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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망잔칭 Aug 14. 2023

물티슈와 칼부림


환승


- 평소 이동할 때 급하게 걸음을 재촉하는 편은 아니지만 환승역에서 지하철을 눈앞에 두고 뛰지 않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환승역도 마찬가지겠지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역시 출퇴근길에 사람이 붐빈다. 퇴근길에 나는 문은 닫혔지만 어떤 남자의 가방이 문에 끼인 것을 발견했다. 그 남자의 뒤에는 공교롭게도 지하철 안전요원이 있었다. 문이 다시 열리겠거니 짐작한 나는 재빨리 문 앞으로 달려나갔고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너 같은 새로운 손님을 태우기 위함은 아니라는 듯 문은 너무나 빨리 닫혀버렸고, 나는 출입문에 밀리듯이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괜히 머쓱한 정도의 충격이었다.


- 내리는 역은 반대편이었기에 반대편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팔에 어두운 검댕이 묻었다. 지하철에 급하게 타면서 문에 부딪히며 묻은 듯했다. 나는 문득 앞에 서 계신 할머니께 이어폰을 빼고 여쭤봤다. "혹시 제 팔에 묻은 이 검은색이 다른 곳에도 묻었을까요?" 할머니는 나를 훑어보시더니 툭툭 쳐서 몸을 뒤돌아 보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팔뿐만 아니라 왼쪽 팔에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묻었다.


교감


- 할머니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주셨다.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지만(우리는 보통은 괜찮지 않은 경우에도 괜찮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게 나와 할머니는 문득 청소쇼를 진행했다. 팔에 묻은 검댕은 쉽게 지워졌지만 옷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느 정도 닦다가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실제로도 포기한 마음이었다)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우리는 그렇게 애매하게 짧은 시간에 애매한 정도로 교감했다.


- 할머니와 나는 내리는 역이 같았고, 나는 할머니가 지키고 계셨던 캐리어를 들어드리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연신 괜찮으시다며, 다른 노선으로 환승해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된다는 TMI를 말씀해 주시며 떠나셨다.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며 "다음에는 조심해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업그레이드된 조심성을 보여드릴 기회가 없을 것이란 생각에 조금 씁쓸했다.


걱정


- 가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그러니까 낯선 사람과 생각지도 못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바운더리가 약간이나마 겹치는 상황을 마주할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이런 세상에서도 아직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마침 저녁에 친할머니가 전화를 거셨다. 칼부림으로 한국 전체가 싱숭생숭한 시기였다. 할머니는 연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나의 안전을 챙기셨다. 평소 할머니가 하시는 걱정을 거의 전부 노파심으로 치부하며 말렸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진지하게 응대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다고.


-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이 차가운 세상에서도 아직 '인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남아있다는 희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었다. 손주가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면서도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발표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내 또래의 남자를 보면 항상 내 생각을 하시고, 나 역시 할머니 또래의 여자를 보면 항상 할머니 생각을 한다. 어떤 이의 걱정 대상에 오른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 걱정은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걱정하는 마음은 그 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은 사람이 조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다. 슬픈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하루 중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가족 생각에 순식간에 울컥해지는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할머니의 걱정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 그래서 할머니의 걱정 어린 떨리는 목소리도 웃으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릇 모든 할머니는 손주를 걱정할 테고 모든 손주는 가끔은 할머니의 사랑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냥 넓은 범주의 평범한 손주로 살아가고 싶다. 적당한 걱정과 적당한 사랑을 받으며 적당한 애교를 부리고 적당한 증손자를 보여드리고 싶다. 평범한 할머니는 언젠가 돌아가시고 평범한 손주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된다. 그때가 되면 나도 나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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