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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었다옹

by 수상한호랑이

초저녁 이 산'골에 눈이 내린다.

조용히 조용히 눈이 내린다.

갈매나무, 돌배나무 엉클어진 숲 사이

무리돌이 주저앉은 오솔'길 우에

함박눈, 눈이 내린다.


초저녁 호젓도 한 이 외딴 길을

마을의 녀인 하나 걸어간다

모롱고지 하나 돌아 작업반장네 집

이 집에 로전결이 밤 작업에 간다.


모범 농민, 군 대의원, 그리고 어엿한 당원―

박순옥 아맹이의 우에 눈이 내린다

지아비, 원쑤를 치는 싸움에 바치고

여덟 자식 고이 길러내는 이 홀어미의 어깨에,

늙은 시아비, 늙은 시어미 정성으로 섬기여,

그 효성 눈물겨운 이 갸륵한 며느리의 잔등에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내린다.


이 녀인의 마음에도 눈이 내린다

잔잔하고 고로운 그 마음에,

때로는 거센 물'결치는 그 마음에

슬프고 즐거운 지난날의 추억들 우에,

타오르는 원쑤에의 증오 우에,

또 하루 당의 뜻대로 살은 떳떳한 마음 우에,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다정한 이야기같이, 살뜰한 쓰다듬같이

눈이 내린다.

위안같이, 동정같이, 고무같이

눈이 내린다.

이 호젓한 밤'길에 눈이 내린다.

녀인의 발'자국을 그리며 지우며,

뜨거워 뜨거운 이 녀인의 가슴속

가지가지 생각의 자국을 그리며 지우며

푹푹 나리여 쌓인다, 그 어느 크나큰 은총도

홀아비를 불러 낮에도 즐겁게

홀어미를 불러 이 밤에도 즐겁게

더욱 큰 행복으로 가자고, 어서 가자고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기는 당의 은총이.


밤'길 우에,

이 길을 걷는 한 녀인의 우에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 쌓인다.

은총이 내린다.

은총이 내려 쌓인다.




2025.11.10. 떠나갔던 모든 이들이 나의 세계가 되어 어깨를 감싸줄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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