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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Mar 25.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3

초대 죠지 워싱턴 - 3 of 6 : 결혼과 정치 1759 - 1775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동훈]  전장에서의 무거운 전투의 짐을 벗어난 죠지이지만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도 민병대를 지휘하며 군생활을 계속했네요, 선생님.

[海月]  죠지의 삶은 어쩌면 전투 그 자체인지도 모르지.  18살부터 군복을 입기 시작한 그가 독립전쟁 당시 미합중국 군대가 창설되어 그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이 우연일 수가 없지.  

고향으로 돌아온 죠지는 26살의 장년이 되던 해인 1759년 1월 6일 '말사 덴드뤼지 커스티스'(Martha Dandridge Custis.  1731.6.2 – 1802.5.22)를 부인으로 맞이했어.    말사는 버지니아 주 뉴 캔트 카운티 (New Kent County)에 있는 체스넛 그로브(Chestnut Grove) 농장을 운영하던 '쟌 덴드뤼지'(John Dandridge.  1700 - 1756) 대령과 '후랜시스 올란도 죤스'(Frances Orlando Jones.  1710 - 1785) 사이의 3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지.  부친이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사교성이 좋아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었고 그녀도 고귀한 집안의 규수처럼 자라났어.  농장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준 있는 교육도 받았는데 특히 승마를 좋아해 말을 즐겨 타면서 승마실력을 자랑하기도 했어.  부창부수 극명한 예였어. 


Martha Washington  1731 - 1802


[동훈]  죠지의 부인이라면 나중에 미국의 초대 영부인이 되고 국모가 될 텐데, 8형제의 맏이로 태어났으니 인성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잘 받으며 자랐을 것 같은데요?

[해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특히 막내 여동생이 자기보다 25살이나 어린 상태인 맏이가 가정생활에서 맡았던 역할은 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마치 어머니 같은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해. 


[동훈]  그런 여인이 죠지를 만났으니 대단한 역사가 창출된 것 아니겠어요?

[해월]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말사가 처녀로 죠지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지.  왜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어.  위에서 그녀의 이름을 소개할 때 느꼈겠지만  말사는 16살 때 다니던 교회에서 같은 교회의 교구위원이던 '데니얼 파크 커스티스'(Daniel Parke Custis.  1711 - 1757)라는 남자를 만나게 돼. 

데니얼은 버지니아 주 노햄턴 카운티(Northampton County)에 거주하는 농장주이자 정치가, 공무원 그리고 민병대 대령이던 '쟌 커스티스 4세'(John Custis IV.  1679 – 1749)의 아들이었지.  그의 아버지 쟌은 엄청난 부자인 데다 명망 있는 정치인으로 아들의 부인감을 까다롭게 고르고 있었는데 처음엔 말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  그러나 말사가 이 까다로운 데니얼의 아버지 마음을 돌려놓아가는 과정에 건강이 악화된 쟌은 1749년 11월 22일 사망하고 말아.  그 후 이 두 사람은 만난 지 2년이 지난 1750년 5월 15일 결혼하게 돼.  이때 말사의 남편은 이미 39살이었어.  


[동훈]  저런!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라고 하네요.  왜?!

[해월]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참 그래!   앞으로 탄생할 미합중국의 첫 국모가 될 분이었으니 그 무슨 뜻이 있는 운명이었겠지.   이들 부부는 데니얼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뉴 캔트 카운티의 화잇 하우스(White House)라고 불리는 농장에 자리를 잡고 네 아이를 나았어.  '데니얼 주니어'(1751 – 1754), '후렌시스 파크 커스티스'(1753 – 1757), '쟌 파크 잭키 커스티스'(John Parke “Jacky” Custis.  1754 – 1781), 그리고 '말사 파크 펫시 커스티스'(Martha Parke “Patsy” Custis.  1756 – 1773)가 그들인데 첫째와 둘째는 겨우 3~4 살 때 사망하게 돼.


[동훈]  당시 미국에 살던 사람들의 생이 참 짧아요.  유아사망률도 상당히 높았겠어요!

[해월]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현대인이 가장 오래 사는 것 같아.  통계수치로는 300년 전 미국사람들의  출생 후 평균연령이 35세에서 40세밖에 되지 않아.  요즘은 근 80세가 되잖아?  


[동훈]  왜 그렇게 밖에는 못살았을까요?

[해월]  글쎄?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 중에 그때 사람들에게는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대충 알 수 있겠지?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 위생환경이 아니겠나 싶어.  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의식주(衣食住)’인데 그것이 완전치 못하면 호시탐탐 노리는 질병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겠지.  마시는 물은 더더욱 그렇고.


[동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선생님.  좋은 음식 골라 먹고, 춘하추동 변덕 날씨 견디는 편한 집에서 살고, 마음대로 옷도 갈아입으면서 살고 있는 이 현실이 고마운 줄 모르고 사는데, 수백 년 전에는 그것이 어려웠겠지요.

[해월]  그렇게 재미있게 살만할 때 남편 데니얼이 후두염증을 앓으면서 고생하다 46살의 나이로 1757년 7월 8일 사망하고 말아.  결혼한 지 7년밖에 안 되었는데 졸지에 과부가 된 말사에게는 너무 큰 일이었을 거야.  젊은 나이에 생존해 있는 두 아이를 키워야 하고 남편을 잃은 슬픔과 1년 전에 사망한 부친에 대한 슬픔까지 이겨내야 했지.  특히 사망당시 남편 데니얼이 관리하던 농장들과 노예들 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26살 말사가 감당하기에 참 어려웠을 거야.  토지의 규모가 5개 카운티에 걸쳐 자그마치 17,779 에이커(약 2천2백만 평)이었고 노예도 85명이나 되었으니 말이야.   말사의 회고록에 보면 그녀는 “5개 카운티에 걸쳐 널려있는 5곳의 농장을 운영해야 하고  노예들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데다 영국의 상인들과 담뱃잎 가격을 흥정해야 하는 입장으로 너무 힘들었다”는 대목이 나오지.


Martha Dandridge Custis 1757



[동훈]  아이고!  그건 웬만한 남자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네요!  요즘말로 하면 큰 사업가잖아요?

[해월]  그런 일을 헤쳐나갈 정도의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지!   졸지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장의 역할을 해 나갔어야 하니까 솔직히 말해 좋은 사람 만나 무거운 짐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야.  운명의 시작은 그때 또 새로운 싹을 틔우기 시작했지.  


[동훈]  까다롭다는 시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안 계셨으니 저도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해월]  말사는 당시 이미 13개 식민지 주에서 소문난 부자 미망인이었고 사회적 지위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유지가 되어있었지.  그리고 젊은 나이에 군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농장소유주로서 버지니아 주 사회에 널리 알려진 죠지 워싱턴도 아마 남편감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거야.  이런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758년 5월로, 두 사람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의 '채임버린'

(Chamberlayne) 민병대 대령이 다리를 놓아주었어.   그의 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날 저녁 그 집에서 함께 보내면서 서로의 운명을 감지한 것 같아.  그리고는 그다음 해  1759년 1월 6일 아직 27살이 채 되지 못한 죠지와 27살을 넘긴 말사 두 사람은 그녀의 거처인 화잇 하우스 농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40년 부부생활을 시작했지.


[동훈]  와!  드디어 죠지 워싱턴 부부가 탄생하는 순간이네요!  

[해월]  당시 화잇 하우스 농장에 하객이 얼마나 모였는지 모르겠지만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둘이 앞으로 탄생할 미합중국을 이끌 ‘건국의 아버지와 그 부인’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거야.  그냥 훌륭하고 부유한 커플의 출발을 아낌없이 축하는 해 주었겠지만. 


Marriage of George Washington and Martha Dandridge Custis 1759. 1. 6.


[동훈]  말사가 미망인이 되면서 데니얼의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해월]  저런!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역시 젊은 사람 계산은 빨리 돌아가는구나!  허기야 적은 재산이 아니니까 모두가 궁금하겠지.  죠지는 이미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죠지는 아마 말사의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말사의 첫 남편 데니얼의 사망은 예견치 못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아.  후두염증이 심해지면서 ‘심장마비’가 왔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니.  결국 데니얼은 유언장을 만들지 못하고 사망했어.  당시 법으로 가장(남편)이 유언 없이 사망한 경우 재산을 유족수대로 나누었는데, 말사는 데니얼의 유산 3분의 1을 ‘미망인’(dower) 자격으로 소유하게 되었고, 나머지 3분의 2는 생존한 두 자녀, 제키와 펫씨에게 물려주게 되었지만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의붓아버지인 죠지가 유산관리인 자격으로 맡게 되었지.  다시 말하면 죠지의 입장에서는 그가 말사와 결혼함으로써 부인 및 그 자녀들의 재산들도 함께 소유 또는 관리하는 거부가 된 것이고, 그럼으로써 버지니아에서 가장 부자이면서 더불어 사회적 지위도 그만큼 향상된 인물이 되었지.


[동훈]  죠지의 인복과 재복 말씀하시더니 바로 그 말씀이시네요!

[해월]  재복으로 말하면 요즘의 재벌이 더 많겠지만 당시 27세 밖에 안 된 죠지 입장에서 본다면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지속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야.  게다가 군에 근무하면서 전투에 임하고 있을 때에도 앞서 말한 훠브 사령관 밑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던 그가 부동산만큼은 알차게 챙겼던 것도 마치 전투 같은 모습이었어.  1754년 당시 딘위디 부주지사가 그를 민병대 지휘관으로 임명하며 파병했을 때 민병대 전투병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었는데, 새 주지사 '보테토트 경'(Lord Botetourt)에게 이때의 약속을 환기시켜면서 자그마치 23,200 에이커 (약 2천8백만 평)를 받아냈고, 군인들에게 배당되었던 20,147 에이커 땅에 대해서는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이들 땅이 언덕에 있는 데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라고 설명해 헐값에 사들이는 수완을 발휘했다고 해.  그러면서 2,500 에이커였던 마운트 버논 농장 땅도 6,500 에이커로 늘리고 노예의 수도 계속 늘려나가 1775년에는 100여 명의 노예를 소유하게 되었어.


[동훈]  말씀 듣고 보니 죠지는 이재에도 매우 밝았었네요!

[해월]  그것뿐 아니지. 부농에다 다수의 노예를 소유한 군 지휘관으로서 지방정치에도 일찍 발을 들여놓았지. 22살 때인 1755년에 주의회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죠지는 처음으로 출마한 선거에서 낙방이라는 경험을 하지.  1758년에 재도전한 죠지는 주위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권자들에게 맥주와 브랜디 그리고 귀한 음료수를 대접하면서 한 표를 부탁했다는 얘기가 있어.  옛날 한국 선거에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라는 용어가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경우를 연출했던 것 같아.  그때는 훠브 장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던 죠지였는데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도와주는 바람에 40퍼센트의 지지표를 확보하면서 세명이나 더 출마한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거야.  유세한번 안 하고 치렀던 선거였지만 본인의 출신카운티는 물론이고 버지니아 주를 위해 전투 중인 죠지를 사람들은 무한히 신뢰한 거지.  지금이나 그때나 금권선거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지?


[동훈]  선거에서 부정부패를 빼면 선거특수 노리는 사람들 굶어요, 선생님.  그럼 군지휘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하원의원 신분이었다는 거네요?

[해월]  맞아!  1775년 독립전쟁을 위해 출정할 때까지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이었어.  그러면서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발언한 적도 없었지만 나중에 영국에서 식민지에 세금을 매기고 상품관리를 불합리하게 하는 정책에는 강력히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지.  점점 버지니아 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죠지는 1768년부터 1775년 사이 그의 집 마운트 버논에 2,000 명에 달하는 손님을 초청해서 극진히 대접했다고 해.  모두들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었겠지만 말이야.  사교를 능숙히 해 나가며 여러 사람들과 사냥도 하고 낚시를 즐기고 무도회, 연극, 카드게임 등도 하면서 사교계 및 정치계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미래의 큰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덕망을 쌓아가고 있었겠지.    


[동훈]  정치인 죠지의 등장이 매우 화려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해월]  절대 초라하지는 않았지.  식민지 버지니아 주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던 죠지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왔던 것은 역사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봐.  민병대 지휘관으로서 영국군과 함께 영국을 위해 싸웠던 그가 영제국 정규군 편입에 수차례 거부되는 경험을 겪으면서 영국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고, 그 시점부터 전개되는 영국정부의 대 식민지 정책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전면 거부 또는 저항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지.  


[동훈]  어쩌면 영국의 대 식민지 정책변화가 죠지의 정치입문을 돕는 발판이 되지 않았을까요?

[해월]  식민지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이고 정치기반을 닦는 기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  죠지에게도

그 첫 번째 도전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부채가 증가하는 등 재정의 어려움을 겪게 된 영제국에서 식민지에 세금을 걷기 시작하자 ‘대표 없는 과세’를 거부하면서 저항하는 행동이었지.   식민지에서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직물, 와인, 커피, 설탕 등에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는 1764년의 ‘설탕법'(Sugar Act)과 13개 식민지 주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가치를 폭락시킬 수밖에 없는 화폐발행금지법인 1764년의 ‘통화법'(Currency Act) 그리고 식민지인들이 영국군인들에게 거처와 음식을 제공하도록 강요한 1765년의 ‘주거법'(Quartering Act)으로 식민지 사람들의 감정은 폭발직전이었어.   한술 더 떠 영국의 의회에서는 자국 의회 의원들은 비록 식민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식민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고 대표하여 법을 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명 ‘가상 대표성’ (Virtual Representation)을 가지고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지.


[동훈]  영국이 신대륙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두겠다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 미국의 독립을 부추기게 된 계산치 못한 시한폭탄이었던 것 같네요, 선생님.

[해월]  잘 봤어!  1763년에 영국의 수상으로 선임된 '죠지 그랜빌'(George Glenville)은 식민지 사람들이 오랫동안 영국의 보호를 받아왔다고 규정하고, 그들 식민지 사람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거둔다 해도 그동안 보호해 준 보상으로 얼마든지 징세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어.  큰 실수를 저지르는 순간이었지.  

위에서 언급한 여러 세금법안만 하더라도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불만이 가득한데 여기에다 불을 지른 것이 1765년 영의회에서 제정한 ‘인지세법'(Stamp Act.  Duties of American Colonies Act 1765라고도 함)이야.  그랜빌 수상이 영국의회에서 밀어붙인 이 인지세법은 식민지 인구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세 성격의 세금인데 이것이 발표되자 죠지는 이를 “식민지를 억압하는 법”이라고 규정하고 급기야 주위와 규합하여 영국정부에 항의하기 시작했지.  


[동훈]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진출해서 식민지를 건설한 뒤 100년이 지나도록 별 탈 없이 지냈는데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식민지 사람들의 감정을 거슬리는 정책을 펴면서 양쪽 간의 골이 매우 깊어지네요.

[해월]  100여 년이란 세월 동안 영국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야.  모국이라 생각하며 살아왔고 군주로 모시던 왕이 이제는 자유를 속박하는 독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식민지 사람들의 사고가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새로운 정치개념에 눈이 떠가는 과정이야.  

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선 대표를 영국의회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영국의회 의원들 중에서도 공감하는 의원이 제법 있었던 것 같아.


[동훈]  죽어서도 쫓아다니는 것이 국가의 세금이라잖아요?  그런 세금을 안 내고 살다가 날벼락을 맞았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겠지요.   

[해월]  맞아!  아무튼 인지세법으로 과세를 하겠다고 하니 온 식민지가 들썩이고 매일 시위대가 전국에서 떠들어대었지.  결국 식민지 지도자들이 영국에 항의하기 위해 '스탬프법 회의'(Stamp Act Congress)라는 긴급 모임을 만들어 대표들이 항의서를 만들어 영국에 보내기에 이르렀지.  영국에서는 식민지의 엄청난 항의 소식을 접하여 의회에서 새로운 토의를 하게 되었어.  이때 새로 부임한 '윌리엄 핏'(William Pitt) 수상이 식민지에 대한 과세가 부당함을 주장하고 인지세법을 폐지할 것을 제안했어.  미국에서 영국으로 파견한 밴자민 후랭클린이 의회에 출두하여 인지세법으로 인한 양쪽 간의 이해득실을 잘 설명하여 결론적으로 이 법안은 의회에서 폐지키로 결정하고 왕이 재가함으로써 1766년 3월 18일부로 폐지되었어.   그러면서도 영국의회는 동시에 ‘선언법'(Declaratory Act)을 제정하여 영국의회법이 식민지법에 우선한다는 또 속 터지는 법을 만들어 발표하고 식민지 사람들이 시위하면서 입힌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지.  

인지세법이 폐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사추세츠 주 데드햄(Dedham) 시에서는 시민결사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의 데드햄 지부사람들이 앞장서 인지세법 폐지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어.  '자유의 탑'(Pillar of Liverty)이라 불리는 이 기념탑은 안내문과 더불어 폐지를 주장했던 영국 수상 윌리엄 핏의 흉상을 위에 모셨었는데 지금은 탑 부분만 남아있지.


Pillar of Liberty - 후대에 동판을 새로 만들어 넣은 것임


[동훈]  거센 반발을 가져온 인지세법이 폐지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이네요.

[해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거기에서 그칠 영국인들은 아니었던 거지.  세금을 거두는 법들을 제정하더니 급기야 식민지인들이 미래의 먹거리로 생각해 오던 서쪽의 땅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지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어.  앞서 살펴보았던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이  1763년 ‘파리협약’ (Treaty of Paris)으로 마무리되면서 프랑스가 자국이 지배하던  북미의 영토를 영국에게 이관하게 돼.  그러면서 영국의 죠지 3세(George III)가 동부의 아팔라치안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남북으로 나누는 선을 긋고 그 서부로 식민지인들이 진출하는 것을 금한다는 ‘1763년의 영국왕실칙령’ (Royal Proclamation of 1763)을 발표했어.


[동훈]  아팔라치안 산맥이라면 미 동부 끝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영국에서 북미 대륙 전체를 가질 테니 식민지 사람들은 동부의 조그만 지역에서 살라는 기가 막힐 얘기네요.


1763년 현재의 북미 경계도.  붉은색이 13개 식민지 주 영역이고, 핑크색이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얻은 지역임.


[해월]  위 지도에서도 보겠지만 붉은색 왼쪽 옆의 오렌지색 땅을 명목상 미국원주민들을 위한 땅으로 보전하니 넘보지 말라는 것이었지.  결국 식민지인들을 동부에 가두어놓고 통치하겠다는 뜻이라고 보여.  상황이 이렇게 되니 미래가 암담해진 식민지 사람들은 전체 13개 주에서 영국에 항의하는 시위를 또 벌이게 된 것이야.  죠지는 예전부터 토지 측량사로서 서부를 많이 왕래하며 좋은 위치의 땅을 사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하던 사람인데 영국정부의 칙령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지.


[동훈]  식민지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신대륙을 영원히 지배할 생각이었나 보죠?

[해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영국이었지.  더 나아가 영국정부는 미 식민지에 파견된 주지사와 판사 등 공직자들과 군인 등 1만여 명의 급료 및 처우개선을 위해 식민지에서의 세입을 늘리고, 무역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동시에 1765년의 주택법 시행을 위반하고 있는 뉴욕주를 심판하고 영국의회가 식민지에 과세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전례를 만들기 위해 1767년에 여러 법안을 남발하게 되었어.  ‘타운센드 제법’(Townshend Acts)으로 불리는 징세법들을 막무가내로 시행하자 전국의 식민지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데모를 하고, 지역 언론들도 대서특필하게 되었지.   지금도 툭하면 데모하는 미국사람들이잖아!


[동훈]  영제국에서 식민지 사람들의 감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네요!

[해월]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전쟁부채가 많은 영국정부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길거리로 몰려나온 보스턴 시민들이 과격한 행동을 시작하고 영국군을 향해 욕설을 퍼붓게 되자 영국군이 수백 명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지.  1770년 3월 5일 발생한 이 사건을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라고 해.  영국군의 강압적인 진압에 맞선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 주의 일부 사람들은 1772년 6월 9일 로드 아일랜드 뉴폿 해상에서 근무 중이던  세관선 개스피(Gaspee) 호에 승선하여 배를 태워버리고 말아.  

그 후 영국 의회에서 식민지를 뒤흔든 '타운센드 법' 대부분을 식민지 사람들의 반발로 없던 일로 하지만 영국에서 식민지로 수입해 가는 차(茶)에 대한 관세는 계속 거두도록 1773년에 ‘차 법’ (Tea Act)을 제정하게 되었어.  법 제정에 이골이 난 영국의회의 새로운 도발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1773년 5월 10일 ‘영국동인도회사’ (British East India Company)로부터 수입한 차를 잔뜩 싣고 보스턴 항으로 들어와 정박한 '다트머스'(Dartmouth) 호에 미국인디언 복장을 하고 승선하여 차가 들어있는 상자를 보스턴 항만으로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어.  이를 ‘보스턴 티 파티’ (Boston Tea Party.  맨 위 사진 참조)라고 하는데, 이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은 이를 반역이라 규정하고 곧 1774년에는 ‘참을 수 없는 법’ 또는 ‘강압 법’ (Intolerable Acts or Coercive Acts)이라 불리는 다섯 가지의 법들을 제정, 메사추세츠 주 자치정부를 폐쇄하고 보스턴 내 상거래를 중단시키는 조치를 내리고 말아.  

[동훈]  사태가 점점 험악해지네요, 선생님.

[해월]  앞서 1765년에 제정된 ‘스탬프 법’은 식민지 시민 일상생활에 직접적 영향이 미치는 직접세로서 당시 발행되는 인쇄물들, 즉 신문, 잡지, 책, 엽서, 선전물 등 모든 간행물에 인지를 사서 붙여야 하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지.  이때부터 식민지 전역에서는 영국정부 및 의회 그리고 식민지에서 시행되는 각종 법에 대항하는 지하세력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어.  이 결사조직 중의 하나가 앞서 말한 ‘자유의 아들들’ (Sons of Liberty)로 알려졌고, 이들이 위에서 말한 ‘보스턴 티 파티’를 포함한 여러 파괴공작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이었지.  이들은 길거리로 나서서 목청을 높여 ‘영국출신 식민지인들의 권리’(Rights of Englishmen), ‘대표자 없는 과세 거부’(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했지.


[동훈]  독립전쟁 직전에 영국의 독선적 정치에 대항하는 당시 미국인들의 모습이 마치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분들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해월]  동훈이 말에 동감해.  1770년대 미국인들의 마음과 1919년 조선인들의 마음에 별 다름은 없을 것 같아.  버지니아 주의 유지였던 죠지도 영국의 처사에 불만이 컸지.  특히 위에 말한 영국의회의 ‘강압법’이 제정되자 ‘우리를 노예취급하는 폭정에 굴해서는 안 된다’며 죠지 메이슨을 포함한 훼어훽스 카운티 사람들과 함께 1774년에 ‘Fairfax Resolves’ (훼어훽스 결의안)라는 항의문을 만들지.  이때 대서양에서의 노예거래를 중단한다는 항의성 결의문도 같이 삽입되었어.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1차 버지니아 회의’(First Virginia Convention.  주 의회를 대체하는 최고 모임)에 참석하여 영국의회의 처사에 항의하는 항의문을 제안하면서 식민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어. 죠지는 10월에 개최될 '일차 대륙회의'(First Continental Congress)에 참가할 대의원으로 선발되었지.


제1차 대륙회의 Philadelphia, Pennsylvania   1774.9.5. ~ 1774.10.26


[동훈]  드디어 죠지가 전국적 모임에 얼굴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네요?  

[해월]  전국적 인물이 되는 거지.  영국정부와 식민지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팽팽하게 평행선을 가면서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10월 필라델피아에 모여 소위 ‘제1차 대륙회의’ (First Continental Congress.  정부와 의회 기능을 겸비한 모임)라는 13개 식민지 주를 대표하는 정부를 결성하고, 우선 영국과 화해를 도모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제스처로 ‘대륙협약’(Continental Association)이라는 동의안을 만들어 영국에 제안하지. 이 제안은 1769년 '버지니아 주 협의체'(Virginia Association)에서 대의원인 죠지 워싱턴이 발의하고  죠지 메이슨이 작성한 안이었는데 이를 '리처드 핸뤼 리'(Richard Henry Lee)가 대륙회의에 제출하여 채택된 것이었어.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 동의안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1775년 초 더 강력한 제재조치인 ‘뉴 잉글랜드 억제법’(New England Restraining Act)을 만들어 식민지 사람들을 한층 더 압박해 왔어.  결국 1775년 4월 19일 악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미국의 '혁명전쟁'(Revolutionary War)이라고 부르는 독립전쟁의 불씨가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로부터 타기 시작하고 말았지.


[동훈]  드디어 독립전쟁이 터지고 말았네요!  그런데 선생님, 죠지와 말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을 텐데 그들 사이에 자식은 얼마나 두었나요?

[해월]  맞아!  중요한 얘기를 안 하고 독립전쟁으로 넘어갈 뻔했구나!  1759년 1월 6일 말사의 거처인 화잇 하우스 농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그곳에서 달콤한 신혼여행을 보내고 잠시 윌리엄스버그에 내려가 주위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곧 죠지의 거처인 마운트 버논에 신혼살림을 차렸어.  워낙 농장이 많고 넓으며 일꾼 노예들도 많은 상황이라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으리라고 봐.   

동훈이가 물었듯이 그 유명한 두 사람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겠지만 대답은 “없음” 이야.  불행히도 죠지가 1751년에 이복형 로렌스를 따라 바베이도스에 갔다가 천연두를 앓게 되었고, 치료가 되면서 면역을 얻게 되어 독립전쟁 중 다행히 천연두로부터 생명을 잃지는 않았지.  그러나 그때 걸린 천연두 후유증으로 그만 불임증에 걸려 자식을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야.  게다가 말사도 막네 펫시를 출산하다 잘못되는 바람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이 두 사람 사이에 친자는 없게 되었어.  그 대신 말사의 두 생존 자녀 젝키와 펫시 그리고 나중에 젝키의 두 아이 넬리(Nelly)와 워씨 (Washy)를 포함해 여러 조카들을 기르게 되었지.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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