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임 vs 체념
임원 회의 때 대표님이 재택근무제는 끝났다고 말씀하셨다.
정부가 코로나 19 엔데믹을 선언한 지 반년이 지났으므로 재택근무제가 곧 끝날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택근무제를 끝내는 이유가 회사의 글로벌 방침이라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마치 재택근무자들이 일을 안 한해서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셔서 놀라웠다.
그렇다면 억울한데. 그동안 재택근무와 사무실 근무의 하이브리드 근무형태를 지속해 왔다. 재택근무하면서도 9 to 6시 사무실에서 일하듯이 근무했다.
숫자로 증명하는 영업부서와는 달리, B2B 기업의 비용으로 취급되는 마케팅 부서인지라, 재택근무 중이지만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려고 했다. 임원도 대표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를 향한 말씀이 아닐지언정,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올해 들어 나 스스로도 업무에 대한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올해 초, 친정 엄마의 병환을 비롯해 여러 일이 한꺼번에 몰아쳤고, 여기에 지난 몇 년간 누적된 업무에 대한 의욕 상실과 무기력감까지 겹치며 결국 1개월간의 휴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복귀 후에도 마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번아웃(Burn-out)’이라기보다, 오히려 ‘보어아웃(Bore-out)’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까. 업무가 과중한 탓이라기보다는, 이 회사에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내 일에 대한 의미 부여가 안되고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회사가 매년 성장하는 만큼, 마케팅 부서도 인력과 예산이 함께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우리 부서의 인력은 여전히 소수였고 예산은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여전히 혼자서 사원부터 임원 역할까지 두루 감당하며 마케팅을 기획하고 실행해야 했다. 회사의 규모에 걸맞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마케팅 업무와, 조직이 기대하는 업무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고, 앞으로도 좁혀질 기미는 없어 보인다.
물론 처음 몇 년은 의미 있었다. 마케팅이 전무하던 회사에서 처음으로 매체 홍보, 외부 협업, 고객 행사, 세일즈 자료 제작, 홈페이지 개편 등 하나하나 세팅해 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에도 마케팅을 ‘비용’으로만 인식하는 조직에서, 나름대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들을 고민하고, 사업부에 도움이 될 만한 활동을 설계하며 설득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설득이 되었다 싶다가도 막판에 취소되거나, 처음부터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막히거나, 승인을 받아도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노력과 시간 대비 효과가 미미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무기력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지, 능력이 부족한 건지, 판단이 틀렸던 건지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받아들인다. 회사의 방향과 대표의 의지가 그렇다면, 내가 혼자 애써도 달라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내가 너무 오만했고, 욕심이 컸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일개 직원이고, 조직의 결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커리어 인생에서는 일이 재미없어졌다고 느껴지는 순간,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과감히 이직했다. 재미와 의미가 없어진 일에 나 자신을 묶어두고 싶지 않았고, 그 결단이 때로는 도전이고 해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이가 주는 현실적인 제약 앞에서 예전처럼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졌고, 가능성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접어버린다
‘하- 때려치워!?!?!?’
하다가도,
오늘도 나는 경제적 아쉬움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무대책으로, 편도 25km, 왕복 50km 거리의 회사로 출퇴근을 한다.
늦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