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쟌 에담스 - 1of 2 : 옥동자 '독립선언문' 1735-1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쟌 애담스(John Adams. 1735.10.30 – 1826.7.4)는 미국의 정치이론가, 행정가, 변호사, 판사, 작가, 외교관, 정치가 그리고 1797년부터 1801년까지 2대 대통령을 지낸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혁명과 독립전쟁을 이끌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타고 태어난 다양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입니다. 전쟁 중과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이런저런 목적을 가지고 여러 나라에서 미국을 대변하는 외교관 직책을 수행했고,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죠지 워싱턴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이끄는 초대 부통령으로 두 번에 걸쳐 당선되어 8년 임기를 성공리에 마무리했습니다. “범법자라도 변호사의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을 받더라도 유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결백하다”라고 인권보호를 주창한 사람입니다. 소통을 중요하게 여겨 비록 정적이라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정치인이며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소유를 거부하여 자신의 아들인 제6대 대통령 ‘쟌 퀸지 애담스’(John Quincy Adams)와 함께 초창기 12명의 대통령 중 유이하게 ‘노예불소유’를 고집한 대통령입니다. 부인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미국의 두 번째 대통령, 90년 8개월 동안 생존해 동시대 사람들보다 월등히 장수한 쟌 애담스(이하 쟌)에 대해 살펴봅니다.
[珙銘] 죠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에 대한 글을 오랫동안 보아 오면서 미국의 탄생이 쉽지 않은 투쟁의 산물이었고, 새로 시작한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어려운 과정이었다는 것을 배웠는데 이제 두 번째 대통령으로 넘어오니까 왠지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네요, 선생님.
[海月] 아, 그래? 맞아. 죠지가 이끌던 시절의 미국은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은 갓 태어난 상태로 매우 불안한 나날이었지. 시비가 불분명하니까 언성이 높아지고 바른길로 가려고 몸부림치며 백년대계를 세우려고 애썼던 시절이었어. 비록 8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도 80년은 지낸 것 같았을 거야. 특히 많은 사람들이 새로 건설된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니까 시급하게 바로 잡았던 것이 소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는 첫 10번째까지의 개헌이었거든. 정부가 출범한 지 몇 달 후인 1789년 9월 25일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1791년 12월 15일에 각 주에서 비준을 마친 후 확정된 10번에 걸친 개헌을 보면 첫정부가 얼마나 준비가 덜 되었었나를 알 수 있지. 그런 시절을 보내고 8년 후 그동안 부통령으로 변화를 같이 한 사람을 새 대통령으로 맞이했으니까 1797년 3월의 미국민들은 부족한 대로 한시름 내려놓았다고 봐도 될 거야.
[공명] 두 번째 대통령 쟌은 어떤 가족사를 가지고 있나요? 물론 선조들이 영국에서 왔겠지요?
[해월] 그렇지! 미국에 애담스 가문을 일군 분은 그의 고조부(4대 조부)였던 ‘핸리 애담스’(Henry Adams. 1583–1646)였어. 많은 영국 사람들이 17세기에 신대륙으로 이주했을 때 핸리도 가족과 함께 뉴 잉글랜드(미국의 북동부 일대를 말함)로 이주했지. 영국 남서부 ‘소머셋’(Somerset) 카운티 ‘바튼 세인트 데이빗’(Barton St. David)이라는 마을에서 1583년 1월 21일에 태어나 농부생활을 했던 그가 식민지 땅을 밟은 건 1632년경의 일이야. 그런데 식민지 땅을 밟았을 때 49살의 핸리는 혼자가 아니었어.
[공명] 식민지 초창기 가문을 일군 사람들은 대부분 단신으로 오던데 가족이 있어나보죠?
[해월] 메사추세츠 주 ‘브레인트리’(Braintree. 후에 Quincy로 개명됨) 마을에 자리 잡은 핸리의 가족은 단출하지가 않았지. 1609년 10월에 결혼한 부인 ‘이디스 스콰이어’(Edith Squire. 1587-1672)를 포함해서 ‘재래미 애담스’(Jeremy Adams) 등 형제들 그리고 이디스와 사이에 낳은 여덟 아들과 외동딸 등 아홉 자녀와 같이 왔어. 곧이어 부인의 두 여자형제와 그 가족들도 합류했지. 처음부터 엄청난 가족이 함께 한 거야.
[공명] 아들이 여덟이나 있어요? 와! 대단한 가족을 일군 분이었네요!
[해월] 그러게. 농사일을 했다는데 그 가족을 어떻게 다 보살폈는지 모르겠어. 옛 분들 말씀에 “자식들이 다 각자 먹을 것 갖고 나온다”라고 하셨지만 말이야. 태어난 순서로 보면 핸리 주니어(Henry Jr.), 토마스(Thomas), 조나산(Jonathan), 사무엘(Samuel – 제30대 대통령 쟌 켈빈 쿨리지 주니어 John Calvin Coolidge Jr. 의 선조), 어설라(Ursula 딸), 피터 (Peter), 쟌(John), 조샙(Joseph – 쟌 애담스의 직계 증조부) 그리고 에드워드(Edward) 등 아홉 자녀가 함께했지.
[공명] 그 아홉 자녀가 모두 성인이 되도록 생존했나요? 당시분들 보니까 어린 아기 때 많이 사망하던데요.
[해월] 앞서 살펴본 죠지 가문의 후손들은 매우 짧은 생을 살았는데 이 쟌의 고조부의 자녀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장수한 편이지. 고조부 자신이 63세가 되어서야 사망했으니까. 메사추세츠 주 ‘서폭 카운티’(Suffolk County) ‘퀸지’(Quincy) 시내 오래된 교회 안의 ‘핸콕 공동묘지’(Hancock Cemetery)에 뭏혀있는 고조부 핸리의 무덤 앞에 고손인 쟌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어.
[공명] 3대 조부는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쟌의 증조부 ‘조샙 애담스 시니어’(Joseph Adams Sr. 1626–1694)는 형제가 여덟 명이나 되는 형제부자였지? 부모님을 따라 식민지 땅으로 이주해 온 그는 1650년 11월 26일 같은 동네에 살던 ‘에비게일 벡스터’(Abigail Baxter. 1634-1692)와 결혼해서 자그마치 열두 자녀를 두었어. 6남 6녀였지.
[공명] 와! 정말 와! 네요. 요즘 같으면 훈장감입니다.
[해월] 국민훈장 ‘석류장’ 감은 되나? 하하! 조샙 시니어는 맥아(麥芽. 엿기름) 만드는 장인이었는데 당시 메사추세츠 주는 영국서 건너온 청교도(Puritans)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자유인과 노예 등의 계급사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샙은 청교도인으로서 정치참정권(투표권)도 갖는 자유인(freeman) 신분이었지. 백인남성 5명 중 1명 정도만 자유인 신분이었다고 하니 당시는 비민주주의적 계급사회였던 것 같아.
[공명] 초창기 식민지 사회에는 영국제도를 도입해서 신분제도가 있었나 보네요.
[해월] 상류층 사람들도 식민지로 이주하면서 신분제도를 유지했겠지. 민주주의가 성립되려면 아직도 100년은 더 필요한 시절이었으니까. 1653년에 청교도교회의 집사 신분을 이용해 자유인이 된 조샙이 전적으로 정치의 길로 나선 것 같지는 않고 위에 말한 술제조에 필요한 맥아를 만들면서 1673년에는 ‘selectman’(마을 정책결정 위원회의 일원)에 선출되 약간의 정치생활도 한 것 같아. 1689년경에는 치안담당 공무원생활도 했지. 이들 부부사이에 태어난 12명의 자녀를 순서대로 보면 헤나(Hannah 딸), 조샙 주니어 (Joseph Jr. – 쟌의 조부), 쟌(John), 에비게일(Abigail 딸), 배시아(Bethia 딸), 쟌(John), 메리(Mary 딸), 사무엘 (Samuel), 메리(Mary 딸), 피터(Peter), 조나산(Jonathan) 그리고 매히터블(Mehitable 딸) 등이 같이 했어. 여섯째 쟌과 일곱째 메리는 어렸을 때 사망했다고 해.
[공명] 쟌의 증조부가 자손도 많이 보았지만 공무원 생활도 하면서 정치인 후손을 키울 준비를 하셨네요!
[해월] 대가족을 이끄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조셉 시니어는 1694년 12월 6일 그가 태어난 브레인트리 마을에서 부인 사망 후 2년 뒤에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지.
[공명] 조부님은 정치와 관계를 맺고 사셨나요?
[해월] 조샙 애담스 주니어(Joseph Adams Jr. 1654-1736)는 농사일보다는 정치와 공무원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보여. 교회 집사였던 그는 기록에 의하면 45세 되던 해인 1699년에 ‘selectman’에 선출되어 지역정부일을 보았고, 1700년에는 치안담당 공무원, 1715년에는 고속도로 건설현장 측량사, 1716년과 1717년에 다시 ‘selectmen’에 선출되었고, 1720년에 다시 측량사 일을 했었지.
[공명] 정부일을 하기 시작하셨으니 쟌이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있었을까요?
[해월] 웬걸! 쟌이 태어난 것이 1735년이었으니까 뵈었어도 겨우 1년 정도겠지. 마음으로 소통했을까? 어쨌든 조샙 주니어는 17세기 중엽 뉴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식민지 역사 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하는 ‘필립왕의 전쟁’(King Philip’s War)에 참전하게 돼. 그가 참전한 이 전쟁은 메사추세츠 일대에 살던 ‘웜파노애그’ (Wampanoag) 부족연합을 포함한 여러 원주민들과 식민지 사람들 간의 분쟁이었어. 원래 웜파노애그 부족연합은 그 부족장 ‘마사소잇’ (Massasoit)을 지낸 ‘오사매퀸’(Ousamequin)이 초창기 영국에서 온 정착민들을 돕고 가깝게 지내면서 ‘추수감사절’ (Thanksgiving)을 최초로 같이 지냈던 부족으로 유명하잖아. 1662년 오사메퀸이 사망하자 지도자가 된 그의 막내아들 ‘매타콤’(Metacom) 때 와서 식민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평화협약을 위반하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필립’ (Philip)이라는 이름도 갖게 된 그였지만 협약이 위반되면서 서로 살상까지 하게 되었고, 급기야 지역 원주민들과 식민지 정착민들 간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되었어. 영국군이나 민병대가 간여하지 않은 민간인만의 최대 규모의 전투로 1675년부터 1678년 사이에 뉴 잉글랜드 전체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온 전쟁이었어. 조부 조샙 주니어는 22세 때인 1676년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공명] 정부 경험에 군 경력까지 쌓아가는 애담스가이네요. 가족은 어땠어요?
[해월] 근데 그것이 좀 복잡해요. 할아버지 조샙 주니어는 세 번에 걸쳐 결혼을 하게 돼. 첫 번째 결혼은 ‘메리 체핀’(Mary Chapin)과 1682년에 치렀고, 두 번째는 ‘헤나 베스’(Hannah Bass)와 1688년에 그리고 세 번째는 1708년에 ‘앨리자배스 하이드’(Elizabeth Hobart Hyde)와 치렀어. 모두 같은 마을인 브레인트리 사람들인데 이들과 사이에 모두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어.
[공명] 또 11명의 자녀요?! 애담스 가문은 참 대단하네요.
[해월] 나도 점점 그 가문의 후손들이 궁금해져. 그렇게 많은 후손들이 있으니 든든했겠지. 첫 부인 메리와의 사이에 메리(Mary. 1683-?)와 에비게일(Abigail. 1685-?) 등 딸 둘을 낳았어. 두 번째 부인 헤나와의 사이엔 조셉 3세(Joseph. 1688-1783), 쟌 시니어(John Sr. 1691-1761. 쟌의 아버지), 사무엘(Samuel. 1694-?), 쟈시아(Josiah. 1696-?), 헤나(Hannah. 1698-? 딸), 루스(Ruth. 1700-? 딸), 배시아(Bethiah. 1702-? 딸) 그리고 애버니저(Ebenezer. 1704-) 등 5남 3녀를 두었지. 그리고 세 번째 부인 앨리자배스와는 1710년에 케이랩(Caleb)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한 달도 채 살지 못하고 사망했어.
[공명] 공무원 생활하시면서 자녀도 넉넉히 두신 할아버님은 행복하게 사셨겠네요.
[해월] 그랬기를 바라. 손주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란 것을 아셨으면 더 좋았겠지. 조샙 주니어는 1736년 2월 12일 브레인트리에서 사망하고 윗대와 같이 퀸지 시에 있는 핸콕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
[공명] 쟌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쟌 시니어(John Adams Sr. 1691.2.8. – 1761.5.25)는 청교도 교리에 투철한 가부장적 엄격한 종교인이었지. 교회일을 보면서 여름에는 농사를 지었고 겨울에는 구두를 만들어 파는 제화공(cobbler)이었어. 그뿐 아니라 메사추세츠 주 민병대 중위, 징세관 그리고 브레인트리 타운의 selectman으로 20년간을 봉직하기도 했지.
[공명] 아버지가 다양한 일을 하셨네요? 지역정부일을 20년간이나 했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겠어요.
[해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주택과 학교, 도로 등 일을 관리감독했다고 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집을 마치 상담소 마냥 들락거렸다고 해. 특히 원주민 부족장들도 수시로 방문했다고 하지.
[공명] 동네분들에게 매우 자상하고 인기가 많으셨나 보네요. 보통 그런 분들 부인은 집안이 번거로워서 별로 좋아하지 않던데요.
[해월] 공명이도 주위에서 많은 얘기를 들었나 보구나! 사람 나름이겠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일이지. 어쨌든 쟌 시니어는 하바드 대학에서 수학한 사람으로 아들 쟌도 하바드에 입학시켰어. 아들이 농부가 되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고 해. 차라리 목사가 되기를 바랐지.
[공명] 농사를 짓는 분들이 자식도 농사짓기를 바라는 분은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해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옛 군왕들이 농민을 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봐서는 그저 뼈 빠지게 일해서 임금과 양반에게 세금 바치는 계급 정도로 본 것이 아니라 진정 먹을거리 해결해 주는 고마운 부류의 사람들로 인정한 것 아닐까? 농사일은 해본 사람만 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노동이니까 예전에 농사일을 업으로 가족을 돌 본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는 자식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을 거야.
[공명] 저희 외삼촌들도 농사를 지셨는데 예전에 방학이 되면 가끔 찾아뵙고 일을 도와드렸던 것이 생각이 나요. 그땐 잠깐이어선지 재미도 있었어요.
[해월] 방학 때 잠깐 들르는 소일거리가 아니니 그렇지. 쟌 시니어는 그래서 아들 주니어가 하버드대에 가서 공부할 것을 강조했던 거지. 큰 아들 쟌 주니어(1735-1826) 말고 아들이 둘 더 있었어. 둘째 아들 ‘피터 보일스턴’(Peter Boylston. 1738-1823)은 농사일을 이어받으면서 민병대 대위직도 맡았었지. 그리고 막내아들 ‘앨리휴(Elihu. 1741-1775)는 독립전쟁 초기 민병대 대대장을 지냈지만 ‘이질’(dysentery)을 심하게 앓다 젊은 나이에 사망했어.
[공명] 부인은 어떤 분이세요?
[해월] 아, 내 정신 좀 봐! 부인 얘기는 하지도 않았잖아! 순서가 바뀌었네! 쟌 시니어가 마을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 되니까 부인은 그래도 메사추세츠 주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의사 집안의 규수를 맞아드렸지. 그의 부인은 ‘브루크라인’(Brookline)에서 살던 ‘수제나 보일스턴’(Susanna Boylston. 1708.3.5. – 1797.4.21)이었어. 그녀의 친할아버지 ‘토마스 보일스턴’(Thomas Boylston)이 식민초창기 명성이 높은 의사였고, 사촌 동생 ‘워드 보일스턴’(Ward Nicholas Boylston)은 거부 사업가로 박애주의자이며 하버드대 후원자였지. 삼촌 ‘자브디앨 보일스턴’(Zabdiel Boylston)은 식민지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수술을 시술한 의사인데 천연두가 만연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한 의사였지. 사촌 중에 ‘메리 보일스턴’ (Mary Boylston)의 딸이 캐나다 대법관 ‘쟌 앰스리’(John Elmsley)의 부인이었고. 아무튼 당대 유명집안의 여인이었는데 이 둘은 1734년 10월에 결혼을 했어. 어떻게 쟌 시니어를 만나게 되었는지 알려진 것이 없어 궁금해.
[공명] 쟌이 하버드대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가 힘을 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해월] 그래? 그때도 치맛바람이 있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쟌 시니어는 물론이고 아들이 하바드 대학 재학 시 대학 내 신분체제에서 상위에 있었다고 하니까 어머니의 사회적 신분에 따른 영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할 거야. 귀족은 영원한 귀족인 것이지. 한 가지 옥에 티는 자식들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읽어드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는 그 시대 다른 많은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글을 읽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어.
[공명] 여인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 글을 못 읽는 상황은 그 시절 미국에도 있었군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어쨌든 훌륭한 아들을 두어서 마음이 좋았겠어요.
[해월] 큰 아들 쟌 주니어가 우리의 주인공이니까 이제부턴 쟌 이야길 해 볼까?
[공명] 그러세요. 주인공 쟌이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해월] 청교도가 세운 개신교회의 성직자 아버지와 저명한 의사집안의 어머니 사이에서 1735년 10월 30일 일요일에 태어난 쟌은 부모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자라났지. 6살에 학교공부를 시작한 쟌은 곧 ‘브레인트리 라틴 스쿨’(Braintree Latin School)에 진학해서 라틴어, 수사학, 논리학, 수학 등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런데 어린 쟌은 선생님이 싫다고 툭하면 학교 가기 싫다면서 농부가 되고 싶다는 거야. 아버지는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공부를 계속할 것을 강조하면서 다른 선생님으로 바꿔주었지.
[공명] 당시에는 모든 수업을 한 선생님이 담당하셨던 것 같은데 선생님하고 좋은 인연이 안 되면 매우 힘들더라고요.
[해월] 공명이도 싫었던 선생님이 있었나 보구나? 이해해! 나도 힘든 선생님이 있었으니까! 쟌은 그런 아버지가 싫지 않았었나 봐.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를 계속한 쟌은 16살 때인 1751년에 하버드대에 입학하지. 4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한 쟌은 1755년에 인문학 학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는데,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한 아버지 뜻과는 달리 그는 이웃 ‘워체스터’(Worchester) 시에 있는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
[공명] 하버드대 출신이 동네 선생님이 되었네요?
[해월] 아직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결정하지 못한 쟌에게 워체스터 시에서 하바드 대 졸업생을 선생으로 초빙하려고 온 목사가 그에게 선생 직을 제시하자 받아들인 거야. 통틀어 20명밖에 안 되는 시골학교에서 라틴어 등을 가르치면서 책을 많이 읽으면서 인생공부를 하던 쟌은 1756년에 동네 변호사인 '제임스 퍼트남'(James Putnam)을 선생으로 모시고 법률공부를 시작했지. 1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쟌은 변호사라는 직업이 명예도 있고 존경을 받는 직업이라는 것에 생각을 굳히고 아버지에게 변호사가 될 공부를 하겠다고 편지를 썼어. 선생직을 유지하면서 법률공부를 계속한 쟌은 1758년엔 하바드대에서 석사학위(M.A.)를 받았어. 그리고 1759년에 변호사가 되었지.
[공명] 미국에서 정치가가 되려면 대부분 일단 변호사가 되던데 쟌도 그 길을 밟았군요?
[해월] 역대 미국 대통령이 현재의 ‘조 바이든’(Joe Biden)까지 모두 46명인데 그중 전직 변호사가 59%인 27명이나 있었어. 법률공부를 하면서 논리 정연하면서도 정도를 가는 길을 배울 수 있었겠지. 쟌은 이 즈음 일기 쓰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이 습관이 결국 내편 네 편 할 것 없이 대화로 풀어나가는 정치력으로 발전하게 된 거야. 1763년에는 보스턴 신문에 기고를 하면서 지역 엘리트들이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힐난하기도 했어. 곧이어 헌법학자적 자질을 발휘해 글을 발표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약간은 조급하게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였지. 살짝 조급함이 그의 단점이라고나 할까?
[공명] 쟌이 변호사입장에서 정치이론가로 변신하면서 정치인이 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모습이네요.
[해월] 당시 영국에서 현지 공무원들에게 업무지침서를 내려보내는데 영국의 막무가내식 통치방식을 힐난하는 이론가 편에 서서 점점 식민지 역사를 분석하고 공화주의(republicanism)를 지지하게 되었지. 그러나 그는 정치현실적으로 공화국 초기에는 죠지와 해밀턴과 같이 연방주의자 입장에 서고 있었어.
[공명] 쟌의 가정사는 어땠어요? 부인과의 긴 애정사는 유명한 것 같던데요!
[해월] 애정은 몰라도 부인에게 편지 쓰기로 유명하지. 1759년에 변호사가 된 쟌은 겨우 24살임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능력을 지닌 자부심 강한 청년이었어. 그때 한 친구가 자기가 사귀던 여성의 동생을 쟌에게 소개해주었지. 그 여성의 이름은 ‘에비게일 스미스’(Abigail Smith. 1744.11.22 – 1818.10.28) 였는데 이제 막 15살 먹은 처녀로 알고 보니 그의 먼 친척형제뻘 되는 사람이었지. 친구도 사실 에비게일의 언니 메리(Mary)와 약혼한 사이였고. 처음에 쟌은 에비게일은 물론이고 그녀의 자매들에게 별 흥미를 갖지 못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게 솔직해지고 비평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지다가 결국 5년 뒤인 1764년 10월 25일 결혼하게 돼.
[공명] 쟌이 드디어 부인을 맞이하는군요?
[해월] 쟌의 아버지는 1761년에 사망하여 장남의 결혼을 보지 못했고 양쪽집 엄마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었어. 아마 피를 나눈 집안사람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그러나 예전에는 혈족 간 결혼이 많았으니까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쟌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미 9.5 에이커(약 1만 평)에 달하는 농장과 집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
[공명] 가끔 주위에서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는 경우가 있어요. 이유가 있겠지만 당사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제 친구도 그랬는데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해월] 그래서 결혼은 부모를 포함해 친인척, 친구들의 축복하에 맞이하는 경사라고 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부족하지 않기를 그리고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기를 바라는 가족 간의 대사니까. 이 둘 사이에 여섯의 자녀를 두었어. 살림밑천이라는 첫딸 에비게일(Abigail “Nabby”. 1765-1813), 첫아들 쟌 퀸지(John Quincy. 1767 -1848), 수제나(Susanna. 1768-1769), 찰스(Charles. 1770-1800), 토마스(Thomas. 1772-1832), 그리고 막내 ‘앨리자배스’(Elizabeth. 1777-?)야. 둘째 딸 수제나는 한 살 때 사망했고 세 아들들은 모두 변호사였어. 불행히도 둘째 아들 찰스는 젊은 나이에 술로 일찍 사망했지. 첫아들 쟌 퀸지는 아버지의 애정 어린 지도도 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활약을 해 제6대 대통령 (1825.3.4. – 1829.3.4.)을 지냄으로써 정치가문의 역사를 빛내었지.
[공명] 부자지간에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첫 케이스네요, 선생님.
[해월] 그렇지. 아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건국의 아버지’의 한 사람인 쟌의 실제 활약상에 대해 더 살펴보기로 하자. 쟌의 활약은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처음은 그가 변호사가 된 후 영국의 징세법에 저항하면서 식민지 대표의 한 사람이 되어 미국의 독립선언을 일선에서 이루어내는 1776년까지의 기간이고, 두 번째는 그가 독립전쟁 시작과 더불어 외교관 직책을 시작한 1777년부터 1783년의 종전협약 그리고 초대 영국대사를 지내고 귀국한 1788년까지의 기간이야. 세 번째는 죠지와 함께 부통령으로서 미국 정부를 이끌다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퇴임한 1801년까지이지.
[공명] 훌륭한 정치이론가로 소문난 쟌의 역할이 매우 궁금하네요.
[해월] 소문이 결코 헛되지 않았어. 쟌은 일찍부터 언론에 본인이 쓴 글을 필명으로 발표해 왔었는데, 영국은 1765년 악명 높은 ‘스템프 법’(Stamp Act)을 제정하여 식민지 사람들의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시행하면서 강제시행권을 일반법원이 아닌 배심원 없이 재판을 진행하는 ‘해사법원’(Vice Admiralty Courts)이 갖게 했어. 그렇게 되자 쟌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문서를 만들어 지역 대표자들에 배포하기 시작했지. ‘브레인트리 안내서' (Braintree Instructions)라고 불리는 이 문서는 영국의회가 식민지 사람들의 징세동의권과 배심재판권을 박탈했다고 지적하면서 스템프법을 거부하고 이를 폐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문서야. 일목요연하면서도 직설적으로 식민지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설파한 이 안내서는 다른 도시에서도 그대로 활용하는 모범서가 되었지.
[공명] 글을 써 혁명을 일으키는 정치가 모습이네요.
[해월] 그의 글은 계속되지. 지방언론 ‘보스턴 거젯’(Boston Gazette)과 ‘런던 크로니클’(London Chronicle)에 논문을 발표하고 주지사와 시의회에서 연설을 통해 징세법의 부당성을 역설했어. 결국 식민지에서의 강한 반발로 법은 1766년 폐지되었고 쟌은 브레인트리 시의 시위원 (selectman)에 선출되었지. 법의 폐지와 동시에 식민지의 저항은 일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어.
[공명] 쟌의 명성이 보스턴뿐 아니라 영국에도 퍼졌겠네요.
[해월] 그의 명성은 영국군인을 변호하면서 영국에 확실히 전해지지. 1767년에 영국의회가 ‘타운잰드 제법’(Townshend Acts)을 통과시켜 또다시 식민지에 압박을 가해오자 강력시위가 재발하고 영국에서는 군인들을 더 파견했어. 1770년 3월 5일 격렬한 시위대에 놀란 영국군이 얼떨결에 발포하면서 다섯 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사고가 생겼지. 관련 영국군인들이 살인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아무도 그들을 변호하려 나서지 않았던 거야. 이때 쟌이 본인에게 닥쳐 올 부담에 개의치 않고 누구라도 정당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자진해서 변호에 나섰어. 결국 이 사건의 직접 발포자들은 살인죄 판결을 받았지만 지휘자는 무죄선고를 받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어냈지.
[공명] 변호사의 법적 임무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경우에 따라서는 죄인의 무죄를 주장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해월] 몇 년 전 발생한 유명한 케이스가 미식축구 스타 ‘오 제이 심슨’(O.J. Simpson)의 전 부인 살인사건이었지. 변호를 맡은 이가 검찰의 살인정황 설명과 증거물 제출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무죄선고를 받아냈으니까 할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찝찝한 건 사실이야. 쟌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사물을 순수하게 볼 나이인 데다 법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순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니까 피아를 막론하고 변호인의 소임을 다했을 거야. 그러나 그른 것은 그르다고 판단하는 그였기 때문에 1772년에 와서 영국왕이 메사추세츠 주지사의 급료를 직접 지급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위 사람들과 함께 식민지 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조치라고 반발하면서 독재정치에 맞서는 방안은 ‘독립’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위협성 발언을 하기 시작했어. 이 순간부터 그의 대 영국관이 종속관계가 아닌 ‘주권국가 간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
[공명] 미국식민지가 영국에 종속하는 부속령 성격에서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네요.
[해월] 맞아! 막무가내로 징세법을 시행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겁박하고 현지 정부의 역할을 무력화하려는 상황이 계속 전개되었기 때문에 현실에 눈을 떠가는 것이지. 1773년에 ‘차 법’(Tea Act)이 발효되면서 영국의 대리정부인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차 수입 독점행위가 자행되자 식민지 사람들이 보스턴항에 정박한 영국 선적의 ‘다트머스’(Dartmouth) 호에 승선, 적재돼 있던 342개의 차 박스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Boston Tea Party’라는 사건을 저질렀잖아. 그때 다트머스호 선주가 쟌을 변호사로 선임했음에도 그는 이 사건을 식민지에서 벌어진 저항사건 중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면서 ‘절대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행위’였다고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지.
[공명] 독점과 독재에 맞서는 쟌의 모습이 돋보이는 순간이네요.
[해월] 당시 영국에서 결정한 여러 가지 규제와 법들이 식민지에 전개되자 가장 민첩하고 격렬하게 대응했던 곳이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메사추세츠 주였고 이곳에 쟌을 포함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거지. 영국의회가 ‘차’ 사건을 빌미로 ‘강압법’(Coercive Acts)을 제정하자 식민지 정부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모임을 갖게 돼. 쟌은 주에 배당된 4명의 대의원으로 뽑혀 1774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1차 대륙회의’(First Continental Congress)에 참석했고, 또 대륙회의에서 23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의 일원으로 영국왕에게 보낼 진정서를 작성하게 되었어. 위원들이 ‘보수파’와 ‘급진파’로 나뉘어 영국과의 관계정립에 이견이 생기자 쟌은 영국에 충성해야 한다는 보수파를 공격하면서도 우선은 관계개선을 도모하자는 선에서 중재하면서 왕에게 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진정서를 보냈지. 진정서를 발송한 후 1차 대륙회의는 폐회되었어.
[공명] 쟌의 정치성향은 독립을 지향하는 급진파로 규정되는가요?
[해월] 겉으로는 ‘가능한 한 협상’하는 쪽이었지만 속으로는 ‘독립이 피할 수 없는 미래’라고 보는 것이지. 대의원들의 성향이 양극으로 나뉘는 가운데 영국과의 독립전쟁의 시작이라 할 첫 전투가 벌어졌어. 메사추세츠 주 미들섹스 카운티(Middlesex County)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식민지 사람들이 전쟁준비를 한다는 정보를 얻고 1775년 4월 19일 콩코드 시에 있는 주 민병대의 화약고를 비밀리에 침범했어. 영국군의 침범 첩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기다리고 있던 민병대와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후에 ‘랙싱턴과 콩코드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민병대가 승리를 거두게 되지. 쟌은 이 전투현장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충천하는 사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동시에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모습과 형편없는 보급품 현실을 목격했어.
[공명] 전쟁다운 전쟁을 한 경험이 없는 식민지 사람들이었으니 무늬만 군대지 아직 군대다운 군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었겠지요.
[해월] 사실 전투에 익숙한 것은 영국군이었고 식민지 사람들이야 원주민 하고 티격태격하는 정도였겠지. 1775년 4월 19일 첫 전투 이후 쟌은 5월 10일부터 개최된 ‘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에 메사추세츠 주 대의원 대표로 참석했고, 식민지연합 임시정부는 급히 ‘대륙 군’(Continental Army)을 창설했지. 쟌은 이 대륙 군을 이끌 총사령관에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지명하는 한편 영국과의 화해모색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견제하면서 ‘화약과 무기만이 유효하고 확실한 그리고 틀림없는 화해책’이라고 역설하기 시작했어.
[공명]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쟌은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확고하게 독립을 주장한 사람이 되었네요. 그만큼 영국의 식민정책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한 것이겠지요?
[해월] 그렇지! 쟌의 눈에는 다른 대표들이 독립선언을 늦추는 모습이 답답했어. 버지니아 주 대표로 참석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제3대 대통령)을 회유해 독립찬성파로 만들고, 같은 주 출신 ‘리처드 리’ (Richard Henry Lee)가 제의한 ‘리 결의안’(Lee Resolution)의 서문을 작성했지. ‘리 결의안’은 영국에 대항하여 식민지 13개 주가 독립을 선언하자는 결의안이었는데 이 결의안을 2차 대륙회의에서 통과시킴으로써 독립의 발판을 만들게 된 것이야.
[공명] 독립 선언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네요.
[해월] 대륙회의 진행모습을 지켜보던 쟌은 1776년 6월 11일 대의원들 중에서 본인과 토마스 제퍼슨, ‘밴자민 후렝클린’(Benjamin Franklin), ‘로벗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 그리고 ‘롸저 셔먼’(Roger Sherman) 등 다섯 사람을 묶어 ‘5인 위원회’(Committee of Five)를 만들어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 작성에 들어갔어. 그러면서 토마스 제퍼슨을 지목해 선언문의 주 저자로 추천했지. 토마스는 쟌이 작성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쟌의 생각은 달랐어. 버지니아 주 대표가 일선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토마스를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한 쟌은 또 토마스가 자신보다 나은 필력을 가지고 있다고 치켜주면서 자신을 한껏 낮춰 토마스에게 양보했지. 그러면서 자기의 의견도 첨가해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7월 2일 전체회의에서 뉴욕을 제외한 12개 주의 찬성을 얻어내 선언문을 채택시키는 역사를 만들어 냈어. 그래서 쟌의 입장에서는 ‘7월 2일이 독립을 선언한 날’로 훗날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공명] 독립선언문이 2차 대륙회의 참석대표 전원이 서명한 날은 7월 4일이지만 정작 쟌의 노력으로 일차 성공한 날은 2일이었네요.
[해월] 맞아! 독립선언문의 공식명칭이 ‘미합중국 13개 주의 만장일치 선언문’(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듯이 이 선언문에 전체 56명 대의원들 전원이 서명한 날은 7월 4일이라 쟌의 생각도 이해는 하지만 미국은 7월 4일을 ‘독립선언일’로 기념하고 있지.
[공명] 어쨌든 독립선언문 작성을 포함해 독립을 위한 갖가지 노력에 쟌의 진두지휘 공이 컸네요.
[해월] 쟌은 미국이 독립을 이룩하는데 비록 전장에 나가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애국자’(Patriot)였을 거야. 임시정부 성격의 ‘2차 대륙회의’가 폐회된 1781년 3월 1일까지 쟌은 80번의 위원회 참석과 25번에 걸쳐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가장 열심히 일한 대표로 뽑히지. 또 1776년 6월에 쟌은 ‘전투와 군수품위원회’(Board of War and Ordnance) 위원장을 맡게 돼. 매일 18시간을 일하면서 군장교들의 배치와 계급등을 관리하고 군병력과 무기 공급, 급료관리 등 군사업무를 총괄했지. 소위 ‘일인 군사부서’였고, ‘전쟁장관’이었어. 대륙 군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군수물품보급, 무기와 전투전략까지 힘닿는 데까지 애썼어. 몹시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미군이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자리를 열심히 지켰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