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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디 Mar 13. 2024

타인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인지적 귀찮음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서로와 엮여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세상에 똑같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유전자가 정확히 같다고 말하는 쌍둥이들조차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른 것을 우리는 실제로 관찰할 수 있다. 


즉, 타인과 어쩔 수 없이 엮이면서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주는 직간접적인 영향을 끊임 없이 받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얘기로 서론을 시작하냐면, 근래에 친구와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때에 내가 느낀 불편함을 토로하기 위함이다. 또 오늘 점심 혼자 요리를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서 하소연 반 생각정리 반의 느낌으로 글을 적어내려 한다. 



최근에 2박 3일 동안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다. 애초에 여행 경험이 적고, 근래에 다녀왔던 여행들은 모두 혼자서 다녀왔었기 때문에 해외로 가는 친구와의 여행이 상당히 기대가 되는 상태였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재미있었다. 좋은 경험이었고 갈만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분법적인 좋다/나쁘다로 끝나지 않는다. scale(정도)의 측면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으며, 나에게 이번 여행의 만족감에 대해서 점수를 매겨보라고 말한다면 나는 75점 정도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렇다면 왜 100점이 아닌 여행이라는 결론이 나왔을까? 왜냐하면 이게 혼자 다닌 여행이 아닌 둘이 다닌 여행이었기 때문이며, 친구와 나와 여행 중 다툼이 있지는 않았을지언정, 상대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어느정도의 피로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다니는 여행이 더 나은 여행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형태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다르더라. 장단점이 다르고 장르가 다르다.)

여행지에서 내가 내리는 선택들은 분명히 상대의 존재에 영향을 받는데, 친구가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호불호를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굉장한 피로감을 줬다. 대부분의 결정적인 선택들은 내가 내렸다. 즉, 일정에 있어서는 내가 leader의 역할을 맡은 것에 가까웠는데 친구의 호불호를 고려해야했기 때문에 편하지가 않았다. 결정적인 선택을 내리려고 하지 않으면서, 내가 내린 결정들에 대해 자신을 고려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상대는 솔직히 피곤했다. (정도가 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나라는 사람은 최대한 상대에게 맞춰주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상대가 리드를 한다면 전적으로 따르는 타입의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 친구는 별 다른 계획도 없었고 여행에 신경쓰는 것도 귀찮아했으며 내가 내리는 선택들을 대부분 따라오면서도 동시에 분명한 자기주장을 하는 상대였다.


나는 선택에 고민을 하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빠른 선택을 내리면 그에 대해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둘이서 하는 활동은 나의 일방적인 선택이 가능하지 않다.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서 상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추가 된다. 나도 상대가 자신의 목소리 없이, 자신만의 욕구를 죽이고 마냥 따라다니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지만, 태클의 빈도수가 높아질수록 피로감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뺀찌를 놓았다면, 본인이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거나 힘이 들고, 내가 내린 결정들을 승인하는 '상관'의 입장을 고수한다는 것을 얼마나 편하고 쉬운 일일까 싶다. 



또 하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친구가 여행 중 갑자기 토라져서 나의 표정을 지적하는 일이 있었다. 요지는 내가 힘들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실제로 육체가 힘들었을 수는 있겠다만 머릿속으로는 피로하거나 짜증난다는 생각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그런 지적을 받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화를 시도하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했는데, 친구의 지적질이 나온것 조차도, 갑자기 토라져서 날카로워져 있는 친구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 말을 꺼냈을 때 그제서야 대답을 해준 결과였다. 

즉, 본인이 나의 표정을 보고 스스로의 망상 속에서 어림짐작해서 기분이 나빠져 나에게 공격적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나는 그럴 의도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의 망상은 나의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사실 그 순간의 스트레스가 엄청 났다. 게다가 대화를 좀 더 나눠보니 그제서야 토로하는게 사실 그의 짜증은 나로인해 발생한 것 조차도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다른 친구를 위한 물품을 사기 위한 소통과정에서 급격한 짜증이 발생해 그 불만이 바로 곁에 있던 나에게 전가된 것으로 나는 분석한다. 

이 경험이 나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다. 1차원적으로는 '아 사내새끼가 왤캐 기지배 같이 혼자서 망상하고 짜증질 내고 지랄이지'라는 감정적 평가질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이성과 대화로 푸는 것이 아닌닌 자체적인 결론과 감정을 토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고 그것이 내 친구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본인은 스스로를 이성적인 입장에 놓는 친구였다), 삶을 관조하는 입장에서는, 역시 머리가 2개 모이면 피곤하구나,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의 친밀도와 상관없이 마찰을 발생시키며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주는 간접적인 피로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관련해서, 오늘 점심에 혼자서 제육볶음을 만들며 유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나홀로 집에 있어 내가 원하는 레시피대로 제육볶음을 만들었는데, 내가 돼지고기와 양파를 제외하고 추가로 넣은 일반적이지 않은 재료로는 느타리버섯과 얇게 채썬 샐러드용 양배추가 있었다. 

동생이 있는데 동생은 음식을 혀로 느끼는 것 이전에 눈(시각정보)와 머리(본인의 망상)으로 먼저 먹는 타입인데 전형적인 제육볶음에서 거리가 먼 재료를 넣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문득떠올랐다. 즉, 그녀와의 식사 자리였다면 나는 애초에 요리를 할 때 느타리버섯을 넣을 시도도, 양배추를 넣을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험적인 행위들을 상대가 선호하지 않는다는 지식이 입력이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녀의 존재가 직접적인 언어적 의사표시 이전에 나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점심에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나의 자유의지대로 즐겁게 요리를 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홀로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의 관계, 친밀도, 애정도와 무관하게 그 존재만으로 주는 피로감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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