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실이 Jan 16. 2024

반대하는 결혼은 좋을 거 없다

C가 내 집으로 왔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님의 눈을 피해 아침 새벽부터 나와 이별을 하더라도 제대로 얼굴을 보고 해야 맞는 것 같아 한숨도 못 잔 채로 초췌한 몰골로 그를 만났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는데 너무 폐인 같아 보이긴 싫어 씻고 또 꾸미고 한창 이별맞이를 준비했다. 이날 이후로 나는 그의 부모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꼭 이 관계를 끝내야 하는 이유를, 그의 부모를 이길 수 없는 이유를 다시 되짚었다. 식욕은 없고 에너지는 자꾸 소모하게 되니 대화는 계속 스트레스를 증폭시켰다. 


사실 그의 부모님이 굉장히 강경반대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클리셰 같긴 하지만 혼전임신을 하면 조금이라도 우리를 받아주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몇 번의 시도는 해봤지만 극심한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태로 어떻게 귀한 생명이 찾아올 수 있을까. 하지만 몇 달 동안 나는 생리를 하지 않았다. 처음엔 임신일 수도 있을까 봐 3개월 동안 임신테스트기를 꾸준히 사용했지만 그 결과는 늘 음성이었다. C도 기대하기는 했지만 내가 더 간절했었던 것 같다. 나는 미워할 순 있어도 손주를 미워하진 않겠지. 그래도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유해지고 한풀 꺾인다고 하니 아이를 안겨드리면 그나마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테스트기에 음성이 뜨면 나도 모르게 정말 내가 나이가 많아서 임신이 쉽게 되지 않는 건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굳혀지기 시작하니 내 자존감은 바닥이었고 정말 그의 부모님의 말처럼 나는 가치가 한없이 작아진 여자처럼 느껴졌다. 


C는 어제 전화로 나에게 헤어짐을 고했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날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싫어하는 것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또 그의 어머니가 자꾸 동정심 유발하기 위해 홀로 미국에서 아버님이 공부를 하실 때 독박육아를 한 거며 C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는지 어필하셨다고 했다. 쓸데없이 C는 기억력이 좋아 정말 어린 나이의 기억 (2-4살)에 어머니와 함께 만든 추억들이 떠올라 꽤나 괴로웠다고 한다. 물론 부모와 자식 간에 애틋한 기억 그리고 추억이 있을 수 있지만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려고 하지 않는가?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시절 힘들게 키우지 않았는가? 


내가 이 문제를 한창 겪을 때 그에게 넌지시, "자기 어머님은 자기 눈치 정말 많이 보셔. 그거 알아?" 했을 때 그는 전혀 몰랐다는 듯 오히려 놀란 모습이었다. 어쩜 이렇게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모를까. 실제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C에게 잔소리하지 않았고 가끔 욱할 땐 있었지만 그렇게도 C와 맛집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그와 시간을 보내는 것에 늘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택했을 때 아버지에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고 어떻게 자식이 되어서 자신의 엄마가 그런 대우를 당하게 놔둘 수 있겠냐며 그것이 우리의 이별에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자식이 자신의 부모가 맞는 건 볼 수 없다며. 참 어이가 없다. 다 큰 성인 아들이 두 명이나 있는 집에서 작던 크던 가정폭력이 있다면 그 가해자를 막을 수 있는 충분한 신체적인 힘이 있지 않은가? 왜 건장한 30대 남자가 60대 남자를 막지 못하는 걸까? 그럴 마음이 없는 걸까?


이 당시에 나는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중간에 껴있는 그가 불쌍하기도 해서 결국 나는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 자신의 부모로부터 분리가 되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 같다며 자신이 그 길을 걸어 나가는 동안 내가 옆에 있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날 지켜줄 수 있지만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같이 있을 수도 없으며 핸드폰으로 또는 이메일로 연락 오는 것들을 다 차단하거나 막아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날 괴롭힐 수 있는데 그때마다 힘들어할 날 생각하면 자신 스스로가 너무 볼품없는 남자가 될 것 같아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했다. 그게 그때 들었을 땐 꽤나 그럴싸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자신의 약점,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는 게 싫어 선택한 가장 쉬운 선택이 그의 부모에게서 그리고 나에게서 벗어나 혼자 도망치는 거였다. 


아쉬운 나머지 저녁을 함께 먹고 떠나기 전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보든 말든 나는 그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장 슬프고 불쌍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거의 다 됐었는데. 내일이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앞으로 힘들지만 행복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삶을 살았을 텐데 그게 송두리째 없어졌다는 상실감이 너무 컸고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앞이 막막했다. 실제로 나는 내 인생을 그에게 맞추기 위해 끼워 넣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몸의 반이 날아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러웠지만 그에게 2023년이 넘어가기 전 꼭 보자는 약속을 제안했고 그는 처음에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며 망설였지만 마지막엔 서로 보기로 약속을 했다. "잘 있어."라는 말 한마디에 난 그를 보냈다. 


집에 우두커니 혼자 남아 엄마에게 전화를 거니, "우리 딸 어떡하니.... 불쌍해서 어떡해..." 하며 엄마도 아빠도 그제야 참으셨던 눈물을 쏟으셨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에겐 아직 조금의 희망이 있을 것 같다며 각자의 삶을 살고 서로가 풀어야 하는 숙제를 하다 보면 길이 나오지 않겠냐라는 말로 위로를 해드렸고 이상하게 그와 다시 꼭 다시 만날 거라는 느낌에 너무 슬프지만은 않았다. 다음날 혼인신고를 하는 날이었기에 법원에 전화해서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 있으니 미칠 것 같았다. 그와 아직 연락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제 원하는 대로 됐다. 엄마 아빠가 이겼다 속이 시원하냐고 말씀을 드리니 아무런 말없이 그의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이모님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셨다 했다. 그리고 제발 XX에게 전화해서 사죄하라고. 미안하다고 못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의 카톡을 다 읽자마자 내게 익숙한 번호로 문자가 두 개 와있었다.


-얼굴 보고 말해야 하는데 내가 그럴 염치는 없어서 문자로 보낸다. 윽박지르고 화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했던 말들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길 내가 빌어주겠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나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급하게 끊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너무 보고 싶어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어이없지만 일주일이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누가 보면 신파극 찍냐고 할 테지만 그때의 난 그를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사랑에 눈이 멀면 사람은 상식밖에 일들을 한다. 


일주일 동안 정말 또 너무 행복했다.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이별을 준비하는 기간이랄까. 그렇게 매일밤 산책을 하고 내가 늘 입버릇처럼 달던, "난 별똥별이랑 반딧불이 너무 보고 싶어. 소원을 들어주는 거잖아. 근데 여기에 토끼들이 많이 살았는데 안 본 지 오래됐다. 보면 좋겠는데."라는 말을 그에게 다시 했고 정말 신기하게도 마지막 날 밤에 그토록 보고 싶던 토끼 가족도 보이고 정말 수많은 반딫불들이 있었다. 너무 신기하면서 아름답기도 해 또 눈물이 터졌다. 왜 하필 이럴 때 보이는 걸까. 정말 소원을 빌면 들어주긴 하는 걸까? 난 울 때 어린아이처럼 펑펑 소리 내면서 우는 습관이 있어서 한번 터진 울음을 멈추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게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 나를 보면서 C는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제 정말 이별하는 시간이구나. 


그의 집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도 보고 곧 이사를 가야 하기에 그의 이삿짐들을 챙겨주었다. 불안이 극심했던 나라 조금의 자극이 오기만 해도 감정이 터지는 시기였기에 그와 대화를 하다 조금의 다툼이 있었다. 난 어떻게든 다시 잘해보고 싶은데. 그의 말대로 서로 시간을 가지면 우린 자연스럽게 재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전제하에 나는 씩씩하게 보이려 했지만 그의 화난 말투에 또 무너졌다. 


"자기는 왜 나를 포기 못해? 내가 지쳤어. 내가 힘들어."


갑자기 부끄러웠다. 아,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 남자를 붙들려고 했는가. 여태까지 나의 행동들이 얼마나 저 남자 눈에는 불쌍해 보이고 짜증이 났겠는가 라는 생각이 드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원래 출장이 예정이었던 그를 마지막으로 공항에 데려다주고 나도 부모님 댁에 가기 위해 내가 사는 도시의 공항으로 향했다. 마지막 배웅을 해주고 그가 공항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나는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또 바보같이 미련하게 울었다. 나도 비행기에 몸을 싣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도착했고 마중 나온 부모님의 얼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또 엉엉. 그리고 집에 가서 몸이 이상한 게 느껴져 확인해 보니 생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힘들었었나 보다. 잇몸도 너무 아파 거울을 보니 잇몸도 다 내려앉아있었고 그렇게 잠을 좋아하던 사람이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마음도 몸도 다 상처투성인 채로 2023년의 여름을 보냈다.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함을 넘어선 하면 안 될 생각까지 들만큼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렇게 살면 우리 딸이 이상한 생각 할까 봐, 정신 못 차릴까 봐 부모님은 약 두 달간 부모님을 나를 혼자 두지 못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렇게 부모님과 붙어서 시간을 많이 보낸 건 처음이었다. 매일 바닷가를 아침저녁마다 산책하며 부모님이 늘 하셨던 말 중에 하나는, "나중에 지금 순간을 돌이켜 보면 감사할 때도 있을 거야. 아, 그때 내가 엄마 아빠랑 이렇게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구나. 언제 또 그만큼 시간을 많이 보낼까." 하는 날이 꼭 올 거라며 우리 가족 다 잘 견뎌내자고 다짐했었다. 


여름동안 너무도 답답해서 상담사들과 상담도 해보고, SNS를 통해서 활발한 커뮤니티에 내 사연의 글들도 올려보면 모두 하나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나에게 C를 절대로 기다리지 말라는 댓글에 내심 서운하기도 했고 슬펐다. 왜 우리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없는 거지. 정말 내가 바보 멍청인가? 그러다 알게 된 심리상담 유투버께 사연신청을 보냈고 채택이 되어 그분의 의견도 유튜브 영상으로 통해 듣게 되다 보니 내가 몰랐던 것이 있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그 어느 여자였어도 탐탁지 안 했을 거라는 말. 그리고 아들인 C가 자신의 부모의 관계가 어떤지 무의식으론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는 말. 


https://youtu.be/brkfZ1n50qs?si=UA_6iALo6tCFn6FU


그래도 해소되지 않은 내 갈증은 자꾸 그와 닿기를 바랐고 헤어져있는 두 달 동안 우린 주기적으로 서로에게 연락을 했었다. 너무 선을 넘진 않지만 그저 아쉬운 감정이 남아있는 남녀로서. 결국 나는 그와 가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지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변에 도움을 받아 그가 있는 지역에 직장을 가질 수 있었고 그에게 너무 자세히는 아니지만 조만간 그 지역에 이사를 갈 거라고 하니 그는 놀라했다. 그래도 음악인으로서 대도시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도 한 편이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또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갑작스러운 이사를 결정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미련하다는 생각을 하실 독자분들이 많이 계실 거란 걸 안다. 그때의 난 억지로 내 사랑이 끊어진 것이 너무 아쉬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라도 있다면 더 해보고 싶었다. 어떤 거라도. 그렇게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난 그렇게도 매초마다 그리워했던 C를 다시 마주했다. 남녀 마음이 무 자르듯이 깔끔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될 수만 있었더라면 두번째의 이별을 직면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그 이후 3개월의 행복은 아주 달콤했지만 그만큼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또 상처를 냈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반대의 클라이막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