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때마다 책을 사는 습관이 있다. 습관이 생긴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그 마음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의 해결책을 기대하는 간절함이기도 했고 무거운 생각을 회피하기 위한 절박함이기도 했다. 한참 마음이 푹 꺼져있던 시절, 기쁨을 몰라도 좋으니 ‘無’의 상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항상 가슴엔 바윗돌이 얹혀있었고 그 이유는 까먹어도 무거움은 계속 남아 감각이 오히려 원인을 상기시키곤 했다. 큰 바위가 가라앉아 마음의 수면이 넘치는 날엔 눈물로 수위를 조절하곤 했는데, 점점 눈물을 쏟을 에너지도 없어져 넘칠 듯 안 넘치는 표면장력의 감정을 꽉 붙잡고 아무것도 못 느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추상적이지만 분명한 감정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기엔 공감보단 붕 뜬 동정만 받을 것 같았고 불행을 느끼는 게 흠이라고 생각했던 때라,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나의 위로 방법은 나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남의 불행으로 내 불행을 위로받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임을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공감 능력이 꽤 높은 사람이었고 어린이집 차에 치여 죽은 어린 아들이 차마 다 못 쓴 채 남겨뒀던 벽지 위 본인 이름을 발견한 순간 아프다 못해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로가 아니라 자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왜 이렇게 아픈 글이 존재하는 걸까 너무 슬퍼서 금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상황들은 곧 내가 겪은 미지의 경험이 되었고 상황은 없었지만 또 감정만 남게 되어 결국 한참을 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용기가 없어 책을 읽지는 못하고 책장 속 책의 겉표지를 보며 우울을 감내한다. 나보다 마음이 어려운 상황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정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소설 속 허구라도 말이다. 오늘도 김애란 작가님의 책 한 권을 책장에 꽂으며 그 책에 담겨있을 불행과 불안, 그 아픔에 막연한 공감을 보내고 위로를 받았다. 부디 인물들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