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 동훈은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는 기숙사에 살았고 졸업한 이후에는 본가에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얻으며 처음 제대로 된 독립을 한 셈이다. 졸업 이후 잠깐 동안 좁은 고시원에서 지낼 때도 있었다. 아는 형님과 옆방에 살았다던 그는 형님이 먼저 취업에 성공해 방을 비우자 외로움이 더욱 커졌다고 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고시원과 본가의 방에서 버텨냈다.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대기업에 합격해 벌써 몇 번의 월급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그의 집은 에어컨이 켜지지 않는다.
- 혹자는 에어컨이 켜지지 않는 곳이, 혹은 세탁기에서 녹물이 나오는 곳이 과연 집, 쉼터, 거주지 같은 단어로 불려도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동훈은 소극적인 의문 제기자였다. 그는 집주인에게 애로사항을 전달했고, 집주인은 사람을 불러 집을 고쳐줬다고 한다. 정확히는 '고쳤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결국은 집주인의 소유인 건물 혹은 방일 텐데, 고쳐서 손해 볼 것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과연 전에 살던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녹물이 나오는 세탁기로 빨래를 돌리고 켜지지 않는 에어컨 아래에서 여름을 보낸 것인지.
미지근함
- 에어컨 수리기사는 여름이고 폭염이라 일정이 가득 차 있었고, 동훈은 겨우 더위가 가시기 전에 에어컨을 새로 설치했다. 기존에 붙어 있던 에어컨은 거의 스무 살이 넘은 친구여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녀석을 설치했다. 하지만 새것이 아니었다. 2011년 출생의 새로운 에어컨은 새로운 집에 새로 설치된다는 점에서는 새 에어컨이 분명하지만, 출생 자체가 이미 중고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전자기기는 문외한일수록 중고와 신품의 차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법이다. 외관이 깨끗하다면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관마저 더러웠다고 한다. 에어컨은 흰색이 아닌 상아색을 띠고 있었다.
- 밤이 되어도 온도가 28도를 넘어서는 열대야에 18도를 가리키고 있는 에어컨 리모컨의 숫자는 실소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에어컨에서는 미지근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차가운 물을 섞어서 '미지근카노'를 마신다고도 하지만, 온도는 미지근한 것이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기보다는 아무도 원하지 않기에 단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시원하면 시원했고 따뜻하면 따뜻했지, 미지근한 온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눈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지근한 바람이 18도를 가리키고 있다면 배신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호출
- 하지만 다시 주인을 호출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애초에 브랜드 로고가 벗겨져 가고, 뿜어내는 온도만큼 미지근한 색깔의 에어컨은 누가 봐도 중고가 분명했다. 이럴 때에는 어떤 멘트로 문자를 보내야 하는 걸까. "도와준 것은 고마운데, 이럴 거면 그냥 사람 부르지 말지 그랬어요." 같은 문장이 목까지 차올랐다가 들어가는 듯하다. 더군다나 동훈은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는,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깜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미지근한 그의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문장을 덧붙였다. "다음 주에는 더 더워진다고 하더라. 너, 버틸 수 있겠어?"
- 오히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 모든 미지근함에 관한 과실은 미지근하게, 그러니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훈의 탓으로 돌려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분명 새로 에어컨을 설치해 줬는데도 에어컨이 말썽이라면, 둘 중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집주인이 중고 에어컨을 알고 구매한 것인지 모르고 구매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중고 에어컨이 설치된 순간 세입자는 이를 재빠르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임차인과 임대인과 에어컨 수리기사 모두를 고려했을 때 평화로운 결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다.
일단은
-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른다면 일단 어떤 결말에 도달했는지 궁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우선 하루 잠에 들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시간이기도 하고, 목요일 낮에 설치한 에어컨이 이상하다고 목요일 밤에 연락을 하는 것은 왠지 염치없어 보이는 느낌이다. 그는 이제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큰맘 먹고 22만 원이나 지출한 제습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 때문에 방안의 온도가 시원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이다. 제습기의 성능 자체에는 상당한 만족을 보이면서도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구석에서 조용히 물을 만들면서 뜨거운 바람을 내뿜는 22만 원짜리 신품 기기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제습기는 신품인데도 불구하고.
-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는 것이 대체 어떤 부분에서 조심스러움을 자아내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지만, 사람마다 섬세한 부분이 다르다는 변명 밖에는 할 수 없다. 직장에서도 전화를 받으러 굳이 몇 걸음 나서서 문밖에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오늘 밤 그가 느낄 미지근한 공기는 오롯이 그가 겪는 것이다. 시원한 바람 아래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 명령도 아니고 조언도 아니고 위로도 아닌 말을 감히 뱉을 자격은 내게 없다. 그래도 오늘 나의 잠자리는 조금 더 시원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