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엉망잔칭 Aug 22. 2023

행운목과 보석 반지


미신


-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밤에 휘파람을 부는 나를 나무라셨고, 할머니는 문지방을 밟고 지나가는 나를 말리셨다. 세월 때문인지 개인의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미신이나 루틴이나 징크스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은 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묘사하기는 쉬우나 어째서 그런 연유로 믿음 같은 것이 생겼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 나에게도 루틴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루를 새로 시작할 때면 그날 하루는 평소보다 어떤 면으로든 조금이나마 더 정제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정제'에 명확한 기준이 있다. 욕을 쓰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항상 침착한 상태를 유지할 것.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이런 하루를 단 한 번도 완성해낸 적이 없다. 자세히 파헤쳐 보자면, 정확히 어느 때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에 했던 다짐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허리 단단히 조여맨 벨트를 풀듯 정신이 해이해지고 마는 것이다.


태몽


- 할머니는 문득 태몽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었다. 예전 인천 주안의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주택에 머무셨을 당시, 집 한가운데에 커다란 행운목이 자라났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했다. 동생의 경우는 조금 소박하다. 꿈속 어딘가에서 보석 반지를 발견하셨다는데, 위치나 크기나 묘사에 대한 기억이 벌써 사라진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것 같다.


- 행운목이라는 나무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듣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뭔가 요상하게 생긴듯한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뿐인데 나는 행운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와 행운목 사이의 어떤 서사가 생기고 호감을 가질 이유가 생긴 기분이었다. 마치 너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듯, 할머니의 꿈에 나타나주어서 고맙다는 듯.


그림


-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있으시다. 고모께 부탁을 해,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물감 등을 구하신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그림을 그리신다고 하셨다. 부끄러운 미소를 감추며 꽤나 쌓인 스케치북 더미를 나에게 보여주셨을 때는 이유 모를 눈물이 났다. 스케치북에는 TV에 나오는 해외의 풍경을 그린 그림도,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있던 장면을 꺼내어 어렴풋이 조각을 맞추어 그린 추억도, 순수한 상상력으로 탄생한 작품도 있었다.


- 그림이 무엇이길래 나는 눈물이 났으며 행운목이 무엇이길래 나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는가. 1달 앞두고 나간 휴가에서 나는 홍삼 선물 세트를 사서 할머니께 드렸다. 당시 군인 월급이 오르고 있었다지만 나름 큰 소비였다. 할머니는 군복의 나를 맞이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손주가 이런 것을 다 사 오고... 나는 할머니의 눈물이 조금은 갑작스러웠다. 그렇게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았는데.


감정


- 어쩌면 감정은 나와 어떤 매개체 사이의 관계에서 말미암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그림이 어떤 화백의 작품이었다던가, 전시회에서 스쳐 지나가듯 보는 그림 중 하나였다면 나는 과연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까. 그것들이 나의 마음에 어떻게 자리 잡아 어떤 작용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고작 할머니라는 딱지가 붙음과 동시에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이유는 모른다.


- 나는 할머니께  행운목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씀드렸다. 명절 때 완성된 그림을 바탕으로 팔에 그림을 새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이고... 내 그림 솜씨가 더 괜찮았으면 좋으련만..." 나는 뻔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그림의 선과 색, 명암과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다. 거진 한 달이 남은 시점, 나의 화백은 어떤 그림을 완성시킬지 궁금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어려운 건 아니고 너무 쉬울까 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