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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망잔칭 Aug 16. 2023

어려운 건 아니고 너무 쉬울까 봐



-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뽐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어떤 대화에서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어떤  화제에서도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는 척'은 필수적인 덕목이다. 때로는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도 우선 아는 척을 하고 보기도 한다. 그쯤 되면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식을 알고 있는 박식한 나를 이곳저곳에 뽐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느낌도 든다.


- 나 역시 그런 순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관심 가는 분야에서는 더 그랬다. 어떤 감독의 어떤 영화는 어떤 느낌이 좋고, 어떤 가수의 어떤 앨범은 뭔가 키치하고,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은 왠지 모를 포스트모더니즘을 건드리는 느낌이고(실제로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런 식이다.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 중에서 있어 보이는 것들을 조합해서 있어 보이는 나를 조각한다. 사실 뒷면은 나무판자에 불과하다. 후 불면 쓰러질 것만 같다.


외근


- 책 표지 앞부분에 삽입할 추천사를 의뢰하기 위해 파주로 외근을 다녀왔다. 출간 기획도 아니고 추천사 따위로 얼굴을 직접 뵈기까지 하냐고 편집부 직원들은 의문을 표했지만, 대표의 지시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2년 전 광역버스를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을 때와는 무릇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한 회사의 사원이라는 오묘한 무게감이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버스에 같이 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잠을 청했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 청소년을 위한 강의에 강연자로 나선 추천사의 주인공은 수학자였다. 그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건물을 헤매어 강의 시작 1분 전에 강의실에 자리 잡는 귀여운 면모도 보여줬다. 처음 강의를 구상할 때는 마이너스가 나오는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초등 6학년과 중등 1학년은 아직 음수 개념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삼각형과 사각형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고 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어째서 180도 인지, 그렇다면 사각형 내각의 총합은 얼마인지, n각형 내각의 합은 어떻게 될지를 '증명'하는 방법에 대해.


증명


- 결국 '증명'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증명은 간단할수록 그리고 명료할수록 좋다. 문득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혹시 이거 아는 분들 계세요?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쉬울까 봐~" 청중은 함께 웃었다. 예시로 들었던 것이 정말로 쉬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학생들의 눈높이에 난이도와 분위기를 맞춘 교수의 재치가 웃겨서였는지 모르겠다. 


- 같은 내용도 아 다르고 어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혹시 이런 내용을 모르는 친구들은 없겠죠?", "혹시 이 내용을 아시나요? 알고 계신다면 상당히 똑똑한 건데~", 혹은 아무런 설명 없이 바로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교수가 선택한 문장이 좋았다. 장소와 청중과 내용을 고려했을 때 아주 내용과 어투였던 것 같다. 나 역시 웃음이 났다.


교사와 강사


- 군대에서 잠깐 진로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꿈을 교사였고 나의 심지는 아직 단단하지 못했다. 문득 다른 중대의 부사관과 잡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본인이 사회에서 강사 일을 했었다며, 강사와 교사는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했다.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는지, 길러내는 것이 적성에 맞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이었다. 교육자, 선생님, 교사, 강사... 나는 과연 어떤 단어 아래에 있는 직업과 책임을 상정하며 꿈을 정한 것이었을까. 막연히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침을 튀겨가며 무언가를 뱉어내는 모습을 동경했던 것이었을까.


- 나는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고쳐 종이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도서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척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미지를 내비쳐서도 안 된다. 저자의 권위와 예상 독자층의 지식수준과 책의 정가와 분류와 판형과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살펴야 한다. 그렇게 내용의 색도 바뀐다.


아는 것


- 이제 관심 없던 내용을 알게 되고 또 아는 척해야 하게 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냄새도 맡지 못했던 원고의 내용을 꿰고 회의 자료를 준비하다 보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알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며 알아야 할 것은 또 무엇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머리가 커지는 오묘한 기분만은 확실하다. 이러다가 정말 아는 것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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