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준 David Kim Jan 31. 2024

[도성한담]  SIN CITY

4편 : 멕시코와의 전쟁과 라스 베가스 시 설립  1846 ~ 1911

스페인제국이 멕시코를 포함한 북미일대를 정복하고 그 식민지에 '뉴 스페인' (New Spain)이라는 국가를 세운 지 200년 후 멕시코가 완전히 독립하는 1821년 이후 멕시코는 북부 뉴 멕시코(Nuevo Mexico)의 주도 Santa Fe를 통해 미국인, 유럽인, 북미원주민 등과의 교역을 증진하고 경제부흥을 이루고자 애썼습니다.   


멕시코 시티로부터 북쪽 산타 페까지 연결되는 마차교역로 ‘El Camino Real Trail’을 통해 멕시코산 모직물들을 올려 보내면서 미국 동부 미조리 주로부터  산타 페로 연결되는 ‘Santa Fe Trail’을 통해 몰려드는 서부 이주민을 포함하여 캘리포니아 금광개발자들, 군인들, 상인들과의 교역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1829년에 이르러 Santa Fe를 기점으로 캘리포니아 신흥도시 로스 앤젤레스와 연결하는 ‘Old Spanish Trail’을 새롭게 개척하여 경제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수많은 멕시코의 서부개척자들이 멕시코를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에 이주하여 목장과 농장을 일구면서 정착하게 되고,  이들이 생산한 물건들을 멕시코 주민은 물론 미동부 상인들과 교환하는 경제가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지성]  1829년 산타 페에서 60명의 대원들과 100마리의 노새등에 교역품을 잔뜩 싣고 떠났던 Antonio Armijo(안토니오 아미호)의 역할이 끝내 멕시코인들의 캘리포니아 이주로 연결되었군요?

[해월]  그때 이후로 많은 멕시코인들이 삶의 터전을 캘리포니아로 옮겼다고 볼 수 있어.  문제는 독립한 후 왕정과 공화정 정부를 번복하면서 내전까지 겪는 등 국가 자체가 불안정한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지.  그러다 북쪽 텍사스 지역에서 반정부인사들이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혁명 끝에 1836년 3월 2일  ‘텍사스 공화국’ (Republic of Texas)을 건립하게 돼.  불행의 씨앗이 된 거야.


                              [The Republic of Texas and Mexico 1842.  Map by John Arrowsmith]


[지성]  아!  그래서 텍사스공화국이라는 말이 생겼군요.  

[해월]  텍사스공화국은 10년간 존재하다가 미국에 투항하고 곧 합병되면서 1845년 12월 29일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하게 돼.   한편 1845년 11대 대통령이 된 James K. Polk (제임스 폴크)는 유세 때부터 텍사스를 포함해 캘리포니아와 오래곤 지역을 미국이 차지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지.  당시 스페인제국에 이어 멕시코땅이었던 이들 지역에 대한 욕망을 나타냈으니 멕시코가 좋아할 리 없지 않겠어.  게다가 텍사스공화국이 생긴 이후로는 이 지역의 경계선을 두고 티격태격해오고 있었지.

   

[지성]  텍사스가 미국 쪽으로 기울었으니 멕시코와의 국경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겠어요.

[해월]  그래서 폴크가 넌지시 멕시코에 이들 접경지역을 2,500만 달러(현재 약 8억 달러 가치)에 사겠다는 의사를 보냈지만  멕시코가 당연히 거절했어.  그러자 폴크가 기다렸다는 듯이 Rio Grande일대 분쟁지역에 80여 명의 군인들을 보내 무력을 슬쩍 과시하자 멕시코는 이를 침략으로 간주, 1846년 4월 25일 이들을 격퇴하지.  1871년 조선시대말 벌어졌던 신미양요(辛未洋擾) 생각이 나는 대목이야.

  

[지성]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발생했던 조선말 사건이잖아요?  그때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미국군은 철수했다면서요?

[해월]   미국의 수교요청을 조선정부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것인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4년 후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는 수모를 겪었지.  누구 말처럼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 이야.

 

[지성]  멕시코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신이었겠지요?

[해월]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역사가 흐르는 길이 그리 간단치는 않은가 봐!  멕시코군이 미군을 격퇴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폴크 대통령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미의회의 승인을 받아내게 돼.    분쟁의 대상이 되었던 텍사스지역을 바로 점령한 미군은 뉴 멕시코의 Santa Fe 지역과 캘리포니아주를 점령하고 Baja California (남부 캘리포니아라는 뜻으로 현재는 멕시코의 12번째 주임)까지 진출하지.  속전속결로 1847년 9월 멕시코의 수도 Mexico City까지 접수한 미군은 마침내 1848년 2월 2일 ‘Treaty of Guadalupe Hidalgo’ (과달루페 히달고 조약)라는 종전협정을 통해 전쟁을 끝내게 돼.


                             [멕시코가 전쟁에서 잃은 땅 1848. source: Carnton bolt.org]  


[지성]  멕시코로서는 기막힌 역사의 상처네요.  겨우 식민지를 벗어나 자립하는 과정에서 크나 큰 시련을 겪었겠어요.  전투에서 많은 사람도 잃었겠지요!

[해월]  양쪽 다 인명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어.  미군의 진격이 멕시코 깊은 곳까지 갔으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미국이 멕시코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1,500만 달러에 달하는 보상금도 주었어.  그 대신 당시 멕시코땅의 55%를 가져갔어.  현재의 텍사스는 물론이고 뉴 멕시코,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콜로라도는 물론 오클라호마, 캔자스,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오래곤 주 일부의 땅 등 거대한 지역을 미국땅으로 흡수하게 되었지.  텍사스를 뺏기지 않으려다 국토의 반이상과 수많은 국민을 잃은 멕시코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들이 가지고 있을 마음의 한이 느껴질 때가 많아. 


[지성]  스페인도 물러나고 힘없는 멕시코와 전쟁해서 멕시코가 가지고 있던 커다란 땅을 차지한 미국의 서부개척이 급속도로 전개되었을 것 같은데요!

[해월]  급하기도 하지.  그래, 맞아.  우연의 일치겠지만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848년 1월 캘리포니아 Coloma (아름답다는 뜻의 엘도라도 카운티의 한 마을)라는 동네에서 금맥이 발견되면서 온 나라가 들썩이기 시작했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들썩였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실어날으느라 steam ship(증기선)이 발달하고 샌 프란시스코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곳곳에 인구가 팽창하면서 각종 산업에 부흥을 가져오기 시작한 거야.  1869년에 이르러서는 서부와 동부를 잇는 철로가 완성되면서 물품과 사람의 이동이 쉬워지게 되었지.  이로서 노새와 마차로 교역하던 교역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어.


[지성]  결국 산타페에서 시작되었던 교역로의 역할이 다했다는 말씀이시네요.  캘리포니아가 북적였으니 라스 베가스에도 무슨 변화가 왔겠지요, 선생님?

[해월]   꼭 그렇지는 않았어!  라스 베가스는 지역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전자체는 늦게 왔지. 기록에 보면 이곳이 아직 멕시코 땅이었을 때 미국정부의 지령을 받고 지역을 염탐하러 1844년 미 공병대원들을 이끌고 잠입했던 John C. Fremont(쟌 후레몬트)가 임시 요새를 구축했다거나, 1855년 유타주에서 몰몬교도 29명을 이끌고 라스 베가스에 들어온 William Bringhurst(윌리엄 브륑허스트)가 거처를 마련하고 잠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전부야. 물론 동부와 서부를 왕래하던 상인들이나 이주민들이 거쳐 가기는 했지만.

   

[지성]  그럼 라스 베가스는 일종의 정거장 역할만 했었던 거네요.

[해월]  맞아!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에 캘리포니아에서 활약하던 남부군 첩자들을 속이기 위해 북부군인들이 라스 베가스에 주둔한 것처럼 언론에 흘리면서 그것이 실제로 전개되지.   1865년에 미국정부의 허가를 받은 애리조나 정치인이자 사업가인  Octavius Gass(옥타비우스 가스)가 요새에 들어와 근처에 살던 Paiute(파이윳) 인디언부족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면서 파이윳부족들은 연방정부에게 살던 땅을 넘겨주고 대신 얻은 곳으로 떠나가지.  그가 곧 일대를 'Las Vegas Rancho'로 이름을 바꾸어 개발하기 시작하고 나서 Old Spanish Trail을 이용해 다니던 사람들에게 라스 베가스가 가장 좋은 중간휴식지로  알려지기 시작했어.  이곳에서 만든 포도주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지.

   

[지성]  샘물 나는 초원에 맛있는 포도주가 있는 휴식처라!  나쁘지 않은데요?

[해월]  문제는 쉬지 않는 역사의 변화지.  광산개발사업가에다 정치인이기도 한 그가 소송에 휘말리고 정치인으로서의 인기도 떨어지면서 부채가 발생, 소유한 땅을 채권자에게 빼앗기고 말았어.  1881년에 Gass로부터 땅을 차압한 Archibald Stewart(아키볼드 스튜워트)가 당시 소유한 땅은 약 1,800 에이커 (약 220만 평)에 달하였는데, 이 땅들도 1902년에 ‘San Pedro, Los Angeles, and Salt Lake Railroad’라는 철도회사를 소유한 William Andrews Clark(윌리엄 클락)에게 팔렸지.  클락은 몬타나주 상원의원이었지만 광산개발업자로도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는데 유타주 상원의원 Thomas Kearns(토마스 컨스)와 손잡고 유타주에서 캘리포니아 San Pedro(산 페드로)까지 연결하는 철로를 부설하는 중이었어.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출발하는 철로의 중간기착지로서 물품을 보급받고 기차수리도 하는 장소로 라스 베가스를 선정했던 거야. 


[지성]  혹시 그 클락이라는 사람이 라스 베가스 일대를 품고 있는 Clark County(클락 카운티)의 그 클락인가요?

[해월]  눈치 빨라 좋다!  맞아!  바로 그 사람이야.   19세기말에 유타주에서 라스 베가스로 대이동을 시작한 몰몬교도들이 그를 위하여 이곳에 붙인 이름이지.  그의 철로가 1905년 완성되면서 그때부터 라스 베가스가 사람들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어.  몰몬교도들의 유입과 철로근로자 및 이주민들이 들어와 풍부한 지하수를 개발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  인구가 늘고 사업체가 생기자 클락은 지금의 라스 베가스 다운타운 지역에 있는 110 에이커 땅 (약 13만 5천 평)을 600개 택지로 분할해서 경매를 시작했어. 


               [라스 베가스 택지 분할도 1905년 5월 8일.  Source - Lincoln County, Nevada]  


[지성]  주택지 경매요?  그때에도 그런 제도가 있었네요!

[해월]  정부에서도 여유분을 일반에게 무상제공하거나 경매 또는 매도를 했었으니까 개인들끼리 사고파는 것은 당연한 거래였지.  어쨌든 그 600개의 택지가 하루 만에 동이 났다고 해.  그만큼 인구와 자금이 이미 있었다는 얘기야.  그러면서 1905년 5월 15일 공식적으로 라스 베가스 시가 탄생하고, 탄생과 동시에 1909년에는 클락카운티가 또 공식적으로 발족하게 되었어.  1911년에는 라스 베가스시가 클락카운티의 일부를 구성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지.


[지성]  1905년에 라스 베가스 시가 공식으로 발족되었다면 시장도 뽑았겠고, 상가도 형성되었을 텐데 시작하는 모습이 궁금하네요.

[해월]  어느 도시나 그 시작을 알리는 모습이 화려하겠지만 라스 베가스의 시작은 우리가 그렇게 부르듯이 ‘Sin City’(죄악의 도시)라는 명예스럽지 않은 이름으로 출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그 시작의 모습은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작가의 이전글 [도성한담] 잘 살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