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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 ‘헉!‘ & ’ 휴~’

Francis Bacon & Henry Moore



깔끔하게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는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그냥 잘라먹지요. 그러다 큰 팩으로 덩어리감 있는 고기를 손질하다 보면 칼자루 쥔 손이 잠시 머뭇거립니다. 붉은 피가 흥건합니다.  소분해서 먹어야 하니 살덩어리 잘라야죠.  '이 짓을 하면서까지 먹어야 하나.'싶다가 도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은 다른 생명체를 먹고 산다는 자연의 섭리에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로 대응합니다. 쓱쓱 잘라 가족 밥상에 올립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는 잠시 들었던 죄책감을 내려놓게 합니다. 가족들의 입맛 다시는 모습을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제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작품을 만났을 때 들었던 첫 느낌입니다. 놀랍고, 기이하고, 고통스럽고, 그리고 조금은 보기 껄끄러운 그러나 다시 보게 되는 그런 그림이지요. ' 이 화가는 붉은 고깃덩어리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걸까? ' 아름답고 고상하고 눈을 즐겁게 한턴 이전의 그림들로부터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추상까지는 어떻게 봐주겠는데 그림이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린 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어디에서 위안을 찾으라는 것인지...



똑바로 서 있는 직선형의 조각들이 헨리 무어(Henry Noore 1898-1980)의 손길을 타고 눕기 시작합니다. 수직의 고압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수평이 되며 조금 편안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구멍까지 뚫어 놓으니  뚫어 놓은 공간 안으로 바람도 드나들고 주변 환경이 고스란히 들어옵니다. 작은 부분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그 느낌은 천지 차입니다. 딱딱한 우리 뇌를 말랑하게 만들어 주면서 말입니다. '아, 저럴 수도 있구나! '


오늘은 매운맛( Francis Bacon)과 순한 맛(Henry Moore)을 한번 섞어 보겠습니다.








그림1.아일랜드 , 더블린/123RF 그림2. 영국 요크셔 지도 / RULIWEB



<그림 1>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아일랜드 출신입니다.  어릴 적 동성애적 성향을 들켜 아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하인을 시켜 채찍질을 시켰다고 해요. 16살 때 아버지는 아들 베이컨을 삼촌들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쫓아냅니다. 오히려 쫓겨 간 베를린에서 베이컨은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런던 최고의 부유층이 살고 있는 사우스 켄싱턴 지역에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10여 년간 짬짬이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 2>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는 영국에서 가장 외지고 추운 요크셔 출신입니다. 12살에 이미 조각가의 꿈을 키워가지요. 광부였던 아버지는 그가 선생님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꾸리기 바랐습니다. 아버지 희망대로 잠시 교사 생활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으로 자원입대합니다. 최전선 전투에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부상을 당하고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 다시 영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림1.<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1944/나무위키2.<reclining Figure>Christie's





<그림 3> Mathias Grunewald <The Mocking of Christ>,1503-1505/wikipedia





<그림 1.> 베이컨이 화단에 공식적으로 진출한 작품입니다.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1944) 작품은 베이컨이 실제로  10여 년간 작업한 작품들의 결과물 같은 작품입니다. 연습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없애고 10여 점만 남겨놓은 초기 작품입니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기괴한 생명체가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붉은 배경은 생명체의 상황을 더 비참하게 보여주는 듯하고요. 대부분의 관람자들이  베이컨의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작가그룹은 "와우"하며 감탄사 연발이었고요. '도대체 화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린 것일까?' 하며 보는 이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작품은 대성공입니다. 한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비주얼이지요. 이 작품이 화가로서 베이컨을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한 평론가는 베이컨 그림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나뉜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인 그림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캔버스 3개로 구성된 3부작입니다. '삼면화'는 오랫동안  종교화를 그릴 때 쓰던 방식입니다. 베이컨은 이 삼면화를 통해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종교적 의미보다 인간의 개인적 고통과 보편적인 운명의 필연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시체에서 그 영감을 얻었습니다. 수천만 명의 죽음, 핵폭탄 투하, 홀로 코스트 등으로 세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시대에서 살았습니다. 이때부터 베이컨은 공포와 비명, 분노, 타락 등의 악몽 같은 이미지들을 강렬하고 그로테스크 (grotesque)하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세 개의 화폭에 담아낸 슬픔, 공포, 분노의 감정 표현들은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림 1>에 대한 평론은 다양합니다. 보는 이마다 마음에 와닿는 느낌도 다를 테고요. 그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작품 제목에서  힌트를 찾아봅니다. 제목을 보면 분명히 십자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찾을 수 없어 더 당황스럽습니다. 유럽 도시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정서가 기독교 지요. 그들의 삶 속에 기본적으로 녹아있고요.




의아해하실 분들을 위해 <그림 3>을 덧붙입니다. 붕대에 가리어진 예수님이 끌려가는 장면이 보이시지요. 베이컨의 세 개의 그림 중 가운데 부분을 보면  붕대를 두른 생명체가 보입니다. 베이컨은  종교적 의미 보다 당시 어떠한 이유로든 십자가형을 받게 된  당사자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왼쪽 그림의 침울한 생명체의 모습이 마치 가족 같기도 하고 지인들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오른쪽 입을 쫙 벌린 생명체의 모습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절규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요. 십자가 형벌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통쾌해 할 수도 있지요. 아무튼 베이컨의 이 작품은 강렬한 오렌지 색과 함께 알 수 없는 괴 생명체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관람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습니다.  





<second version of Triptych 1944>,1988/Alamy




40년이 지난 1988년 같은 주제로 두 번째 버전이 발표됩니다. 1988 <second version of Triptych 1944>,1988/Tate. 거장답게 첫 번째 작품보다 크기가 훨씬 큽니다. 색깔도 매끈하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요. 의인화된 기괴한  생명체의 모습도 원본보다 훨씬 날씬해진 모습입니다. 전체적으로 세련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베이컨이 첫 번째 그린 다소 거친 느낌의 순수함이 담긴 청년시절 작품을 더 선호한다고 하네요.





원본과 두 번째 버전 모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울부지는 듯한 입모양은 쉬이 잊히지 않고요. 인간이  아주 극단적인 고통에 처할 때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요. 어른이 된 우리는 울고 싶고, 절규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쉽사리 표현하지 못합니다. 삶고 죽음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입모양 묘사는 베이컨에게 굉장히 핵심적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파리의 오래된 서점에서  1894년 독일 의학서적으로 만들어진 <구강질환의 아틀라스 매뉴얼'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입모양 연구에 더 파고들어 만들어진 형상인 거지요. 베이컨은 더 깊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입모양을 제대로 사용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워있는 형태가 가장 자유로우며, 종합적이고, 공간적이다.
그리고 와상 즉 누워있는 사람은 어떠한 표현에서도 눕힐 수 있다.
또한 자유롭고 견고하고 영속적인 조각이라는 이념을 갖게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









<그림 2>. <기댄 형상 축제(Reclining Festival,1951)라는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0) 작품입니다. 여인의 상반신은 서 있는 듯하면서도, 하반신은 누운 듯한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 운상태가 상징하는 죽음과 서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삶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40년 영국 예술위원회 의뢰로 시작됩니다. 2년 후 예정된 대형 문화축제 행사장에 설치하기 위해서였죠. 이 축제의 100주년 기념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최신식으로 지어진 전시회장 입구에 설치될 작품이었습니다. 위원회는 가족상을 의뢰했지만, 무어는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형상을 제작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인물상이면서 동시에 자연 풍경 같은 독특한 형태가 '사람과 땅의 관계'와 영국의 농경 역사를 보여주려는 행사 취지에 잘 맞아떨어져 큰 문제없이 설치가 이뤄졌습니다.






무어는  1920년대 후반부터 기대어 누운 형상에 대해 탐구해 왔습니다. 이 주제를 다룬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기댄 형상:축제>는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20여 년이 넘는 선구적인 탐험의 성취를 보여주는 궁극의 결과물인 셈이죠. 예술적, 기술적 성숙의 절정을 증명하는 이 청동 조각은 1951년 제작 당시 그의 기댄 형상 가운데 가장 율동적이고 선적인 형태를 띤 것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시도에 해당합니다. 또한 2m가 넘는 크기로 기댄 청동 조각으로는 가장 컸습니다.






 오늘날에는 빈 공간이 포함된 물결치는 듯한 양식이  모던 조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당시에는 저항감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 문화 축제 이후, 보수 성향 지역으로 옮겨져 설치 됐을 때 파란색 물감으로 조각 전체가 지저분하게 덮인 적이 있습니다. 1956년 원상회복 후, 이 작품은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에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총 6개 에디션 가운데 나머지도 테이트 미술관,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중  유일하게 개인 소장가 손에 남아 있던 한 점이 2016년 6월 30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 출품돼 2400만 파운드 (약 360억 원)에 판매됩니다. 이는 무어의 작품 중에서는 물론, 영국 조각가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경매 기록에 해당됩니다.  




무어가 유기적인 선만 남기고 세부묘사를 제거하여 원초적인 생명력을 한 층 강조하게 됩니다. 그가 기댄 형상을 선호한 것은 서 있거나 앉은 형상보다 안정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 무엇보다 구성과 공간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창작의 자유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 기댄 형상:축제>가 보여주듯 전통을 깨는 급진적인 시도를 가능케 하면서 모순되게도 가장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형태에서 발견되는 조각적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그가 선보인 또 다른 획기적인 발명은 조각 표면을 따라 나타나는 율동적인 패턴에 기하학적 선을 더한 점입니다. 이를 통해 여성의 가슴과 머리 같은 신체 부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냅니다. 기대어 누운 여인이 곧 산과 계곡, 동굴, 절벽이나 율동적인 형태가 신체인 동시에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이 작품에 대해 무어 자신도 '형태와 공간을 조각적 융합하는 데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이라며 자신의 전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과로 평가했습니다.













1.<The Scream>,1895/wikipedia 2.<전함 포템킨>,1925/씨네 21





<오데사의 계단>/SBS뉴스






베이컨은 런던에 정착합니다. 이 시기에 베이컨에게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콘텐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뭉크의 '절규'작품입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작품 속 인물은 입을 벌린 체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 베이컨이 표현하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 또한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베이컨 작품 속 인간의 부정적인 내면 심리 표현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하나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 1898-1948)의 영화 <전함 포템킨, 1925>입니다.  그가 <전함 포템킨>에 서 본 것도 결국 고통이었습니다. 이 작품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추앙받는 신이 하나 있습니다. <오데사 계단 신>으로 불리는 장면인데, 영화 몽타주 기법 교과서로 평가받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계단에서 학살당하는 가운데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위태롭게 계단 위를 데구루루 굴러가는 장면입니다. 이신에서 총에 맞은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컷이 등장합니다. 베이컨은 입을 벌릴 채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내 그림들은 인간 본성이 그림을 통해 관통되듯,
인간의 현존과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남기듯,
달팽이 한 마리가 점액을 남기며 지나가는 듯 보였으면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3.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650/ 위키백과 4. <Seated figure>,1960/Mutual Art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코 <Nose of liar>/www.donga.com








베이컨의 회화에  이중적 성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재현적이고 상투적인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납니다. 베이컨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이미지는 전통의 부정을 통해 창조됩니다. 기존에 익히 봐왔던 이미지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섞어 재 해석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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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거장들은 그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줍니다. 특히 베이컨이 자신의 유명한 시리즈인 <소리치는 교황들>의 기초로 사용했던 디에고 벨라즈케즈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1650>(그림 3)입니다. 그는 벨라스케스의 교황 그림을 수도 없이 재해석하고 해체시킵니다.






거장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님의 초상화에는 권위와 위엄이 느껴집니다(그림 3). 반면   베이컨이 그린 교황님은 어딘가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 다소 기괴함이 느껴집니다(그림 4). 교황님의 거칠고 야망 있어 보이는 다소 성깔 있어 보이기까지 한  무언가를 베이컨은 읽었던 걸까요. 알베르트 자코메티의 사각의 링을 작품에 빌려옵니다. 마치 절규하는 모습을 시각화한 것처럼 위아래로 쭉쭉 뻗은 노란 선들이 찔릴 듯이 다가옵니다. 1946년부터 시작된 베이컨의 두상 연작은 이후로도 이어집니다.




  

베이컨은 살아 있는 모델과 일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절친의 초상을 그릴 때마저 사진을 보면서 그렸으니까요. 또한 새로운 작업에 들어갈 때면 먼저 책이나 잡지에서 사진을 찾아보고는 했습니다. 베이컨의 가장 유명한 연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황 초상화 연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실제 작품이 아니라 예술 서적에 나온 인쇄본을 참조로 한 것들입니다. 일부러 원본을 보기 위해 그랜 튜어를 떠나기도 했던 이전과는 많이 다른 행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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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lexander Archipenko,<Blue Dancer>,1913 2. 콘스탄틴 브랑쿠시<Danaide>/ART UK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0)에게 영향을 주었던 작가들의 작품입니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닐 테니까요.  무어(Moore)의 뛰어난 학습 능력과 초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특히 아르키펭코(Aleksandr Archipenko)와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영향이 컸습니다. 동시에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프리 콜롬비아의 원시 미술도 그의 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르네상스 마스터들인 미켈란젤로(Michelandelo di Lodovico Buenarroti Simoni 1475-1564), 지오티 디 본도네(Giotto di Bondore 1267-1337), 지오반니 피사노(Giovanni Pidano 1248-1315) 같은 조각가들의 작품 또한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Tube Shelter Perspective>,1941/Tate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무어(Moore)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전쟁화가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독특한 기념비적인 그림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의 폭격 때문에 런던 지하도에 시민들이 대피하여 생활하는 모습을 그만의 해석으로 표현합니다.





무어(Moore)는 1차 대전 때 젊은 병사로 2차 대전 때  종군화가로서 고통받는 서민과 노동자의 삶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무어의 삶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버지와 같은 광부의 삶이 무척이나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방공호> 시리즈 데생 스케치 작업은 헨리 무어의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이 됩니다.




인체의 형상을 왜곡하고 조각에 급진적인 새로운 형태를 도입하긴 했지만, 무어는 전통적인 조각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작품들에 인간성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공습 때문에 런던의 지하철역 대피소로 대피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의 드로잉들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s6BE7uNRnw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공포의 미학을 거론하다.-






< 고기와 남자 형상 Figure with Meat>, 1954/Counsellingsteps.co.uk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 1989>에 보면 미술관에 쳐들어 가 드가, 렘브란트, 르누아르 그림을 마구 훼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조커가 한 그림 앞에 멈춰서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 이건 마음에 들어 , 내버려 둬."


핏물 가득한 고깃덩이 사이에 한 남자가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입니다.




베이컨의 도살장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베이컨의 작업실에서 발견된 자료들 중에는 잡지 <다큐멘트>를 비롯하여 다른 잡지 등에서 오려낸 도살장 사진들 뿐만 아니라 렘브란트(Rembrant Harmensz 1606-1669)와 러시아계 프랑스 화가 '카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의 화집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이컨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특별한 배경 묘사 없이 얼굴이 고깃덩어리 형체로 묘사합니다.  아니면 심하게 뭉개져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왜곡시켜 표현할 때도 있고요. 언뜻 보면 1950-60년대 지배하던 추상화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붉고  검은 배경으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묘사가 주를 이룹니다. 마치 도축당한 동물의 사체가 걸려 있는 듯한 느낌으로 말이죠. 생명이 사라진 인간의 육체는 바로 도살되어 정육점 등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의 형체들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베이컨은 고통받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생명의 유한성도 보았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더해져 '고통'이란  테마에 더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옆으로 누운 사람>/조선일보




무어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도난이나 파손이 높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고철은 자체가 제품이며 원료가 되지요. 한 때 고철 품귀현상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도둑들이 설치게 되지요. 그들의 절도행각도 천태만상입니다.  이 청동 조각상은 시가 520만 달러 (약 52억 원)로 런던 북부 허트포드셔 소재 헨리 무어 재단 건물 정원에서 도난당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3명의 도둑이 트럭 두 대를 동원해 이 조각상을  훔쳐 달아났다고 전합니다. 제일 안타까운 점은 도둑들이 작품을 녹여 고철로 팔아버린 경우입니다. 실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엄청난 미술품이 녹아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죠.





 2012년  작품을 훔친 두 명의 범인이 징역을 살게 되기도 했습니다. 글렌클린 조각공원의 시가 46억짜리 <서 있는 여인>도 도난당하는 사건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그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공공 공원이나 야외에 자신의 조각품들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는 한 이런 종류의 도난과 파손사건은 계속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야외 대형 조각들이 지닌 가장 힘든 부분 아닐까 싶습니다.









1. <방안의 있는 인물>,1962/www.mycelebs.com 2. <루시안 프로이트>,1969/NYCulture Beat








<그림 1> 이건희 컬렉션 중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 < 방안에 있는 인물, 1962>입니다. 창문도 없고 문도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성소수자로 늘 주변인으로 살아갔던  베이컨 본인의 경험까지 더해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주로 나체의 남성을 자주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인의 각박한 삶을 표현하려 했지요.  베이컨이 수많은 전통 화가들의 작품과 사진 일러스트 등의 이미지를 참조하여 작업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나마 그가 참조한 이미지는 베이컨만의 방식을 통해 변형되고 재창조되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만들어집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듯이  참조는 하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또한 베이컨은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키기 위해  그 이미지들 위에 즉각적인 붓 터치와 물감 표현, 비구상적인 표시들로 구상성을 지워나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베이컨의 작품에서 이미지의 구상성과 추상성이 혼재하는 양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림 2> 베이컨이 그린 절친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 1922-2011)의  초상화입니다.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입니다.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릅니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조차 힘듭니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또 다릅니다.





정지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 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독특함입니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 '시킵니다.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킵니다.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했다고 설명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동시대 작가인 루시안 프로이트는 몸을 그리는 화가인데 서로 절친이었습니다. 라이벌이기도 했고요. <루시안 프로이트 습작 3부작>은 20세기 거장이 화가이자 모델로서 그려 낸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노란색을 배경으로 한 습작은 베이컨의 노련한 붓질로 의자에 다양한 프로이트의 모습을 역동적인 앵글로 포착합니다. 프로이트의 발, 무릎과 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이전 그림에 비해 덜 기괴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편안한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 습작 세 점은 1970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된 후 15년간 흩어져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을 소장한 로마의 콜렉터가 3부작을 모두 구입하기 위해 20여 년을 소요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초 파리의 딜러로부터 중간 그림을 구입한 후 80년대 말 일본의 콜렉터로부터 오른쪽 그림을 사서 3부작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201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한화로 약 1800억 원에 낙찰됩니다.


 









삼면화 Tripthch <Three Studies for Portrait of George Dyer>/Pinterest







베이컨의 연인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은 조지 다이어(George Dyer)입니다. 둘은 1960년대 중반에 만났습니다. 60년대 영국에서도 동성애가 불법이던 시절이었지요.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 집에 든 좀도둑이었습니다. 둘은 어쩌다 보니 연인 관계로 발전했죠.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 못지않게 자기 파괴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베이컨이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면 서슴없이 자해하며 관심을 받으려 했습니다. 결국 사건이 터졌습니다. 베이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던 조지 다이어는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1971년 자살합니다. 파리에서 베이컨 회고전이 열리기 직전이었지요.






 인체의 이미지를 '뜯어내어'재구성하는 베이컨의 화법은 얼굴을 그릴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베이컨의 연인이었던 조지 다이어의 초상화는 이목구비에 산 (acid)을 부어 반쯤 뭉그러뜨린 후 붓으로 얼굴을 재구성한 느낌을 줍니다. 폭력이 가해진 신체처럼 찢기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멍들고 긁힌 피부의 생채기를 솔질로 표현한 듯하고요. 얼굴 곳곳에 핏자국 같은 빨강이 퍼져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왜곡된 형상이 대상과 기묘한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재현과는 거리가 먼 닮음이지요. 베이컨의 이러한 회화적 특징은 한 때 그를 전통적인 구상 회화의 명맥을 잇는 화가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이컨은 이와 같은 분석들을 모두 거부합니다. 어떠한 범주에도 속하기를 꺼려하고요. 이러한 이유로 베이컨에 대한 미술사적인 연구는 주로 전기적인 관점에서 또는 베이컨 본인과의 대담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0bJwkarhE8










1. <Family Group>,1949/Tate 2. <The Arch>/motionbodywork.co.uk




헨리 무어의 작품 <가족>입니다(사진 1). 그가 딸을 얻고 만든 작품이라고 해요. 단단하고 차가운 돌 위에 유대감으로 굳건한 가족의 사랑을 오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은근하며 깊은 사랑을 영원성으로 승화시킨 듯합니다. 헨리 무어는 기존의 보수적인 영국 조소의 작업 방식이나 조형적 가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인체나 조소의 아름다움을 찾았습니다.



사진 2. < 더 아치  The Arch>는 뼛조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내부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생명체의 근본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헨리 무어)"


 혹자는 스톤헨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치의 여러 버전 이 있습니다. 재료는 화이버글라스입니다(사진 2). 스무스한 면이 있는가 하면 긁힌 부분도 있습니다.  당시 무어는 사람이 지나다니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상징적인 대형 조각물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약 6m 높이로 그전까지의 누워있는 여인상 등 바라만 보는 조각물에서 탈피하기 시작합니다.









조각은 야외의 예술입니다.
햇빛이 필요하며
제 조각에게 필요한 가장 좋은 환경은 자연입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아름다운 건물 안 보다는
어디든 바람과 햇빛이 풍성한 풍경에 놓은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 헨리 무어-









<세 개의 부분을 위한 작업 모형 3번 :척추>,1968/ Alibaba




무어(Moor)는 동물의 뼈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유기적인 곡선과 직선미 그리고 뼈의 안과 밖으로 이어진 조화로운 시각적 공간에 몰입하면서 말이죠. 이후에도 그는 나무, 돌, 조개껍질 같은 자연물과 풍경에서 예술적 영감을 추구하곤 했습니다. 자연물에 영감을 얻어, 언덕과 동굴의 풍경을 닮은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세 개의 부분을 위한 작업 모형 3번 :척추> (1968)는 헨리 무어(Henry Moore)의 후기 작품 중에서 대표작입니다. 여러 개의 부분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총길이 2m가 넘는 크기의 추상 청동 조각으로 2012년 2월 7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약 500만 파운드 (약 75억 원)에 판매된 적 있는 작품입니다.




그가 평생 탐구해 온 비스듬히 누운 형상이 공간적, 형태적, 유기체적 변형을 통해 더욱 추상적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줍니다. 얼핏 보면 추상 조각으로 보이나 자연의 일부인 인체 척추뼈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입니다. 이에 대해 무어는


 "추상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전부 유기적 형태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분리된 몇 개의 부분이 하나의 형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을 조각에 도입해 추상적이면서도 고대 유물 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PuqDJADlLA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은 20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 후배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의 그림은 <엘리펀트맨 Elephant Man>(1980) 영화를 통해 흉측한 외모 때문에 조롱받는 '기형인간'의 슬픔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 2010>에도 베이컨 그림이 의미심장하게 등장하지요. 후배 작가들에게 '우와~'하며 스타일리시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베이컨의 시선 강탈하는 작품들과 자신의 조각을 그가 만든 재단을 통해 전 세계에 기부하기 시작하며 사회주의적 공유에 관심이 많았던 헨리 무어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예술가 모두 영국 왕실의 작위를 거부했을 만큼 자신의 정체성이 남달랐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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