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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Jun 27.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8

2대 쟌 애담스 - 2 of 2 :  해군의 아버지 1777 - 1801

쟌 애담스(John Adams.  1735.10.30 – 1826.7.4)는 미국의 정치이론가, 행정가, 변호사, 판사, 작가, 외교관, 정치가 그리고 1797년부터 1801년까지 2대 대통령을 지낸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혁명과 독립전쟁을 이끌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타고 태어난 다양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입니다.   전쟁 중과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이런저런 목적을 가지고 여러 나라에서 미국을 대변하는 외교관 직책을 수행했고,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죠지 워싱턴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이끄는 초대 부통령으로 두 번에 걸쳐 당선되어 8년 임기를 성공리에 마무리했습니다.  “범법자라도 변호사의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라고 주장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을 받더라도 유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결백하다”라고 인권보호를 주창한 사람입니다.  소통을 중요하게 여겨 비록 정적이라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정치인이며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소유를 거부하여 자신의 아들인 제6대 대통령 ‘쟌 퀸지 애담스’(John Quincy Adams)와 함께 초창기 12명의 대통령 중 유이하게 ‘노예불소유’를 고집한 대통령입니다.  프랑스와의 일촉즉발 전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애썼던 대통령으로 강대국과 대항하기 위해 해군력 증강을 외쳤던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부인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미국의 두 번째 대통령, 90년 8개월 동안 생존해 동시대 사람들보다 월등히 장수한 쟌 애담스(이하 쟌)에 대해 살펴봅니다.


 




[珙銘]  말씀 듣고 보니 독립쟁취에 공헌이 지대한 건국의 아버지네요.

[海月]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적 사고가 든 시대적 인물 중 한사람이지!  죠지가 영국군을 상대로 국내 여러 곳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동안 쟌은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지. 그의 애국자로서의 두 번째 헌신은 바로 외교관으로서의 직분수행이었어.  가장 큰 업적은 1783년 9월 3일 영국 정부를 상대로 미국의 독립을 마무리 진 ‘파리조약’(Treaty of Paris)에 당당한 서명자로 참석한 것이었지.

  

[공명]  독립전쟁을 끝낸 평화조약을 체결한 사람이 쟌이었군요?

[해월]  물론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역사적 현장에 서명인의 한 사람으로 쟌이 있었어. 쟌의 숨은 노력은 글자 그대로 '숨어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어.  대륙회의에서 신생국 미국을 탄생시키기로 결심한 쟌은 미국의 독립이 필요한 이유로 외국과의 교역을 꼽았고, 교역은 독립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았지. 독립한 미국이 가까운 장래에 서방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통상조약’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그 통상조약문의 견본을 만들기 시작했어.  특정국가보다는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체결될 비정치적 통상조약의 모델을 만들면서 ‘무관세물품을 통관하는 자유항 건설’과 ‘일반상품교역에 자유중립 확보’ 그리고 ‘거래금지품목 지정합의’등을 주안점으로 보았지.  쟌은 그가 만든 초안을 1776년 7월 18일  대륙회의에 제출했고 9월 17일에 정식 채택되었어.  그 모델을 가지고 밴자민 후렝클린이 프랑스로 건너가 1778년 2월 6일 끝내 프랑스와 ‘우호통상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 체결을 맺는 데 성공했지. 


[공명]  글로 역사를 만들어내는 쟌의 참모습이네요.

[해월]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 우호통상조약과 더불어 같은 날 프랑스와의 ‘군사동맹조약’(Treaty of Alliance)도 체결되었다는 사실이야.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의 재정상황은 말 그대로 누더기 상태였는데 이를 해결하는 최선책은 빨리 전쟁을 끝내고 독립을 이루는 것이잖아.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프랑스와의 통상만으로는 부족하고 전투지원도 절실했었지.  영국과의 전쟁상황을 지켜만 보던 프랑스가 1777년 9월 뉴욕 주 ‘사라토가’(Saratoga)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미국 쪽에 서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  프랑스와의 협상에는 이미 프랑스와 교섭 중인 밴자민과 ‘아서 리’(Arthur Lee)와 함께 프랑스를 설득하기 위해 1778년 교섭단의 일원으로 쟌도 미국을 떠났는데 항해 도중 영국전함의 추격도 받고 날씨도 좋지 않아 4월 1일에나 파리에 도착했지.  10살 된 큰 아들 ‘쟌 퀸지’(John Quincy)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동행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먼저 나가있던 밴자민 일행이 일을 성공시킨 뒤라 별 도움을 주지는 못했어.  그리고 이들 둘과 뜻이 맞지 않아 마음이 불편한 상황에서 미국정부에서 밴자민을 교섭단장으로 승진시키고 쟌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자 1779년 8월 2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지.  


[공명]  밴자민 후렝클린도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큰일들을 해냈네요.

[해월]  밴자민에 대해서는 훌륭한 얘기가 많아 언제 한번 얘기 나눌 기회가 있을 거야.  미국으로 돌아온 쟌에게 1779년 말에 영국과의 전쟁 종결과 통상조약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라는 임무가 떨어지지.   그 해 11월 쟌은 다시 두 아들 ‘쟌 퀸지’와 ‘찰스’를 데리고 프랑스를 향해 떠났어.  통상협약과 군사동맹까지 맺은 프랑스의 미적지근한 움직임을 감지한 쟌은 프랑스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전함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고, 프랑스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달러가치 하락을 결정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자 프랑스정부에 미국정책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이해를 구하려 노력했지.  쟌이 요구한 전함파견은 한참 후에 프랑스가 호응하면서 독립전쟁 종반에 영국군의 전략을 크게 위축시켜 승전의 결정적 계기를 가져왔어.


[공명]  영국과 대화하라고 파견된 쟌이 왜 프랑스와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어요?

[해월]  그러게.  쟌이 타고 가던 배가 물이 새는 바람에 스페인에서 수리를 위해 정박하게 되고 동행한 일행과 6주간에 걸쳐 육로로 힘들게 파리까지 간 쟌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인 밴자민과 합류하면서 프랑스와의 대화에 간여케 되었기 때문이지.  영국과의 종전협상에 유리하려면 종전의 단초를 찾아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프랑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그러나 쟌은 일단 프랑스의 지지도가 마치 “물에 빠진 미국의 머리를 빼내주지는 않고 완전히 익수 되지 않을 정도로만 손으로 받쳐주는 형상”이라고 평가를 내렸어.  프랑스와의 협력에 회의를 품은 쟌은 1780년 중반에 비교적 신생미국에 우호적인 ‘내더렌즈’(the Netherlands)로 건너가 차관도 얻어보려 노력했지.  프랑스로부터 자립하고 전쟁자금도 마련하면서 영국에 평화조약 체결을 압박하기 위한 차선책이었지.  7월에 정식으로 주 내더렌즈 대사직책을 받고 8월에는 ‘헤이그’ (the Hague)에 자그마한 거처도 마련했어.  'Fluwelen Burgwal 18'에 위치한 이 거처가 미국정부 최초의 해외 외교공관이 된 곳이야.  처음에는 미국에 우호적이던 내더렌즈와의 교섭에 낙관적이었지만 양국 간의 거래를 알아챈 영국의 보복협박에 눈치를 보는 내더렌즈 정부가 그를 만나주지도 않자 실망에 차 있었지.  1781년 4월 19일에 가서야 쟌이 대사신임장을 ‘헤이그’(the Hague)에 제출할 수가 있었는데 아무런 약속도 받아내지는 못했어.  그 해 7월엔 큰 아들을 러시아의 ‘세인트 피터스버그’ (Saint Petersburg)에 프랑스어 통역사로 보내고, 향수병에 걸린 작은 아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8월에 본국정부의 조치로 단독 평화협상단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심한 신경쇠약증에 걸려 드러누었어. 그런 와중에 11월 들어 미국 독립군이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버지니아 주 ‘욕타운 전투’ (Battle of Yorktown)에서 영국군을 대파했다는 승전보를 접했지. 쟌이 늘 입버릇처럼 프랑스해군의 개입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주장이 현실로 증명된 것이야.

 

[공명]  외국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신경쇠약 병을 혼자 이겨내야 했던 쟌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해월]  그래도 11월에는 미군과 프랑스 동맹군의 승리가 영국군을 패퇴시키면서 종전의 틀을 만들게 되자 기운을 차린 쟌은 주 내더렌즈 대사로서 다시 용기를 내 내더렌즈 정부의 문을 두들겼어. 1782년 6월 11일에 독립전쟁 전황 소식을 들은 내더렌즈 정부가 정책을 바꾸어 500만 ‘길더’(guilder) 차관승인을 내주고 내친김에 10월에는 우호통상조약까지 맺게 되었지.  


[공명]  최초의 해외 대사관저가 탄생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차관도 결국 쟌이 애썼다는 증명이겠지요.

[해월]  좋게 생각하면 그렇지.  일단 영국과의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자 임시정부 ‘연합회의’ (Confederation Congress)에선 다시 쟌을 영국과의 종전협상을 이끌어갈 교섭단으로 임명하고 ‘쟌 제이’ (John Jay)와 손을 잡은 그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드디어 1783년 9월 3일 영국과의 평화조약 ‘파리조약’ (Treaty of Paris)을 성사시키면서 미국의 독립이 확정되었어.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 서명이 이루어진 장소인 56 Rue Jacob, Paris에 설치된 기념 동판 


[공명]  드디어 미국이 8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역사적인 독립을 맞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해월]  그 기쁨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  1945년 8월 15일 조선땅에서 벌어졌을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면 감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기쁨은 기쁨이고 쟌은 아직도 내더렌즈에서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그 후 1785년 4월에 초대 주영대사로 겸직 발령받은 쟌이 영국왕 조지 3세를 알현하면서 나누었던 대화가 후세까지 전해져오고 있어.  쟌은 “커다란 바다로 갈라져있고 서로 다른 정부로 나누어져 있지만 같은 언어를 쓰고 동일한 종교와 피를 나눈 양국의 우호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했고, 죠지 3세는 “미국의 우호적 성향을 기쁘게 받아들인다”면서 “그동안 미국에 대한 정책들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내린 조치”였다고 자신을 변호했지.  그러면서 쟌에게 “미국 내나 프랑스에서 쟌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더라”라고 해 쟌을 떠보는 듯했어.  그러자 쟌이 “그 말이 잘못된 말은 아닌 것 같다”면서 자기에게는 "미국밖에 구애받을 것이 없다”라고 했지.  그러자 왕이 “쟌은 진솔한 사람”이라 칭송했다고 해.  


[공명]  왕과의 대화가 잘 풀려나가는 모습을 보니 쟌의 주영대사직에 많은 성과가 있었겠지요?

[해월]  불행히도 그 반대였지.  영국대사직을 수행하는 동안 양국 모두 평화조약 규정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었어.  미국정부는 영국상인들에게 줄 돈을 계속 못주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그를 핑계로 조약상 철수키로 한 북서부지역에서 철수를 미루고 있었지.  또한 메사추새츠 주 정부와 지역주민 간 징세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미국 국내정세에 불안을 느끼며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쟌은 1788년 연방 외무장관이던 쟌 제이에게 대사직을 내려놓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영국왕에게도 떠나겠다는 인사를 했어.  그리고 내더렌즈로 건너가 지난번 얻었던 차관의 기간을 연장하고는 유럽에서의 대사직을 마무리지었지.  1788년 6월 17일 미국에 돌아왔으니까 미국을 떠난 지 만 11년 만에 돌아온 셈이야.  오랜 세월을 떠나 있던 관계로 국내정계와 거리감이 생기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해.


[공명]  그랬겠네요.  11년이란 기간이 정치인에겐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을 텐데 커다란 공백이 생겨 새로이 적응하려면 여러 가지로 어려웠겠어요.   

[해월]  낯선 것이 많은데 곧 초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지.  쟌의 세 번째 애국적 헌신은 그가 초대 부통령 8년 그리고 2대 대통령 4년을 지내면서 미국을 대변한데 있어.  당시 죠지를 대통령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여론은 불문가지였고 부통령엔 쟌이 최적이라고들 생각했지.  헌법 규정에 있는 정, 부통령 선출방식은 국민투표를 통해 전국적 동향을 파악하면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을 구성하고 이를 구성하는 선거인 (elector)이 입후보자 중 두 명에게 투표하는 방식이었어.  러닝메이트란 개념이 없는 때였기 때문에 각 후보가 모두 대통령 후보였지.  선거인들이 두 명에게 투표해 과반수 이상의 지지표를 얻은 사람으로 다득표자가 대통령이 되고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지. 이 투표방식은 1804년 6월 12차 개헌이 비준되면서 5번째 대선에서부터 선거인이 대통령후보와 부통령 후보에게 각각 한 표씩 투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  모두가 선거인단에서 당선자를 결정하는 '간접선출' 방식인 셈이지.  따라서 국민투표에서 다수표를 얻은 후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대통령에 선출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도 있는 방식인데,  선거인단의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대통령의 경우 연방 하원에서 선출하고, 부통령의 경우에는 연방 상원에서 선출하게 되지.  

1788년 12월 15일부터 1789년 1월 7일 사이에 치러진 초대 선거 당시 전체 69명의 선거인단이 구성되었는데 이때 투표한 결과 대통령의 경우 선거인단 전원이 죠지를 찍었고 두 번째로는 쟌을 찍었어. 선거결과 죠지의 반도 안 되는 34표 획득이라는 현실에 쟌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것 같아.  결국 부통령으로서의 임무보다는 부통령이 의장이 되어 주재하는 미국 상원의장직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어. 상원의장의 최대역할은 상원에서의 의원투표가 가부 동수가 되었을 때 결정적인 표를 행사하는 것인데 역대 상원의장 누구보다 많은 29번의 결정표를 행사했음을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만큼 행정부일은 안 보고 상원모임에 많이 참석했다는 얘기고, 임기 1기 때는 죠지도 그를 별로 찾지 않았다고 해.  또 고집불통 성격인 데다 상원들에게 장황설을 자주 늘어놓는 바람에 쟌은 기피인이 되어가고 있었지.   


[공명]  부통령으로 행정부 업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네요, 선생님.

[해월]  쟌 스스로가 부통령이란 자리를 아주 싫어했던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천덕꾸러기 자리, 잘못 만들어진 자리라고 말하곤 했어.  국무회의에도 참석지 않았고 죠지도 별로 찾지도 않았다는 걸 보면 당시 정, 부통령 선거가 ‘러닝 메이트’(Running Mate) 제도가 아니라서 그랬지 않았나 생각해.  정, 부통령이 한 팀으로 구성되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제도는 미국 내 단합을 강조한 '에이브러헴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치른 1864년 선거에서부터 출현되었지.  어쨌든 쟌은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는 1792년 선거에서는 77표를 얻어 다시 부통령을 맡게 되었어.  나중에 죠지가 의지했던 헤밀턴과 재퍼슨이 사임하고 떠나자 그때서야 쟌을 찾아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  


[공명]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때 죠지는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까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네요.

[해월]  8년 동안 재임하면서 미국 정부와 의회 등 정가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바로 정치사상이 발전하면서 정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죠지가 그렇게 싫어했는데도 불구하고 헤밀턴이 주축이 된 ‘연방주의당’(Federalist Party)과 재퍼슨이 이끈 ‘민주-공화주의당’(Democratic-Republican Party) 등 양당세력이 갈라지게 되었지.  쟌은 정확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연방주의자 편에 섰고.  양쪽에서 두 명씩 후보자를 낸 1796년의 3 번째 대선에서 쟌이 71표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고 68표를 얻은 재퍼슨은 부통령직을 맡게 되었어.  이때의 선거가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 부통령이 반대 당 출신으로 선출된 선거였지.  


John Adams in 1793 by John Trumbull


[공명]  두 사람 모두 건국의 아버지인데 반대당이라고 하니 왠지 걱정이 되는데요?  한국에서 반대당 사람들끼리는 서로 식사도 안 한다고 하잖아요?

[해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파당싸움은 스스로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었는데 미국에서도 그 같은 싸움이 시작된 것이라고 보면 될 거야.  권력을 위한 싸움은 핏줄도 봐주지 않으니까. 그런데 쟌은 고집불통의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주위의 말을 잘 듣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  대통령에 취임해 놓고 내각은 죠지의 사람들을 그대로 두었어.  내각 구성원은 대부분 헤밀턴 파에 속하는 사람들로 겉으로는 순탄하게 정부를 운영하는 것 같으면서 속으로는 그들의 의견을 별로 들으려 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지.  그리고 업무는 뉴욕시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로 메사추새츠 주 퀸지에 있는 개인저택 ‘피스휠드’(Peacefield)에서 보았다고 하니 어쨌든 정파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그의 정서를 엿볼 수 있을 거야.  


"Peacefield" at Quincy, Massachusetts


[공명]  지도자가 내각과 정치인들을 멀리한다니 이해가 가지 않네요.

[해월]  쟌의 대통령직 수행에 있어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은 많아.  부통령 시절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정부가 영국과 전투를 하면서 미국에 도와줄 것을 요청했었지.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가 미국과 군사동맹까지 맺으면서 미국을 도와 전투도 같이했으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미국이 도와주리라 생각했지만 당시 대통령 죠지와 쟌은 중립을 선언해 버렸잖아.  재퍼슨 파는 그때 프랑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1794년에 미국과 영국이 ‘Jay Treaty’를 맺자 곧바로 미국 상선을 나포하기 시작했는데  1796년 선거에서 재퍼슨을 지지했던 프랑스는 재퍼슨이 선거에서 지자 미국을 적대국으로 대하기 시작했어.  


[공명]  쟌 스스로 프랑스와 외교관으로서 대화를 나눌 때 안 좋은 과거가 있었는데 점점 꼬이고 있네요.

[해월]  대통령이 된 쟌으로서 프랑스와의 문제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였어.  상, 하 양원에 나가서 협상단을 프랑스로 보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는 했지만 만약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군사력을 증대시켜야 한다고도 역설했지.  프랑스에 보낸 평화협상단은 프랑스의 공화국 정부로부터 모욕만 당하고 결국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귀국해 버리고 말았지.  쟌은 다시 의회에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해 국방력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인 이민자들이 국내 여러 곳에서 반정부 선동을 일으키자 이를 억누를 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어.  ‘이민자들과 치안방해법’(Alien and Sedition Acts)이라고 통칭하는 이 법들은 ‘귀화법’ (Naturalization Act), ‘친화 이민자법’(Alien Friends Act), ‘적대 이민자법’(Alien Enemies Act) 그리고 ‘치안방해법’ (Sedition Act) 등을 말하지.   앞의 세 가지 법은 이민자들 특히 프랑스인 이민자들을 타깃으로 대통령의 추방권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시민권 신청요건을 까다롭게 하는 법들이었어.  치안방해법은 정부와 관리들을 향한 거짓유포, 선동, 악의적 글 유포등을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고.  쟌이 1798년 6월에 이 법들에 서명하자 프랑스를 지지하는 재퍼슨 등 반대파들은 정부가 비헌법적 조치를 취한다면서 연방정부의 비헌법적 조치에 주정부가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며 궁극에 가서는 연방을 탈퇴하는 것도 방안이라고 압박하고 나섰어.


[공명]  얼마 전 45대 대통령 트럼프가 다시 공화당의 단독 대선입후보자가 되자 같이 일했던 전 부통령 ‘마이클 팬스’(Michael Pence)가 자기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듯이 쟌과 재퍼슨은 동지였으면서도 격렬하게 평행선을 가고 있네요.

[해월]  앞에서는 선의의 경쟁자이지만 뒤에서는 적이기도 한 것이 정치인 거야.  싸울 동기가 발생하면 죽을힘을 다해 이전투구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  1798년 5월 프랑스 민간전함이 뉴욕항에서 미국상선을 나포하면서 불거진 사건으로 미국 내가 한바탕 전쟁소란이 발생한 적이 있어. 쟌은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면서 ‘잠정군’(provisional army)을 편성하고, 죠지를 다시 총사령관으로 위촉했지.  또다시 외국과의 전쟁 가능성이 일촉즉발까지 가고, 헤밀턴 파와 재퍼슨 파간의 전쟁 아닌 전쟁이 발생하지.  다행히 프랑스가 1798년 8월 영국과의 ‘나일의 전투’(Battle of the Nile)에서 심한 타격을 입게 되자 입장을 바꾸어 미국과 평화협상을 갖기를 원하면서 전쟁의 위험은 피했고 미국의 교섭단이 프랑스로 떠나게 돼.


[공명]  쟌의 임기중에 하마터면 프랑스 하고 전쟁을 치를 뻔했네요.

[해월]  아직 국고가 튼튼치 않은 미국으로선 천만다행이었지.  전쟁을 치를지도 모른다고 군사를 동원하면서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쟌 행정부는 미국 최초의 연방 직접세(Direct Tax)를 거둘 계획을 세웠었어.  죠지 때에는 소비세(excise tax)와 관세(tariffs)로 국가재정을 채웠기 때문에 직접세를 걷는다니까 또 난리가 났지.  1798년에 실시한 부동산세(land tax)는 토지 가치에 따라 점진적으로 최대 1%까지 세금을 징수하는 연방세법으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팬실베니아 주에서 발생해 폭동으로 발전하기도 했어.  ‘후라이스 반란’ (Fries Rebellion)이라고 하는 이 폭동은 곧 진압되었고, ‘쟌 후라이스’(John Fries)를 포함한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반역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는데 내각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쟌은 이들을 사면했어.  반란이 아니라 그냥 충동적 폭동이었다는 것이지.  법률가적 판단이었지만 이 문제로 또 나라가 시끄러워졌지.  


[공명]  이러나저러나 나라일은 끝없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나 봐요?

[해월]  두 번째 미국의 대통령직을 맡은 쟌은 처음부터 죠지만큼의 카리스마가 없고 동지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정을 쉽게 풀어나가기는 어려웠어.  연방주의당 소속이지만 당을 이끄는 세력인 헤밀턴의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적만큼이나 사이가 멀었잖아.  반대파인 재퍼슨으로부터의 공세는 대 프랑스 정책과 법제정 등으로 악화되고 있었으니까 이리저리 얽힌 실타래 풀기가 힘들었을 거야.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쟌의 노력으로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지.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수 있는 위기를 모면한 것이 천만다행이었어.  


[공명]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한 쟌행정부가 마무리를 잘 지었겠지요?

[해월]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국에 전운을 드리웠던 프랑스가 영국과의 해전에서 패하면서 전략을 바꾸기 시작하는데 이때 ‘나폴래옹’(Napoleon Bonaparte)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1799년 11월 쿠데타를 성공시키면서 정권을 장악하고 미국과의 화해를 추진하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1801년 2월 3일에 와서 양국 간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쟌으로서는 임기 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어.  만약 이 같은 성과가 1800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치러졌던 대통령 선거 이전에 이루어졌다면 선거결과가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  왜냐하면 쟌이 재퍼슨하고 싸웠던 두 번째 선거에서 아쉽게도 73대 65표 차로 패했기 때문이야.  전쟁을 피했다는 커다란 공적이 미리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쟌이 재선에 승리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쟌은 선거패배 뉴스에 더하여 둘째 아들 ‘찰스’(Charles)가 알코올중독이 심해지면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하는 슬픔도 함께 겪어야 했어. 


[공명]  쟌의 운명이고 미국의 운명이었을 것 같네요.

[해월]  공명이가 나하고 같이한 시간이 길었나 보네.  ‘운명’이라 넘기는 것을 보니. 하하!  


[공명]  그냥 그랬을 것 같아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거든요.

[해월]  미국이라는 국가가 처음 출발했을 때는 걸음마 걷는 아기 정도의 힘을 가졌었기 때문에 외세의 힘이 더 강했지.  그래서 힘 약한 쟌 행정부는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애쓰면서도 한편 그들 국가와 대항하기 위해 해군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고 군함도 건조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쟌을 ‘미국 해군의 아버지’ (Father of the American Navy)라 칭하기도 하는거야.  


[공명]  ‘건국의 아버지’와 ‘해군의 아버지’라!  걸음마를 마치고 힘차게 걸어가는 미국을 느끼게 하네요.  쟌의 임기가 1787년 3월 4일부터 1801년 3월 4일까지였는데 저희가 주목할 만한 역사에 어떤 것들이 있나요?

[해월]  가장 잊히지 않는 것 중에 1800년 4월 24일 서명한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 설립 법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인 의회도서관에는 3,000명이 넘는 인원이 1억 8천만 권에 달하는 문헌을 관리하고 있지.  의회도서관 한 쪽이 'John Adams Building'이라고 이름지어져 있어.  그다음은 1792년 10월 13일 워싱턴 디씨에서 착공한 대통령의 공식 거주 주택 겸 집무실인 ‘Presidential Residence’ (또는 Executive Residence)가 1800년 11월 1일 완공되면서 최초로 입주한 주인공이 된 사실이야.  공식 주소는 1600 Pennsylvania Avenue, NW, Washington, DC, 20500, U.S.A인데 영국과의 ‘1812년 전쟁’ 때인 1814년 8월 24일 영국군의 방화로 외부와 내부가 불에 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5대 대통령 때 수리해서 1817년에 재입주했어.  사람들은 이 건물을 ‘White House’(백악관)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부르지. 쟌은 수주 후에 입주한 부인 ‘에비게일’(Abigail)에게 준 글에서 “하늘에 기원하건대 이 집에 축복을 내리셔서 대대로 정직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들어와 나라를 이끌게 하소서!”라는 축원을 했어.


'John Adams Building'.  The Library of Congress


[공명]  아!  백악관의 첫 주인이 쟌이었네요!  언제 봐도 멋있는 건물이어요.  앞이 탁 틔어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맞댈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이라 생각 드는 건물이지요.  뒷면 모습도 인상적이고요.

[해월]  쟌의 업적 중 또 하나는 ‘의회의사당’(Congress House 또는 Capitol Building)을 개원한 사실이야. 1793년 9월 18일에 착공한 의회의사당은 연건평 16.5 에이커(2만 평)에 5층 건물인데 그 중앙부가 1800년 11월 17일 완공되어 제7차 의회가 개회를 했고, 11월 22일에 쟌이 상∙하 양원이 모인 가운데 네 번째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 Address)을 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었어.  이 연설을 마지막으로 향후 113년 동안 대통령이 의회에 가서 직접 국정연설하는 연례행사가 중단되었지.  1913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제28대 대통령 때에 가서나 재개되었어.  


[공명] 쟌의 퇴임 후 삶은 어땠어요?  하도 척진 사람이 많아서 괜히 쓸쓸했을 것 같네요.

[해월]  잘 봤어!  정적이지만 잘 되기를 바라면서 재퍼슨에게 글을 써 보냈지만 재임중과 퇴임 후에도 그로부터 무시당하다가 막판에 가서나 물꼬를 트게 되지.  고향집인 ‘피스휠드’(Peacefield)에서 농사나 짓고 살았는데 부인 에비게일이 1818년 10월 28일 ‘장티푸스’(typhoid)에 걸려 고생하다 73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더욱 쓸쓸한 삶을 살았어.  말싸움을 좋아해 친구도 별로 없고 5피트 6인치 (167cm)의 자그마한 키에 젊었을 때의 옹골찬 모습을 잃어버리고 비대한 몸을 가진 쟌은 90년이라는 장수를 했지만 항상 병을 달고 살았지. 잇몸병이 심해 이빨은 거의 빠졌고 잘 맞지 않은 의치 끼기를 싫어해 발음이 시원치 않았어.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아름다운 노년을 지내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공명]  사람들은 ‘곱게 늙었다’ 내지는 ‘아름답게 늙었다’는 인사말을 듣고 싶을 거예요.  신체적인 찬사보다 마음의 행복이 더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해월]  그 말에 나도 공감해.  육체적으로도 병 없이 건강하면 좋겠고, 정신적으로도 만족감이 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지.  쟌은 상대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는데, 1825년 2월 장남 ‘쟌 퀸지’(John Quincy)가 세명의 경쟁자를 누르고 하원에서 최종적으로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쁜 소식을 맞았지.  본선에서 선거인단의 과반수 지지표를 얻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헌법상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경쟁자들을 누르고 당선되었던 거야.


John Quincy Adams 1824 by Thomas Sully


[공명]  장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아마 일생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었겠지요?

[해월]  분명하지!  나부터도 오래전에 두 여식 중 장녀가 의사면허증을 받았다는 소식 그리고 둘째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전화목소리가 얼마나 기뻤던지…  쟌은 장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너무 만족스러웠던지 그다음 해 미국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던 1826년 7월 4일 화요일 오후 6시 20분 9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어.  그 보다 몇 시간 전에 토마스 재퍼슨도 그의 버지니아 주 ‘몬티샐로’(Monticello) 집에서 83세로 숨을 거두었지.     


[공명]  아!  두 거목이 한날에 하늘로 올라갔네요.  같이 가면서 미국을 위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겠지요?

[해월]  분명히 그랬을 거야.  사랑하는 방법은 달라도 사랑하는 대상은 같았으니까.  미국의 2대 대통령 쟌 애담스는 그의 부인 에비게일 스미스 애담스와 함께 메사추새츠 주 ‘퀸지’ 시에 있는 ‘United First Parish Church’의 가족묘에 안장되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지.   

쟌 애담스와 부인 에비게일 애담스의 묘소


[공명]  쟌의 기념관은 아직 별도로 존재하는것 같지 않아요, 선생님.

[해월]  맞아!  많은 사람들이 쟌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나 동상 등이 전혀 없음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 그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어.  우리 부근에서 그나마 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의회도서관 일부 건물이 그를 기리기위해 이름을 붙인 것과 워싱턴 디씨에 있는 '독립선언문 서명 56인 기념물'(The Memorial to the 56 signers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56인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있는 석판이지(맨 위 사진 참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쟌이 세상에 남긴 족적 중에 아직도 우리 곁에 있는 것은 그가 1822년 설립해 놓은 ‘Adams Temple and School Fund’라는 기금이야.  당시 쟌이 소유하고 있던 땅 중에 2개의 부지(약 1,000 에이커 규모)를 교회와 학교건축용도로 퀸지시에 기증하고 관리를 맡겼었지. 아직도 이 기금은 존재하지만 그 운영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고 관리인과 수혜자 선정문제로 소송 중에 있어.  "쟌의 후손으로 현재까지 살아남은 가장 연로한 남성이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쟌 후손들의 주장이야.  ‘피터 보일스턴 애담스’(Peter Boylston Adams)가 2015년 3월에 법원에서 쟌 애담스의 후손으로 기금의 관리인이 되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아직 결정 나지 않아 관심의 대상이지.           

            

* 쟌 애담스의 서명을 감상하면서 그의 인품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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