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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Feb 19.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1

초대 죠지 워싱턴 - 1 of  6 : 워싱턴가 창설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뉴욕지역에 사는 한인들이 시민권을 신청한 후 면접관을 만나 면접할 때 면접관이 “미국 초대 대통령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허드슨 강(Hudson River)을 가로질러 뉴저지 주로 건너가는 장엄한 다리 이름을 생각하며 ‘죠지 워싱턴’이라고 답하라 할 정도로 모든 이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의 대통령이다.  간혹 대답할 때 당황해서 끝에 ‘브릿지’ (bridge)까지 붙여서 답하는 사람이 있다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건국을 이루어 낸  미합중국의 출발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그는 4년의 임기를 마지못해 두 번 채우고 스스로 물러난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빛나는 장대하고 위대한 기록을 수립한 대통령이었다.  

처음의 13개 식민지 주와 3,929,214 명(1790년 치러진 첫 인구조사 결과임)에 달하는 인구를 대표하는 그에게 놓인 당시의 업무는 많은 것들이 처음 대하는 업무였을 것이고, 새로 만들어진 공화국의 모든 체계를 확립하면서 민주주의 국가의 후대를 위한 ‘선례’(precedents)를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양의 과제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엄청난 복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인복, 재복, 관복 그리고 일복 등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의 삶을 살았으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친자식이 없으니 자식복은 없다 하겠다.


2024년 2월 19일(월)은 그의 탄생 292주년을 기념하는 ‘대통령의 날’ (Presidents’ Day)이기도 하다.  죠지 워싱턴의 생일은 2월 22일이지만 2월 12일에 태어난 Abraham Lincoln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날짜가 가까워  함께 기리기 위해 정한 날로서, 1971년 1월 1일  발효된  '월요일공휴일 표준법' (Uniform Monday Holiday Act)에 의해 2월의 3번째 월요일로 옮겨 대통령의 날로 기리게 되었다.  

 

[桐熏]  선생님,  인류 정치사에 괄목할 만한 인물이고 위대한 업적을 쌓은 죠지 워싱턴(이후 죠지로 부름)의 출생은 어땠어요?

[海月]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 또는 국부(國父.  Father of the Nation)라 불리는 분이니까 출생부터 별스럽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나 동훈이의 출생과 별 다를 것이 있겠어?  또 수백 년 전의 환경이 그리 좋을 것이 없을 테니 신화적이나 환상적 꿈을 그릴 필요는 없겠지.  다만 그분의 탄생이 갖는 의미는 그 어느 것보다 심오한 가치가 있고 화려할 수 있다고 생각해.


[동훈]  죠지가 태어난 곳도 궁금하고 주위 가족도 궁금하네요.  

[해월] 죠지는 당시 13개 식민지 주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던 버지니아(Virginia) 주의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카운티 (County.  한국의 군에 해당함)에 있는 폽스 크릭(Pope's Creek)이라는 곳에서 당시 날짜로 1731년 2월 11일 금요일에 태어났어.  그러나 이듬해 대영제국과 미국의 식민지 주에서 그레고리언 력(Gregorian calendar.  Gregory 13세 교황 때인 1592년 채택된 태양력임)을 채택하여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죠지의 생일날이 당시의 줄리언 력 (Julian calendar.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황제 때인 서기전 45년부터 사용하던 태양력임)으로 책정된 날짜에서 1년 11일이 움직인 1732년 2월 22일로 바뀌게 되었지.    태어난 시가 알려진 바 없으니까 완전한 사주를 볼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매우 강하고 화려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리라 봐.

     죠지 워싱턴의 생가.  1779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정부에서 터를 인수함.  1931년에 신축되어 개방됨.


[동훈]  하하!  사주요?  그건 몰라도 될 것 같은데요 선생님?!  워싱턴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사주를 지금 풀면 뭐 하겠니.  그분의 살아온 세월을 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죠지의 가족사를 알려면 그의 증조부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해.  증조부가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하면서 워싱턴가를 세운 분이니까.  

고조부는 영국 옥스훠드(Oxford) 대에서 교직자로 봉직하던 로렌스 워싱턴 (Lawrence Washington.  1602 - 1652) 교구목사였어.  고조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그의 아들 쟌 워싱턴 (John Washington.  1633 – 1677. 죠지의 증조부)은 식민지와의 교역에 눈을 뜬 상인이었는데, 영국에서 상선주였던 에드워드 프리스캇 (Edward Prescott)과 함께 선박에 투자하여 버지니아 주에서 상당히 고가 상품인 담뱃잎을 수입해 유럽에 공급하고 있었지.  그러던 중 1657년 2월 28일 폭풍으로 배가 버지니아 주 포토맥 강 (Potomac River) 하류에서 좌초되자 그냥 그곳에 주저앉기로 결정하면서 워싱턴가의 미국이민이 시작되었어.


[동훈]  그러니까 미국의 워싱턴가는 1657년에 창립된 것이네요?

[해월]  맞아!  죠지의 직계선조인 증조부 쟌이 워싱턴가를 창설한 분으로 보면 돼.  쟌 워싱턴이 버지니아에 주저앉으면서 당시 민병대 대령이었던 나타니엘 포프 (Nathaniel Pope)을 만나게 되지.  동업자 프리스캇이 미국에 남겠다는 쟌에게 없는 빚을 갚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포프대령이 대신 갚아주었다고 해. 포프 대령도 영국에서 20년 전에 이민 온 사람이었는데 버지니아 주 노던 넥 (Northern Neck)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노덤버랜드 카운티 (Northumberland County)에서 행정심판관으로 일하면서 민병대에 근무하고 있었지.  포프대령의 배려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된 쟌 워싱턴은 어느새 그의 딸 앤 (Anne)과 사랑을 나누게 되고 곧이어 1659년 말 결혼까지 하게 돼.  장인이 된 포프대령은 사위에게 결혼선물로 매톡스 크릭(Mattox Creek)에 있던 농장땅 700 에이커 (약 856,800 평.  1 에이커= 1,224평)를 떼어 주었고,  농장의 운영자금까지 빌려주었는데, 나중에 유언으로 모두 탕감해 주었어.  죠지가 태어난 폽스 크릭이 이 포프대령이 소유했던 땅 일대를 말하는 것이야.


[동훈]   와!  좋았겠다!  증조부가 행운이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해월]  인복에 재복이 터진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워싱턴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비슷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어.  어쨌든 쟌은 열심히 일을 했고 1664년에는 브릿지스 크릭 (Bridges Creek)에 100 에이커 땅을 더 사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일부가 현재 ‘죠지 워싱턴 생가 국가기념지역’ (George Washington Birthplace National Monument)이 되었어.    그는 노예도 여럿 거느리는 어였한 농장주인이 되었고 주위 교회에서 직책을 갖는가 하면 카운티 정부에서 집행이사직과 검시관 그리고 지방법원의 판사직을 맡는 동시에 민병대 소령직까지 수행하는 지방의 유지가 되어가고 있었지.  1665년에는 버지니아 주 의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사망 때까지 의원직을 수행함으로써 정치인 가문의 시조가 되었지.  


[동훈]  워싱턴 가문은 시작부터가 재산가에 정치가문으로 튼튼하였네요!

[해월]  나도 그렇게 생각해!  1675년에 이르러선 주위 어메리칸 인디언 (American Indian)들의 공격으로 백인주민들이 살해당하는 등 피해가 커지자 이웃 지역 민병대와 합동으로 메릴랜드  주 지역의 도에그(Doeg) 족과 써스키하녹 (Susquehannock) 족 인디언들에게 보복을 하게 되었는데,  써스키하녹 족은 그들을 살육한 쟌 워싱턴 대령에게 ‘마을 파괴자’ (Town Destroyer)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해.  그런데 이 별명은 그대로 약 80년 후 벌어진 French-Indian War (후렌치-인디언 전쟁.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미국 동부에서 싸운 전쟁임) 때 버지니아 민병대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해서 세네카(Seneca) 족을 공격한 죠지에게 세네카 족이 선조들의 역사를 되새기는 뜻으로 그대로 물려주었다고 해.


[동훈]  워싱턴의 증조부가 미국 내 워싱턴가의 시조로 역할을 톡톡히 했네요, 선생님.

[해월]  장인의 도움을 소중히 받아들여 최선을 다한 그는 첫 부인 앤과 사이에 첫아들 로렌스 (Lawrence. 1659-1698), 둘째 아들 쟌 주니어 (John Jr.  쟌 2세. 1661-1698 ), 첫 딸 앤 (Anne.  1662-1697)과 더불어 일찍 사망한 두 아이를 포함해 모두 5 자녀를 두었지.  첫 부인이 사망하자 그 뒤 두 번 더 결혼을 했지만 더 이상의 자녀는 없었어.  1677년에 사망한 그가 소유했던 농장은  8,500 에이커 (약 1천4십만 평) 규모로 커져있었고,  정치인과 군인 등 사회적으로 덕망 있는 워싱턴가 시조로서 후대가 발전하는 발판을 단단히 다졌다고 볼 수 있을 거야.  그의 유해는 버지니아주 코로니얼 비치 (Colonial Beach)에 있는 ‘죠지 워싱턴 생가 국가기념지역’  내에  첫 부인과 함께 가장 큰 무덤에 안장되어 있어. 


[동훈]  죠지의 성장에 가장 영향을 끼친 분은 아무래도 부친이겠지요?

[해월]  맞지!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분들이 자식의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러나 워싱턴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 윗분들을 조금 더 들여다봐야 할 거야.  최소한 할아버지되는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의 생애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동훈]  죠지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귀여움을 받았나요?

[해월]  불행히도 그 대답은 ‘노’야!  할아버지는 약관 38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손자 죠지의 얼굴을 볼 기쁨을 갖지 못했지.  하늘에서 축복을 많이 내려주셨을 거야.


[동훈]  그런데 할아버지의 성함이 죠지의 고조부와 같네요?

[해월]  맞아!  당시 사람들은 윗대 분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존함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요즘은 2세 (Junior.  약칭 Jr.), 3세 (III.  3rd) 또는 4세 (IV.  4th)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말이야.  


[동훈]  로렌스 할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해월]  한마디로 매우 바쁘게 사신 분이었지.  1659년 9월에 아버지 쟌이 운영하던 메톡스 크릭 농장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농장주, 노예소유주, 변호사, 군인 그리고 정치인의 삶을 열심히 산 국가의 일꾼이었지.  


[동훈]  아버지 쟌 워싱턴과 비슷한 삶을 산 것 같네요.

[해월]  로렌스는 5살 때 가족과 함께 브릿지스 크릭 농장으로 이전했고,  자라면서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다 영국으로 가 법률공부를 하고 돌아왔지.  아버지 쟌이 사망한 시점에 로렌스는 ‘장자상속권’을 통해 18살 나이로 메톡스 크릭에 있는 농장 1,850 에이커와 리틀 헌팅 크릭 (Little Hunting Creek) 농장 (후에 손자인 로렌스 워싱턴에 의해 Mount Vernon으로 개명됨) 2,500 에이커 등 대부분의 농장 등을 상속받게 돼.  로렌스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더 이상의 땅을 늘리지는 않았는데, 농장경영보다는 변호사나 정치인 역할을 더 소중히 여겼다는 증거라고 보고 있어.  땅을 더 늘리지 않은 대신 엄청난 현금과 32,509 파운드의 담뱃잎 (상당한 가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을 농장과 함께 유산으로 남겼어.


[동훈]  농장주인으로서  사회적 지위에 더 관심이 많았었군요?

[해월]  로렌스가 버지니아 주 정가에 진출한 것은 농장주라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이라고 볼 수 있어. 버지니아 주 의회 하원인 ‘하우스 어브 버저시스’ (House of Burgesses)에서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를 대변하는 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것은 그가 25살 때인 1684년이었는데 3번이나 연속 당선되면서 근 10년 동안 사망할 때까지 하원의원 생활을 했어.   카운티 일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80에 행정심판관 직책을 맡으면서인데, 후에는 카운티 치안담당책임자인 쉐리프 (Sheriff) 직도 2년간이나 맡았고, 아버지가 맡았던 카운티 검시관 직책도 이어받기도 했어.  1684년에는 카운티 민병대에서 대령으로 진급했지.  


[동훈]  정말 대단들 하네요.  한 몸에 몇 지게를 지고 살아갔으니 말이에요!

[해월]  그러니 대단한 집안으로 생각되는 거야.  29살 때인 1688년에는 인근 그라스터 (Gloucester) 카운티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오거스틴 워너 주니어 (Augustine Warner Jr. 1642 – 1681)의 딸 밀드레드 (Mildred)와 결혼하게 돼.  오거스틴 워너 주니어는 부친이 일궈 논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아 농장주인이면서 민병대 대령의 지위 그리고 하원의원, 하원의장 그리고 상원의원까지 지냈던 인물이지.  영국 런던에 건너가 교육을 받은 오거스틴 워너 주니어는 버지니아 주 국무장관이던 죠지 뤼드 (George Reade)의 딸 밀드래드 (Mildred Reade)와 결혼하면서 정계진출의 연을 만들기도 했어.  

한편 워너의 딸과 결혼한 로렌스는 1698년 사망하기까지 10년 동안 그녀와의 사이에서 첫아들 쟌 3세 (John Washington III. 1692–1746), 둘째 아들 오거스틴 (Augustine Washington.  죠지의 부친.  1694 – 1743) 그리고 딸 밀드레드 (Mildred Washington.  1698–1747)를 낳았어.  그의 유해는 브릿지 크릭에 있는 가족묘에 안장되어 있지.


[동훈]  죠지의 할아버지 로렌스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아버지에 못지않은 많은 일을 했네요.  특히 대를 잇는 훌륭한 자식을 두었고요.

[해월]  헌데, 그가 사망하고 나서 미망인 밀드레드는 죠지 게일 (George Gale)이라는 사람에게 재가해 갔는데, 게일은 새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영국의 와잇해븐 (Whitehaven)이라는 곳으로 이주해 버렸지.   밀드레드는 3년 후 그곳에서 아이를 출산하다 30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어.  사망하기 전에 새 남편 게일을 세 아이들의 보호자로 선정했지만 생부 로렌스의 조카인 쟌 워싱턴이 세 아이들에 대한  양육권 청원에 성공하여 다시 버지니아로 데려오는 일이 벌어졌어.  그 아이들은 생부의 재산을 후에 상속받게 되어 부를 이어가게 되었고, 사촌형 쟌은 무상으로 그 부를 후견인 입장에서 한동안 누렸었지.


[동훈]  죠지의 아버지 오거스틴의 어린 시절이 평탄치만은 않았네요, 선생님?

[해월]  오거스틴 워싱턴의 어린 시절은 동훈이가 말했듯이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  4살 때 아버지가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곧 사망했으니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모양세지. 다행히 사촌형이 있어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도움을 주어서 성장에 문제가 없었고, 부친의 유산도 무사히 물려받을 수 있었지.


[동훈]  오거스틴의 아버지 로렌스는 부동산을 포함해 재산이 많이 있었으니까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을까요?

[해월]  그랬을 거야.  오거스틴이 21살 성년이 되었을 때인 1715년 정식으로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그때 상속받은 땅이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 브릿지 크릭에 있는 1,000 에이커 (약 125만 평) 농장이었어.  여동생 밀드래드는 리틀 헌팅 크릭의 농장을 상속받았고.  이때 노예들도 함께 상속받게 되었지.


[동훈]   죠지의 아버지 오거스틴은 어떤 삶을 살았나요?

[해월]  오거스틴도 길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48세에 사망했으니 말이야.  그는 정치보다는 농장과 사업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  아버지와는 달리 의회 의원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공회 교회, 지역 민병대, 카운티 행정심판관 그리고 카운티 치안책임자 등 일은 자원해서 했지.  우선 그는 1718년에 그의 농장 인근에 있는 폽스 크릭 (Pope’s Creek)의 땅을 사들이면서 그곳에 저택을 지었어 (후에 웨이크휠드(Wakefield)라 불림.  죠지가 태어난 생가임.  현재는 국립공원국에서 관리).  집이 완성된 1726년경 여동생이 소유하고 있던 리틀 헌팅 크릭의 농장도 그녀로부터 사들였지.  

     

[동훈]  땅부자가 되기 시작했네요!

[해월]  농장하나의 규모가 보통 100만 평은 넘으니까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게 됨 셈이지.  농장으로서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그것이 삶의 근본이고 사회적 지위의 척도니까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한편 그는 1725년에 영국의 철광회사 프린시피오 사(Principio Company)와 버지니아 주 스테훠드 (Stafford) 카운티 아카킥 크릭 (Accokeek Creek)에 철광산을 개발하는 계약을 맺고 사업을 시작했어.  메릴랜드 주에도 동업으로 철광산을 개발하기도 했지.  그러면서 1735년에는 아카킥 용광로 근처에 있는 리틀 헌팅 크릭(후에 마운트 버논으로 개명됨)으로 이사하기도 했지.  


[동훈]  농장도 늘려가면서 집도 짓고 또 광산업도 하는 만능의 아버지였네요.  

[해월]  나중에 그 아버지의 피를 죠지가 확실히 받았음을 알게 될 거야.  1738년 들어 스테훠드 카운티 후레데릭스버그 (Fredericksburg) 시 인근 레파하녹 강 (Rappahannock River) 건너편에 있는 스트로더 농장 (Strother property) 150 에이커를 사들이며 그해 말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어.  죠지가 6살 때의 일인데 이곳이 죠지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되었고 나중에 훼리 홤 (Ferry Farm)이라고 불리면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어.  

         죠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  1740년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8년 신축되어 일반에 개방됨.


[동훈]  이사를 자주 했네요.  어렸을 때 이사 자주 하면 아이들은 싫어하는데요.  

[해월]  네 말이 맞아.  아이들에게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순간이긴 하지.  부모님의 환경변화에 맞추는 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운 숙명이야.  여기서 잠깐 오거스틴의 가족을 살펴볼까?  오거스틴은 그가 성년이 되었던 1715년 유산 상속을 하면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제인 버틀러 (Jane Butler.  1699 - 1728)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어.  그녀도 당시 아버지 카렙 버틀러 (Caleb Butler)가 사망한 뒤 유산으로 640 에이커 (약 78만 평)의 땅을 상속받아 가지고 있었지.   이 두 사람은 결혼 후 브릿지 크릭에 자리 잡고 네 아이를 두었어.  큰 아들 버틀러 (Butler.  1716-1716), 차남 로렌스 (Lawrence.  1718–1752), 3남 오거스틴 주니어 (Augustine Jr.  1720–1762) 그리고 장녀 제인 (Jane.  1722–1735)을 두었는데 이 중 장남과 장녀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어.


[동훈]  죠지의 이복 큰형과 큰누이가 오래 살지 못해 안타깝네요.

[해월]  큰 아들과 장녀를 잃은 슬픔이 컸겠지.  그리고 부인마저 1729년에 서른 살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어. 2년 후에 둘째 부인 메리 볼 (Mary Ball.  1709 - 1789)을 맞아 여섯 자녀를 두었어.  그녀는 랭케스터 (Lancaster) 카운티에 있는 농장 주인 조셉 볼 (Joseph Ball.  1649 - 1711) 대령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메리 쟌슨 볼 (Mary Johnson Ball.  1672 – 1721)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어.  어렸을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자 변호사로 있던 죠지 에스크릿지 (George Eskridge)가 보호자로 양육을 맡았는데 22살 때인 1731년 오거스틴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지.  결혼시점에 그녀는 1,000 에이커 (약 124만 평)에 달하는 농장 땅을 상속받아 가지고 있었어.  이들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 장남 죠지 워싱턴이 태어났고, 장녀 에리자베스 ‘베리’(Elizabeth ‘Betty’.  1733 – 1797), 차남 사무엘 (Samuel.  1734 – 1781), 3남 쟌 오거스틴 (John Augustine.  1736 – 1787), 4남 찰스 (Charles.  1738 – 1799) 그리고 차녀 밀드레드 (Mildred.  1739 – 1740)를 두었지.  그러나 이번에도 막내 밀드레드는 아주 어렸을 때 곁을 떠나고 말았어.


                            부: 오거스틴  워싱턴 시니어                   모:  메리 볼


[동훈]  아!  주인공 죠지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군요.  그럼 태어났을 때 이미 이복형이 두 분이나 계셨네요.

[해월]  계셨지!  특히 큰형 로렌스는 성품 좋은 사람으로 그를 끔찍이도 이뻐해서 많은 도움을 주는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해.  아버지를 일찍 잃은 죠지에게는 형 로렌스가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  죠지가 인복이 있었다는 의미의 첫 시작을 맡은 사람이야.  죠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스트로더 농장과 10명의 노예들을 물려받아서 11살의 나이에 이미 커다란 부자가 되었고.  다만 아직 미성년자라 어머니가 농장을 관리하고 계시다 나중에 성년이 되면서 단독으로 소유하게 되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형 로렌스는 리틀 헌팅 크릭의 농장을 유산으로 받았는데 나중에 그가 1741년 전투에 참전했을 때 모셨던 대영제국 해군 에드워드 버논 (Edward Vernon) 제독을 기리는 뜻으로 농장의 이름을 마운트 버논 (Mount Vernon)으로 바꾸었지.   이 마운트 버논이 형 로렌스 사망 후에 20세였던 죠지의 집이 되었고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자 뭏혀있는 곳이기도 해.

        죠지의 사망 시까지 거주했던 마운트 버논의 전경.  세계적 관광지이자 미국의 국가사적지이다.


[동훈]  마운트 버논은 그럼 형이 유산으로 받았던 곳이네요!  마운트 버논 이란 곳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해월]  물론이지.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외국의 원수들이 미국에 국빈방문할 때도 다녀가는 곳이지.  그곳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  아버지 오거스틴 시니어가 유언을 만들면서 이 리틀 헌팅 크릭 농장을 큰 아들 로렌스에게 물려주긴 하는데, 만약 로렌스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면 차남 오거스틴 주니어에게 넘겨주고, 그 대신 차남은 가지고 있던 폽스 크릭 농장을 죠지에게 넘겨주라고 했어.  그런데 만약 차남이 리틀 헌팅 클릭 농장을 원치 않는다면 이를 죠지에게 넘겨주라는 것이지.  정작 로렌스의 유일생존 자식이었던 사라 (Sarah)가 1754년 사망했고, 차남 오거스틴 주니어는 폽스 크릭 농장과 노예들을 지키기로 하면서 결국 죠지의 몫이 된 거야.  그러나 로렌스의 부인 앤 (Ann) 이 미망인으로서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그녀마저도 재혼해 떠나면서 1754년에 죠지에게 임대 형식으로 사용하게 하다가 1761년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죠지의 단독소유가 되었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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