케이로스는 깡통에 물감을 담아 캔버스에 쏟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폴록은 생경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케이로스에게 큰 영감을 받게 됩니다. 훗날 그가 캔버스에 물감을 휘갈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건 우연이 아닌 거지요. 







그림1 사무엘 베켓, 페기의 딸 페긴(가운데) 휴양지에서/그림2.마르셸 뒤샹<Fountain>,1917,wikipedia





나는 현대미술에 대한 건 전부 뒤샹에게 배웠다. 




<그림 2.> 페기 구겐하임은  1920년 파리로 이주해 몽파르나스에 사는 화가, 작가들과 교류합니다. 만 레이 (Man RAy, 본명 Emnauel Randitzky 1890-1976),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도 이 시절 친구가 됩니다. 뒤샹은 구겐하임에게 지속적으로 미술 자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뒤샹은 모던 아트에 대해 가르쳐주었죠.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고요. 어떤 작품을 사야 할지를 조언해 주었습니다. 





1938년 런던에서 모던 아트 갤러리 'Guggenheim Jeune'화랑을 열게 됩니다. 프랑스 시인이자 화가 장콕도(Jean Cocteau)의 드로잉을 개관 전에 소개합니다. 이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영국 첫 개인전도 열고요. 이브 탕기 (Yves Tanguy 1900-1955)그리고 신인 작가들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헨리무어(Henry Spener Moore 1898-1986),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1898-1976), 브란쿠시 (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 피카소 (Pablo Ruiz Plcasso 1881-1973),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1963)를 모은 그룹전도 기획합니다. 페기에겐 현대미술의 신화로 추앙받는 마르셀 뒤샹이라는 천재 조력자가 그녀를 돕습니다. 페기에게 좋은 작품을 찍어주기도 하고 아버지, 친구, 그리고 멘토 역할 등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예술가들의 예술가였던 뒤샹과 손잡은 페기는 미술 컬렉터로서 명성을 얻어 갑니다. 'Guggenheim Jeune'화랑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도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사업 수완은 부족했죠. 적자가 심해져 1년 6개월 만에 'Guggenheim Jeune'문을 닫게 됩니다. 대신 페기는 더 큰돈을 들여 런던에 제대로 된 갤러리를 짓기로 합니다. 개관 전시회에 선보일 화가 리스트도 작성했지만, 끝내 새 화랑은 문을 열지 못합니다. 전운이 유럽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편 삼촌 솔로몬 R. 구겐하임은 뉴욕에서 뮤지엄 건립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림 1>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버켓( Samuel Beckett 1906-1989)도 페기구겐하임의 연인이었습니다. 베켓은 1939년 파리에서 작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의 비서로 일하던 중 파티에서 페기를 만납니다.  현대 미술에 박식했던 베켓도 페기에 세 유럽의 옛날 거장( Old Masters)들보다 모던 아트에 집중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림1 <Male &Female>,1942/wikiArt.org그림2. Modern Group Portraits in New York Exile/ 매일경제







<그림 1.>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선이 자동기술법의 호안 미로를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오른쪽에 남자의 형상이 직선적으로 길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으로는 붉은 여성의 곡선으로 드러나고요. 




폴록이 자양분으로 삼은 장르는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플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에게 화두였던 무의식에 집착합니다. 캔버스 위를 걸으며 직관과 충동적 에너지로 이미지를 만들어 낸 폴록의 작업 방식은 초현실주의 화법과 닮아있습니다. 




와이오밍 출신답게 폴록은 인디언에게도 관심을 가집니다. 형형색색으로 염색한 모래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한 서부 인디언의 미술은 폴록의 인상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멕시코, 유럽, 인디언 예술을 골고루 받아들여 융합한 폴록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문제는 폴록이라는 인간 자체가 혼돈의 동의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어려워할 만큼 산만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고요. 폭력성도 짙어 툭하면 싸움을 벌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 아무 데나 소변을 갈기는 난봉꾼이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지만, 부글부글 끓는 폴록의 내면세계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자기 파괴적인 에너지는 그의 삶을 진창으로 끌어내립니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서 만큼은 이 에너지가 창조 원동력으로 작동합니다. 몰입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림 2>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미술 컬렉터들은 미국으로 탈출합니다. 페기는 오히려 서슬 퍼런 파리로 향하고요. 나치에 붙잡히면 목숨도 잃을 수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하루에 그림 한 점씩 사들였습니다. 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구매합니다. 흥정도 필요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난장판 속에서 초현실주의 예술은 장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림 값은 터무니없이 쌉니다. 

피카소 10점, 막스 에른스트 40점, 후안 미로 8점, 마그리트 4점, 만 레이 3점, 달리 3점, 클레 1점, 샤갈 1점... 등 당시 화가들이 그녀가 묵은 숙소에 긴 줄을 선 채 기다릴 정도로 다급했으니까요.





페기는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하려 루브르 박물관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박물관측은 "당신의 그림은 가치가 없다."라며 무시합니다. 그 당시 페기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달리, 마그리트, 자코메티 등의 작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생각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의 처사가 갸웃 뚱하기도 합니다.  박물관측 입장에서 보면  30-40대 젊은 작가들을 연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 그랬나 봅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 주로 미술사로 가치가 있는 작품 위주로 보관이 결정되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덕분에 유럽의 미술이 미국으로 옮겨 가는 행운을 잡게 됩니다. 






나치의 공 세게  거세졌습니다. 페기도 유럽을 떠나야만 했지만, 그림을 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페기는 미국행 선박에 미술품을 싣기로 합니다. 그림을 이불보 사이에 넣어 불바다가 된 유럽에서 탈출시킵니다. 페기와 함께 미국에 온 건 그림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나치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 망명 작전에도 참여합니다.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탈출한 인물 중엔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림1<Mural>,1943/wikipedia그림2 Peggy Guggenheim&Jackson Pollock,<Mural>,1943/Artsy






그림 1. <벽화>는 페기 구겐하임이 집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한 거대한 사이즈의 작품입니다. 몇 달을 빈 캔버스를 바라만 보던 폴락이 하룻밤 사이에 광기의 모습으로 해치웠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그림입니다. 초기 폴락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며 추상표현주의의 문을 연 중요한 작품입니다 주제와 배경이 없이 올 오보 페인팅(all-over paint)으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만큼이나 극적이고 표현적입니다. 





<벽화> 작업 이후 폴락은 페기 구겐하임이 운영하는 <금세기 화랑>에서 1943년 개인전을 갖습니다. 페기 구겐하임은 거대한 크기의 이 작품을 1951년 아이오와 대학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tBEW_7Twrs







주목할 만한 젊은 화가가 있다는 귀띔에 폴록의 작업실을 찾아갑니다. 페기는 처음 폴록의 그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요. 폴록 작품이 아직 추상표현주의로 나아가지 않은 상태였고, 피카소가 개척한 입체주의 화풍 영향을 받은 티가 역력했거든요. 


"나쁘지 않군"


마르셀 뒤샹의 이 말에 페기도 태도를 바꾸고 이 젊은 예술가를 후원하기로 합니다. 페기는 폴록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적한 곳에 집을 얻어줍니다. 매달 일정한 생활비까지 지원하고요.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폴록을 최대한 어르고 구슬리며 예술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금세기 미술관 Art of This Century>/Peggy Guggenheim collection, New York,1942





페기 구겐하임은 남부로 피난 갔다가 1941년 여름 뉴욕에 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금세기 미술관 The Art of This Ceutury Gallery>을 열고 유럽에서 가져온 그림을 선보입니다. 큐비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키네틱 아트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 맨해튼에서 <금세기 미술관> 입체파, 추상화, 초현실주의 작품을 모아 그룹전으로 개관합니다. 오프닝 파티를 했을 때 페기 구겐하임은 한쪽 귀엔 알렉산더 칼더가 만든 귀걸이를 , 한쪽 귀에 이브 탕기가 만든 귀걸이를 달고 나타납니다. 페기는 유럽 화가들 외에도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스코, 자넷 소벨, 클리포드 스틸, 그리고 잭슨 폴록을 소개하게 됩니다. 




페기는 1943년 <금세기 미술관>에서 폴록 개인 전시회를 열어줍니다. 폴록이 뉴욕 미술계에 공식 데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페기의 후광 덕분에 폴록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이 전시회에서 폴록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합니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놈이 다 해쳐먹었어.






데뷔전에 실망한 폴록은 피카소를 존경하면서도 실컷 저주합니다. 피카소는 죽을 때까지 회화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험을 다 했거든요. 폴록은 자신이 발버둥 쳐봐야 피카소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페기라는 든든한 후원자까지 등에 업었지만 폴록의 불안감은 커져갑니다. 





1947년 어느 날 폴락은 이젤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문득 어떤 충동을 느꼈고,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눕히게 됩니다. 폴록은 캔버슬에 물감을 들이부었습니다. 그렇게 현대미술의 신화가 탄생합니다. 





당시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러시아계 유대인 화가였던 4살 아래 아내  '리 크레이스 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도 한 몫하던 때입니다. 그녀 역시 화가였지만 자신의 야망을 접고 '미시즈 폴락'으로 블리며 롱 아일랜드 이스트 햄프턴의 작은 농가로 이사합니다. 폴락의 작품 대부분이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창고 같은 커다란 작업실이 필수였던 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8PQfMd3Vv-g







내 첫 번째 성취는 잭슨 폴록,
두 번째는 아트 컬렉션이다. 
-Peggy Guggenheim-













그림1<넘버 19>1948/wikiArt.org그림2. Peggy Guggenheim /Sleek Magazine




<그림 1>1947년부터 폴락의 이전 작품과는 조금 다른 표현들, 가늘고 굵은 세분화된 선들을 교차시킨 표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뿌리는 기법, 혹은 액션 페인팅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할 때는 무작위적인 표시에 불과하던 기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 생겨나는 시점에서만 우연성을 띨 뿐, 최종적으로는 작가의 고심 어린 결정이 반영되게 됩니다. 





폴락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동부와 서부를 자주 오갔습니다. 그때 보았던 서부의 인디언들이 그린 모래 그림에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캔버스를 바닥에 넣고 휘두르며 물감을 흘리는 작품을 합니다. 





잭슨 폴락의 작품들은 미리 구상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 대부분이 제목에 숫자를 붙여서 구분합니다. <넘버 19>는 다른 작품에 비해 크기가 작지만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없이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서로 엇갈린 화면의 밀도가 깊고 탄탄합니다.






<그림 2>1941년 12월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결혼합니다. 독일출신의 막스 에른스트는 적성국가에서 온 탓에 정부 감시를 받습니다. 본인의 안전과 활동을 위해 독수리 여권이 필요합니다. 페기 구겐하임 역시 잘생기고, 그림 잘 그리고 , 유명한 그의 타이틀이 싫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애정 없는 비즈니스 같은 결혼을 서로 하게 됩니다.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도 힘쓴 페기는 '여성 작가 31인 기획전'을 열게 됩니다. 여성 미술가로만 이뤄진 최초의 전시회였습니다. 하필 이 기획전의 여성 화가인 도로시 채닝과 남편 에른스트가 열애에 빠지면서 결혼 생활도 파경에 이릅니다. 




1946년  남편 막스 에른스트와 이혼한 페기는 이듬해 갤러리를 닫고 작품들을 몽땅 끌고 다시 유럽으로 갑니다. 이번엔 베니스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1903-1970), 아쉴리 고르키 (Arschile Gorky 1904-1948)를 초대한 전시회를 열고 유럽에 이들 미국 화가들을 소개하는데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Jackson Pollock , <Number 1>1950/National Gallery of Art




미술계는 폴록의 그림을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폴록이전에도 추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있었습니다. 칸딘스키가 대표적이지요. 칸딘스키는 회화가 어떤 대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의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피사체 대신 원, 면, 선처럼 순수한 동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은 칸딘스키 그림에서도 최소한 사각형, 삼각형, 원통이라는 도형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Yellow-Red-Blue>,1925 by Wassily Kandinsky/ Wassily Kandinsky.org





폴록의 그림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그는 도형이라는 회화 기초 언어마저 거부하고 물감을 덕지덕지 뿌립니다. 관객들은 폴록의 추상화 앞에서 직관적으로 압도됩니다. 그림 크기가 벽화 수준으로 거대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물감 흔적이 전부인 그림 내용에는 혼란을 느낍니다. 도대체 이 그림을 보고 뭘 느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해석이 필요합니다. 평론가들이 나 설차례지요.




폴록을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errnberg, 1909-1994)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한 비평가 중 가장 영향력이 센 거물이었습니다. 그린버그 머릿속엔 '회화는 회화만의 순수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상향이 있었습니다. 폴록을 만나기 전까지 그린버그에겐 피카소가 영웅이었거든요. 피카소는 원근법이라는 족쇄를 파괴한 혁명가였기 때문이죠. 





현실세계에서 사람을 볼 때 좌, 우,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없지만, 피카소 그림에선 볼 수 있습니다. 조각난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모양새로 말이죠 (큐비즘.) 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엔 어쨌든 피사체가 등장하고 배경도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어느 정도 3차원적인 공간감이 느껴지고요. 그러나 폴록 그림엔 피사체도 배경도 없습니다. 완벽한 평면입니다. 그린버그는 폴록과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예술의 미래라고 선언합니다. 





또 다른 스타 평론가 로벤버그도 폴록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는 그린 버그와 달리 폴록의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 대신 작품을 만들어내는 폴록의 '행위'에 중점을 둡니다. 화가의 고민, 에너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등 예술가의 운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작품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하고요. 독특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 폴록의 작업은 로젠버그를 사로잡습니다.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을 이해하려 했고, 누구의 이론을 적용하든 폴록은 그에게 혁명가로 비쳤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온 힘을 다해  폴록을 영웅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정치적으로 전략적으로 말입니다. 2차 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미국은 유럽 강대국을 제치고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합니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여전히 삼류 취급을 받고 있었죠. 문화 패권마저 쥐고 싶었던 미국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 스타 예술가로 잭슨 폴록을 키우기로 작정하고 집중 조명합니다. 미국 정부도 그의 전시회 개최를 적극 지원하며 폴록의 비상을 돕습니다. 유럽 예술을 한물간 유물로 만들 만큼 폴록의 이름값에 무게감이 커집니다.


 "미국, 너네 문화예술의 역사도 없잖아?"

하며 문화적 불모지로 무시받던 미국입니다.

 "유럽 , 너희들 '땡땡땡 사조' 하며 보이는 것만 그리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고차원적 예술을 해 "

라며 한 방 날리고 싶었던 거지요. 




단기간에 명성을 얻어버린 탓인지 폴록 자신조차도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화가라고 폄하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젤이 아닌 바닥에 캔버스를 두고 마치 춤을 추는 듯 움직이며 작품을 완성시키는 '액션 페인팅'과 그 과정 속에서 페인트를 튀고, 붓는 '드리핑 기법'은 당시 사람들에게 파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액션페인팅을 하는 폴록의 모습/ARTART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할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림과 나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일지 중에서 (잭슨 폴락)-










폴록은 액션 페인팅을 통해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중시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자체의 순수한 의미를 찾으려 했고요.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무의식을 중요시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한 손에는 페인트를,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는 순수한 창조를 위한 무의식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관념적인 예술의 틀을 부수었던 그는 자신만의 추상회화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액션 페인팅'과 '드리핑 기법'의 개념을 완성시켜 다른 추상표현주의 작가들로부터 창의적인 접근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기존의 이젤에 세워지는 서양 전통의 기법에 비해 그림 전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릴 수 있었습니다. 전신을 사용하여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말입니다. 






<The Deep>,1953/Artchive





폴록은 한순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됐습니다. 하지만 피폐한 삶은 그대로였습니다. 폴록의 추상화를 사려고 컬렉터가 줄을 섰습니다. 퍼스널 뱅커가 필요할 정도로 돈도 많이 벌었고요. 하지만 폴록은 창작자입니다.  바닥에 내려놓은 캔버스를 다시 이젤에 올려놓고 새로운 장르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폴록에게 기대한 건 추상화뿐이었습니다. 한때 피카소를 넘어서지 못하리란 공포에 시달렸던 폴록은 이번엔 자신이 쌓은 벽에 부딪힙니다. 자신의 모든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폴락은 점점 술에 의지하게 되고 무절제한 생활로 정신분열이 심해집니다. 





<심연 The Deep>,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면 년 전에 그린 작품입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피폐해진 그는 1950년대부터 색을 피합니다. 이는 폴록의 심리상태를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이자 상징이었던 드리핑 기법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동안의 작품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스타일을 보입니다. 




<심연>이란 제목 때문일까요. 그림의 중심에 위치한 검은 구멍이 우리를 깊은 내면으로 끌어당기는 듯합니다.  폴록 자신이 처한 슬픔을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그의 인생의 변화가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1956, 8월 폴록은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고 엑셀을 힘껏 밟으며 나무로 돌진합니다. 시속 120km로 길가의 자작나무를 들이박고 즉사합니다. (44세)





추상표현주의는 유럽 중심의 미술이 미국으로 옮겨지던 1940-1950년대에 얼어 난 가장 미국적인 미술 양식입니다. 잭슨 폴락의 사망은 곧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고요.  그 자리에 구체적인 형상을 앞세운 '팝 아트(Pop ART)가 피어납니다. 






나는 아트 컬렉터가 아니다.
나는 미술관이다.
-Peggy Guggenheim-





베니스 운하 근처 대저택을 개조해 <페기구겐하임 미술관>을 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미술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성지이지요. 페기는 베니스에서 30여 년을 보냅니다. 1976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베니스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81세의 페기 구겐하임은 자신의 집 정원 14마리의 라사 압소(Lhasa Apso) 애견 옆에 묻혔습니다. 





결국 페기 구겐하임은 1976년 자신의 베니스 집과 컬렉션을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에 기부합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입체파, 초현실주의, 미래파, 추상표현주의 등 20세기 전반 미국과 유럽 미술을 아우르는 중요한 컬렉션이 됩니다. 지금은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있어 그녀의 컬렉션이 주목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K25iL7PfWE





#제목 그림 < Untitled> by Jackson Pollock/ The Guggenheim Museums & Foundation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그림도 많았던 예술 중독자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저 정도면 우리 집 애들이 더 잘 그리겠다' 싶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그림.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지금 미국의 미술계는 여전히 변방으로 현재와 같은 이름값을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새로운 발상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피카소를 모방하기 바빴을 겁니다. 잭슨 폴록은 미국 화단의 콤플렉스를 한 방에 해결해 준 그런 화가인 거죠. 그래서 그의 아이 같은 그림에 엄청난 돈을 주고 모셔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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