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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K모닝 Nov 21. 2023

욕심을 거둬내야 마음이 보이더라

아이의 성장만큼 부모도 자란다. 

결혼을 하면서 아내가 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엄마가 되고,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도 자란다.  


결혼한 이후 아이가 태어나고도 직장생활을 하느라 거의 10년간을 친정엄마가 우리 집 살림과 양육을 도맡아 주셨었다.  영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부모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한 것 같다.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엄마로서의 성장통을 겪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이 전적으로 나의 몫이 되었고, 서툰 집안살림에, 매일 반복되는 아이들의 등하교 시간을 맞추는 일, 특히 자유롭지 못한 언어로 인해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도, 엄마니까 아이들의 빠른 학교 적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짬짬이 영어 수업에 가서 공부도 하며, 못하는 영어로 소풍, 운영위원회(PTA), 참관수업, Fair 등 각종 학교 행사는 빠짐없이 쫓아다니는, 아이 반 아이들이 내 얼굴을 거의 아는 지경의 열혈 엄마가 되어 있었다. 

큰 아이는 당시 5학년이었다. 

아이가 학교 가는 것이 싫어 매일 아침 흔들렸던 눈빛이며, 학교 소풍에 발런티어로 참여했을 때 친구들과 한마디도 못하며 겉도는 아이를 목격했을 때, 하루 종일 반에서 무슨 말인지 몰라 스스로를 한없이 작게 느꼈을 아이의 긴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목이 있는 부모의 선택이었지만,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건 아이였으니까. 


살림보다는 일을 중시하며 나 중심적으로 살았던 것이 익숙했던 나, 

아이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기보다는 아이의 진도와 학업에만 집중했었다. 

영국에 와서도 진도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아이를 심하게 닦달했다. 

학교에서는 언어로 인해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않은 아이를 영어가 빨리 늘려면 한국 친구들과 한국말을 하지 말라며 야단쳤다.  

학교에서도 종일 힘들었을 아이에게 거의 매일 레슨으로 보충수업을 시키고 영국에 온 지 6개월도 안된 아이를 무조건 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잘 알지도 모르는 11+ 입시 시장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 여겼었다. 


한국에서 발랄하고 자신만만했던 아이였는데 영국에 와서는 소심해졌다. 

내가 알고 있었던 아이와 너무나도 달라, 나도 우리 아이도 서로에게 적응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함께 살았는데 내가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때로는 미움이라는 감정으로 아이에게 표출되었던 것 같다. 


누구든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


어느 날 새벽, 아이를 내가 죽이고 있는 꿈에 충격을 받아 울면서 깨어났다. 

그 순간 ‘누구든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라는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아이를 마음으로 미워한 것은 살인에 버금가는 것이었구나, 

아이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내 아이의 영혼을, 지금까지 내 아이의 자아를 죽이고 있었던 거라는 걸 깨닫고 옆에서 자다 놀란 신랑을 안고 펑펑 울며 잘못을 뉘우쳤던 그날이었다.  


그 일로 인해 11+ 시험을 위한 공부를 일체 중단하고 원어민과 책을 읽는 수업만 남긴 채 모든 레슨을 올스톱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 뒤에 내 욕심을 알아채고 나서야 아이의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주 플레이 데이트도 하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기다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이 스스로의 도전

전에는 11+시험에 꼭 붙어야 한다고 생각해 마음이 조급했었다면,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권면할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참을 늦게 시작했고, 영국에 온 지도 갓 1년이 넘었으니 부담이 적은 것도 사실이었다.


“실패를 하더라도 과정에서 반드시 배우는 것이 있을 거라며 시험에 도전은 해봤으면 좋겠다고

엄마, 아빠 생각은 그렇지만 결정은 네가 해야 한다”라고 


결과는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이에게도 두고두고 후회가 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몇몇 사립학교 오픈데이에 참석하여 직접 학교를 보고는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입시후반기였지만, 여름 방학 8월, 인텐시브 코스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였다. 


인텐시브 수업 첫 주, 3일은 울면서 밤늦게 까지 숙제를 해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는 적응을 해 가며 “억울해서 끝까지 해봐야겠다”며 마음을 다잡고 그 시기를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다시금 11+ 시험을 내려놓기 이전 상황과 같은 빽빽한 레슨 스케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평안이 있었다.   아이 스스로의 선택을 믿어주고, 아이가 노력의 과정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성장하게 되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때때로 조급함에 아이를 푸시하고, 순간순간 관계가 틀어질 때, 또 첫 마음을 잊어버리고 내 못난 욕심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증표가 생겼다.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무서운 꿈을 꾸고 생각났던 성경구절을 기억하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미숙한 나를 직시하게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한국의 특목중 같은 개념의 그래머 스쿨을 경험 삼아 보았는데 역시나 떨어졌다. 

아이는 결과에 살짝 실망을 하긴 했으나 예상한 바라 다시 털고 일어나 3개월 남은 사립학교 시험준비에 매진했다.  9월, 6학년으로 진학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학기의 어수선함, 연말이 다가오는 설렘까지.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워낙 그래머스쿨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이 많아 특목교 입학시험이 끝난 후에는 뜨거웠던 면학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반에서 2~3명만 사립학교를 준비하고 있던 터라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야 하나? ”라면서 가끔 투정은 부렸지만, 본인이 택한 길이기에 묵묵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이는 몇몇 사립학교 시험을 성실히 치렀고, 첫 합격통지를 받은 아이가 했던 말은  “하나님 감사합니다”였다. 그 말에 감격하여 나 또한 하나님께 감사했던 순간이었다.                  

그 당시 나는 길포드라는 고풍스러운 도시에 살아보고 싶은 사심이 커서 그 도시 근처를 염두하여 아이학교를 지원했었다.  지금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초창기 영국 지리와 지도에 익숙지 않았을 때라 주소가 ‘길포드 로드’여서 길포드와 아주 가까운 학교라고 착각하고 실수로 지원한 학교였다. 


많은 사립학교가 초중고가 함께 있는 학교라 기존 학생 대다수가 그대로 승급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가게 된 학교는 지원한 학교 중 유일하게 세컨더리(중고등학교) 학교만 있는 곳이었다.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  다 같이 7학년에서 새로 시작하는 세컨더리 스쿨이었다.  

영국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전학 와서 텃세를 경험했고, 말 없고 영어 못하는 아이라는 반 아이들의 첫 고정관념에 갇혀 좀처럼 발랄했던 이전의 모습을 되찾기 힘들어했었다. 

주눅 들게 했던 사람들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곳에서 본연의 아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학교가 우리 아이에겐 베스트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거나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표현하겠지만, 나는 나의 실수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맡기는 삶이란 풍성한 자유와 감사함을 허락한다.   

인생을 돌아보면 내 계획대로 된 것은 별로 없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으로,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심을 믿는다.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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