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단 둘이 떠난 7세 꼬마의 '오사카' 여행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지환이는 무언가 대구나 광주도 아닌 부산스러웠다. 꽤 오랜 기간 몸담으며 마음의 평화를 느껴온 어린이집을 벗어나야 한다는 어떤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그럴싸해 보이지만 아니다. 지환이의 불만은 세 살 어린 동생 려환이었다. 얌전히 누워서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동생은 어느새 최대 위험요소로 성장했다. 좋게 말하면 아장아장 걷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런 불안불안 걸음도 없다. 차라리 말을 못 할 때는 이해가 될 텐데, 이제는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떠들고 듣지는 않는 동생. 그래, '미운 네 살'이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천방지축 4살 려환이를 더 신경 써 주는 수밖에... 그렇게 엄마, 아빠가 려환이를 먼저 챙기는 사이, 지환이는 조금씩 마음에 생채기가 더해갔다. 그래도 가족이고, 그래도 동생이고, 그래도 귀엽기도 하니까 려환이와 잘 지내려 노력하는 형님도 한계는 분명했다. 천방지축 동생을 살짝 꼬집어도 보고, 꿀밤도 먹여보고, 나름의 화풀이를 해보지만, 뭔가 속상했나 보다. 려환이가 울음이라도 터진 때면, 여린 마음 지환이는 미안함에 덩달아 눈물을 쏟아냈다.
엄마랑 려환이는 같이 안 가?
특히 아빠가 미웠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형님이 이해해야 한다고 얼마나 이야기를 하는지, 어느 날 지환이 귀에서 피가 나는 거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좀 너무 하긴 했다. 조금씩 눈에 보이는 불만의 지환을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 동생과 분리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 아빠와 유대감 증진, 초등학생으로서 형님 마인드 강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택은 여행이었다. 엄마, 동생은 뺀 아빠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이다. 확실한 분위기 전환을 위해 국내가 아닌 해외로 떠나자. 지환 핑계로 아빠도 비행기 좀 타보는 거다. 너무 긴 여행은 아빠도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가능하면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7세 꼬마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있어야 함은 당연할 테다. 그래, 일본 오사카로 결정했다.
오사카는 인천 기준으로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 주요 여행지가 특정 지역에 집중돼 있다. 미디어에서 자주 접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유니버설스튜디오'가 존재한다. 음식이 한국 음식과 비교해 아주 이질적이지는 않다. 편의점 문화가 발달해 한 끼 적당히 해결하기도 편하다. 치안이 한국 수준으로 좋은 편이고,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어라, 이상하다. 유니버설스튜디오만 '디즈니랜드'-'디즈니시'로 바꾸면, 도쿄와 다를 바 없지 않나? 맞다. 사실 도쿄를 가도 됐지만, 아빠가 유니버설스튜디오를 가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안하다 아들아. 그냥 오사카가 도쿄보다는 가까웠다. 하하...
7세 꼬마는 공항으로 향할 때부터 흥분 상태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그래도 엄마 품에서 떨어지는 건데, 그저 신이 난 모양이다. 함께 여행하고 엄마와 동생을 뒤로하고, 오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법 여행을 해본 터라 익숙한 지환은 바로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더니, 컵라면이라도 먹을까 뒤적뒤적 고민을 하더니, 이내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분명 신나게 여행하는 꿈일 텐데... 실제는 혹시 괜히 아빠 따라 여행하느라 고생만 하고 돌아가는 건 아닐까. 초등학교 입학 말고 중학교 입학할 쯤이었어야 했는데, 너무 서두른 걸까. 아니다, 지금이라서 가능한 여행이다. 재미난 추억 잔뜩 만들자. 저 많은 맛집이 기다리고 있잖아. 온갖 잡생각에 어질어질, 아빠도 스르륵 잠이 든다.
푸른 하늘을 기대했지만 비가 내린다. 일단 지하철 표를 끊고 오사카 도심으로 향했다. 그래도 유니버설스튜디오를 찾아가는 내일은 날이 갠다고 한다. 비 내리는 날 우산 쓰고, 7세 어린이와 테마파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 텐데, 다행이다. 평소에 덕을 좀 쌓긴 했나 보다. 하하... 그런데 우산이 없네. 털썩. 지하철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달려가 우산을 사려는데, 고민이 된다. 지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해야 하나. 같이 뛰면 홀딱 젖을지도 모르는데, 어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빠 마음을 읽은 건지, 아빠 손을 부여잡은 지환이 손에 힘이 더해지더라. 달려! 첨벙첨벙 신발도 옷도 다 젖었지만,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빠와 지환은 깔깔 웃었다. 귀여운 캐릭터 우산은 덤이다.
자, 이제 숙소를 찾자. 공유숙박 사이트를 통해 예약한 곳인데, 설명이 너무 부실하다. 요즘이야 익숙한 공유숙박이지만, 10년도 더 전에는 그렇게 엉망일 수가 없었다. 혹시 사기라도 당한 거 아닌가. 날이 저물었고 비까지 내리는데, 제발 좀 튀어나와라 숙소야... 한참을 헤매다 주인장과 연락이 닿았다. 주소 숫자를 잘못 기입했다고 미안하다고 하네. "야, 이 %#$@&%$#&...." 상스러운 말 좀 해주고 싶었지만, 영어도 일어도 쉽지 않더라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해 꾹 참았다. 애도 옆에 있고.
와, 아빠도 설거지 잘하네?
정말 좁디좁은 방이었다. 아이와 둘이서 지내 좁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저렴한 가격에 간이 주방도 마련돼 있는데, 차라리 주방이 없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울부짖었다. 그래도 끝없이 생글거리는 지환의 기분을 망칠 수는 없다. "방이 좀 좁아서, 아빠랑 꼭 껴안고 잘 수 있겠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지환이가 기대 이상으로 사랑스럽다. 이제, 꼬마에게 맛난 식사를 제공해야지. 저녁 메뉴는 미역국과 카레밥이다. 무려 한국에서 밀수(?)해 온 보글보글 즉석 미역국에 즉석 카레가 출동한다. 여기에 일본 현지 편의점에서 마련한 즉석밥까지, 바야흐로 즉석의 시대다. 한일공조에 지환은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래도 엄마가 해준 밥이 더 맛있다고 툴툴대기는 했지만... 설거지하는 아빠를 향해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는 설거지하는 방법을 모르는 줄 알았다더라.
깜빡하고 있던 오사카 선택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대관람차. 언젠가 장난감가게에서 본 대관람차를 지환이는 너무나도 타고 싶었다. 요새야 한국에도 대관람차가 은근히 많아졌지만, 10여 년 전에는 대관람차 찾기가 꽤 힘들었다.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놀이동산에 꽤 있었던 것 같은데, 대관람차도 유행을 타는 걸까. 저 유명한 런던아이를 위해 유럽까지 갈 수도 없고, 오사카에서 본 대관람차가 '팟'하고 떠올랐다. 지환에게는 비밀로 하고 대관람차로 향했다. 장난감가게에서 본 것처럼 커다랗지 않았고, 도심 한복판에 있으니 전망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깜짝 방문에 지환이는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엄청난 희열을 공유하고 싶었나 보다. 다음에 꼭 같이 타자는 영상편지를 엄마와 려환에게 남겼다.
유니버설스튜디오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오랜 시간 줄을 서지 않기 위해 거액을 들여 '패스트 트랙'을 구매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빠를 닮아 청룡열차 롤러코스터를 무서워하더라. 게다가 해리포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두컴컴한 호그와트성은 그저 공포 그 자체였다. 살아 움직이는 액자를 보고는 끝내 참던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난도가 낮은 어트랙션으로 지환을 토닥이고, 기념품 쇼핑으로 달랜다. 쇼팽을 좋아하는 지환이지만, 쇼핑도 좋아한다. 귀여운 캐릭터들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지환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려환이를 위한 선물을 잔뜩 주워 담는다.
저 멀리 엄마와 려환이가 보인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듯 달려가 서로를 부둥켜안는 가족. 잠시 떨어져 지낸 사흘간 서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다가 밤이라도 새울 기세다. 지환이는 아빠가 끓여낸 맛있는 미역국 이야기, 둥글둥글 대관람차 이야기,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만난 어흥 공룡 이야기에 신이 났다. 선물 꾸러미를 풀어낼 때는 어깨에 은근 힘도 들어간다. 이역만리(?) 여행을 다녀온 형을 바라보는 려환이 눈빛에는 부러움과 함께 존경심이 묻어났다. 귀여운 형제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다음에는 꼭 같이 여행을 가자고 약속을 한다. 분명 재미난 여행이었는데, 그래서 더 함께 하고 싶은가 보다. 아빠와 엄마도 다음에는 꼭 함께 떠나자고 속삭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