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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Jul 16.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9

3대 토마스 재퍼슨 - 1 of 2 : 르네상스 멘 1743 - 1773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밸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은 정치가이자 외교관, 변호사, 발명가, 건축설계사, 사상가, 종교인, 작가 그리고 농부였습니다.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공화제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합중국의 초대 국무장관, 2대 부통령 그리고 3대 대통령을 역임한 토마스 재퍼슨은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내성적 투쟁가였습니다.  

원명이 ‘미합중국 13개 주 만장일치 선언문‘(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인 식민지 미국의 개국의 서사시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주 저자인 토마스는 1743년 4월 13일 토요일 버지니아 주 남부 ‘샤롯츠빌’(Charlottesville) 시 인근 ‘엘버말’ (Albemarle) 카운티에 있는 가족농장 ‘셰드웰 농장’(Shadwell Plantation)에서 아버지 ‘피터 재퍼슨’ (Peter Jefferson.  1708 – 1757)과 어머니 ‘제인 렌돌프’ (Jane Randolph.  1720 – 1776) 사이의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4남 6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토마스는 '대영제국'(Great Britain)을 구성하는 ‘웨일즈’(Wales) 지역 상류층의 후손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태어나 영국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 내 26개 주에서 주 안의 카운티에 토마스의 이름을 넣었을 만큼 깊은 역사를 남긴 토마스 재퍼슨(이하 토마스)이 미국에 보여 준 외골수적이고 천재적인 지도력을 같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재퍼슨 1791


[媄磑]  귀족적이고 교양 있어 보이는 토마스의 선조들은 어떤 분들이었는지요, 선생님?

[海月]  나도 토마스가 예전 귀족들이 풍기는 무언가 다름을 가졌다고 느끼고 있는데 미애도 그런가 보네!  토마스만 해도 이미 영국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세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선조들이 넘겨준 풍미는 그대로 전해지겠지.  불행히도 토마스의 선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전해주는 공식적 문헌이 없어 긴 설명은 할 수 없게 되었어.  그리고 토마스도 긴 얘기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미애]  네?!  토마스가 왜요?  가족얘기하는 걸 싫어했나요?

[해월]  싫어한다기보다 본인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성품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아.  토마스의 선조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정부의 공식문서가 없다 보니 현재까지 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을 추론하는 수밖에 없어.  지금까지 추적이 가능한 가장 위에 있는 분이 그의 5대 조부인 ‘사무엘 재퍼슨 시니어’(Samuel Jeaffreson Sr.  철자가 다름에 유의)라고 볼 수 있어.  


[미애]  5대 조부님까지 알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씨의 철자가 다른 이유가 있나요?

[해월]  뚜렷한 정설이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지 않을까?”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토마스의 5대 조부 (玄祖父)라고 추정되는 ‘사무엘 시니어’는 영국 ‘서폭 카운티’(Suffolk County)의 ‘페티스트리’(Pattistree)라는 마을에서 1584년 5월 9일 태어나 영국령 ‘웨스트 인디스’(West Indies)의 ‘세인트 킷츠’(St. Kitts)에서 1649년 12월 12일 65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어.  부친의 성함이 ‘쟌 재퍼슨 1세’(John Jeaffreson I)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본국에서 사용한 철자와 미국에 건너온 분들이 사용한 철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유추할 뿐이지.  토마스가 쓴 글에 “아버지 쪽 선조들이 웨일즈(Wales)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라고 추정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지 사실 선조들이 웨일즈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기록도 별로 없어.  


[미애]  5대 조부님께서는 가족이 많으셨나요?

[해월]  어머니가 ‘앨리자배스’(Elizabeth)였다는 기록과 형제는 형 ‘쟌 2세’와 동생 ‘조샙’(Joseph) 그리고 여동생 둘이 있었다고 해.  1606년에 서폭 카운티에서 ‘앨리자배스 카르’(Elizabeth Carr.  1589-)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사무엘 주니어’(Samuel Jefferson Jr.  1607-1690. 4대 조부)와  ‘쟌’(John. 1609-1671) 그리고 ‘수잔’ (Susan.  1611-?) 등 2남 1녀를 두었지.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5대 조부 사무엘 시니어는 1624년 1월 동생 쟌과 함께 이웃에 사는 ‘토마스 워너 경’(Sir. Thomas Warner)이 ‘커리브 해’(Caribbean Sea) 쪽 섬나라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주선해 그의 배 ‘호프웰’(Hopewell) 호에 올라 당시 웨스트 인디스(West Indies)라고 부르던 커리브 해 연안 섬나라 중 하나인 ‘세인트 킷츠’(St. Kitts)에 도착하지.

                                                                                 

Saint Kitts Islands, Caribbean Sea


[미애]  미국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중남미로 가셨네요!

[해월]  맞아!  기후 좋은 그곳에서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는 기호식품인 담배 농장을 잘 가꾼 사무엘 시니어는 1629년에 영국서 살고 있던 부인과 사무엘 주니어, 쟌 등 가족을 모두 농장으로 데리고 갔어.  시집간 딸 수잔은 빼고.  1649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후 쟌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사무엘 주니어(고조부)는 부인과 함께 1669년에 그 옆 섬인 ‘안티과’(Antigua)로 이사해 자기의 담배농장을 가꾸었지. 현조부의 부인에 대한 사망기록은 없는데 남편과 함께 세인트 킷츠 섬에 뭏혀있겠지.


[미애]  4대 조부 사무엘 주니어께서 자녀를 많이 두셨어요?

[해월]  미애는 가족에 관심이 많네! 그런데 부인들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얻지 못해 섭섭하네.  사무엘 주니어는 아버지와 함께 섬으로 가기 전인 1628년 서폭 카운티에서 ‘앨리자배스 브룸’(Elizabeth Broom.  1610-?)을 부인으로 맞이했어.  결혼한 후 곧 부인과 함께 세인트 킷츠로 간 그는 ‘토마스 시니어’ (Thomas Jefferson Sr.  1630 – 1697.  3대 조부)를 낳았어.  담배농장을 운영하며 살던 사무엘 주니어는 1690년 10월 23일 83세를 일기로 안티과 섬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부인도 그곳에 같이 묻혔어. 


[미애]  그럼 3대 조부 되시는 토마스 시니어께서 미국으로 오셨나요?

[해월]  맞아!  세인트 킷츠 섬에서 1640년경 태어난 토마스 시니어는 아버지가 안티과 섬으로 이사한 해인 1669년에 버지니아 주 ‘핸리코 카운티’(Henrico County)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아마 할아버지가 타고 오셨던 그 호프웰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지 싶어.  그 배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왕복하던 이민자 운송선이기도 했으니까.  이 분이 미국에서 재퍼슨가를 이룬 선조가 되며, 3대 대통령의 직계 선조인 증조부가 되는 분이지.


[미애]  재퍼슨가를 이루신 토마스 시니어는 웨스트 인디스에 있는 섬에서 태어난 영국분으로 아버지를 도와 담배농장을 운영하시다 29살 경에 미국으로 건너오신 분이시네요.  아버지한테서 유산을 받아 가지고 오셨겠지요?

[해월]  하하!  섬을 떠났을 때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니까 유산을 받기는 어려웠을 거고 아버지가 노잣돈을 마련해 주시지 않았을까?  어쨌든 토마스 시니어는 단신으로 버지니아 주 핸리코 카운티 제임스 강 인근에 있는 ‘오스본 농장’(Osbornes Plantation)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여.  왜 그곳으로 갔는지는 확실치 않아. 작은할아버지가 계셨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답이 없지.  토마스 시니어가 자리 잡은 곳은 일찍이 ‘브렌치’(Branch)라는 가문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었어.  


토마스 재퍼슨 주니어 (토마스의 할아버지) 출생지이기도 한 오스본


[미애]  혼자 미국으로 건너왔으니 서둘러 가족을 만드셨겠네요.

[해월]  다행히 오스본농장 주위에 명문가인 브렌치일가가 있었고 친하게 지내면서 그곳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던 ‘크리스토퍼 브렌치 주니어’(Christopher Branch Jr.)의 딸 ‘메리’(Mary Martha Branch)와 1677년에 결혼하게 돼.  슬하에 ‘메리’와 ‘토마스 주니어’(Thomas Jefferson Jr. 조부)  그리고 ‘말사’(Martha) 등 1남 2녀를 두었어.  증조부는 1697년 11월에 핸리코 카운티 오스본 농장에서 사망했고, 그의 부인 메리는 1701년 ‘조셉 메톡스’(Joseph Mattox)에게 재가했다가 몇 년 후에 ‘찰스 시티 카운티’(Charles City County)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


[미애]  조부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나요?

[해월]  조부 토마스 주니어(1677-1731)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오스본 농장에서 태어나 1697년 10월 20일 ‘피터 휠드’(Peter Field.  1645-1707)의 딸 ‘메리’(Mary Field.  1679-1715)와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두었어.  ‘주디스’(Judith.  1698-1786), ‘토마스 3세’(Thomas III.  1700-1723), ‘휠드’(Field.  1701-1765), ‘피터’(Peter. 1708-1757. 부친), ‘말사’(Martha.  1709-1797), 그리고 ‘메리’(Mary.  1714-1755) 등이야.  

토마스 주니어는 장인 ‘피터 휠드’가 민병대 소령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장모인 ‘주디스 손’(Judith Soane)이 버지니아 주 하원의장의 딸이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쉽게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었어.  그도 나중에 민병대 대위로 근무하고 1714년에는 핸리코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직을 맡아 거의 20년이나 봉직했어.  정부로부터 땅도 하사 받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1715년에 받은 ‘화인 크릭’(Fine Creek) 지역에 있는 1,500 에이커 (약 1백8십3만 평) 땅은 나중에 토마스의 아버지 피터에게 상속되었지.


[미애]  할아버지가 정부일도 하시면서 재산도 많이 가지고 계셨군요?

[해월]  정부일과 더불어 1718년에는 지역 치안관에 선출되기도 했고, 1720년에는 화재로 재산상 손실을 많이 보았던 것으로 기록이 있긴 한데 자세한 내용은 없어.  조부는 첫 부인인 메리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엘리스 아이즈리 워드’(Alice Aisley Ward)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지만 1725년에 작성한 유언장에 두 번째 부인이 빠진 것으로 봐서 그녀는 오래 산 것같지가 않아.  이 두 사람 사이에 ‘재미마’(Jemima.  1730-1770)라는 딸이 있었다고 해.  불행히도 1723년에는 큰 아들 토마스 3세가 미래에 사돈이 되는 ‘이샴 렌돌프’(Isham Randolph.  3남 피터의 장인이 됨)가 지휘하는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호에 승선했다가 물에 빠져 사망하고 말아.  조부 토마스 주니어는 1731년 2월 18일 그의 농장에서 53세를 일기로 사망하지.


[미애]  어른들이 대체로 일찍 돌아가셨네요.  토마스의 아버지 피터는 어떤 분이세요?

[해월]  피터도 1708년 2월 29일 '체스터휠드 카운티'(Chesterfield County) '제임스강'(James River)을 끼고 있는 오스본 농장에서 6형제 중 넷째이자 3남으로 태어났어.  어머니는 8살 때 돌아가시고 농장운영을 가르쳐주시던 아버지마저도 23살 때에 돌아가셨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장과 노예들을 지키며 살았고 주위의 땅을 더 사들여 2천 에이커(약 2백5십만 평) 규모의 ‘스노든’(Snowden)이라는 새 농장도 만들었지. 1739년에는 주위에 살던 부유한 농장주 ‘이샴 렌돌프’(Isham Randolph.  1687-1742. 토마스의 외조부)의 장녀 ‘제인’(Jane.  1720-1776.)과 결혼하여 4남 6녀의 자녀를 두었어.  그중 장남이 3대 대통령인 토마스야.

스노든 농장의 저택


[미애]  토마스는 형제부자였네요.  아버지 피터는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나요?

[해월]  18세기 버지니아 주 ‘엘버말 카운티’에서 살던 강한 성품과 자립심으로 점철된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피터는 우선 토지측량사로 많은 지역을 답사하면서 토지도 구입하고, 그곳에 담배농장을 운영해 오면서 그가 사망한 1757년경에 피터가 소유한 토지는 모두 7,200 에이커(약 8백8십만 평)에 달하였어.  피터는 또 지도제작자였는데 ‘토마스 루이스’(Thomas Lewis)와 함께 획정한 ‘훼어훽스 라인’(Fairfax Line)은 당시 ‘Northern Neck land grant’라는 토지무상지급 프로그램의 획정기준이 되었지.  그리고 1751년에는 ‘자슈아 후라이’ (Joshua Fry)와 함께 노스 케롤라이나와 버지니아를 거쳐 필라델피아를 연결하는 마차진행로(Great Wagon Road)를 그린 ‘후라이-재퍼슨 지도’(Fry-Jefferson Map)라는 역사적 걸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  미애가 궁금해하는 정치 참여는 1754년과 1755년 2년간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을 역임한 것이 전부야.


Fry-Jefferson Map  1751


[미애]  강한 성품이면서도 열심히 사신 분이셨던 것 같아요.  죠지도 측량사로서 국토를 관찰하셨다고 했는데 피터도 같은 일을 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었을 것이고 이를 아들 토마스에게도 전해주었겠지요?

[해월]  피터는 아버지를 도와 농장일을 했었기 때문에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고, 늘 후회했다고 해.  그래서 아들 토마스는 5살 때 정식 학교에 입학시켰어.  9살 때인 1752년에는 스코틀렌드 출신 장로교목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해 자연과학과 라틴어, 희랍어, 불어 등도 공부하면서 승마도 배웠지.  16살 때인 1761년 ‘윌리엄 엔 메리 대학교’(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 입학하기 직전 1758년부터 1760년까지 성공회목사 겸 교육자인 ‘제임스 모리’(James Maury) 목사집에서 기거하며 역사, 과학, 고전문학 등을 배우면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데브니 카’(Dabney Carr.  1743 - 1773)를 만나게 되었어.  데브니는 1765년 토마스의 누이동생 ‘말사’(Martha.  1746 - 1811)와 결혼해 처남, 매제 지간이 되었지.  또한 미국 정치의 한 획을 그은 정치가 ‘페트릭 핸리’(Patrick Henry)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눈 토마스는 그와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해.  

한편 대학교에 들어가 ‘윌리엄 스몰’(William Small) 교수를 만나 수학, 추상론, 철학 특히 경험론 등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그를 통해 ‘죠지 위스’(George Wythe)와 ‘후렌시스 훠키어’(Francis Fauquier) 같은 사상가, 정치가를 만나 상식에 맞고 합리적인 철학적 대화를 나누면서 정신세계를 키워나간 것으로 보여.  


[미애]  살면서 가장 친한 친구도 만나고 사상을 정립할 수 있는 대학시절도 보냈으니 토마스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가졌겠네요.

[해월]  그런 것 같아.  대학의 첫해에는 요즘 대학생처럼 공부보다는 인간으로 살았나 봐!  하하!  파티하러 다니고 춤도 추러 다니고 미팅도 많이 했던 것 같아.  나중에 토마스는 그때를 약간 후회한다면서 시간과 돈을 많이 낭비한 순간이었다고 했지.  그래서 둘째 해에는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하면서 우등생이 된 것 같아.   


[미애]  18세기 식민지 안에서 유럽 귀족풍 삶을 사는 부류도 있었을 테니 얼마든지 가능했겠지요.

[해월]  사실 죠지도 독립전쟁 전 마운트 버논에서 지낼 땐 거의 매일 파티를 열며 살지 않았나?  토마스는 대학을 졸업한 1762년에 판사였던 ‘죠지 위스’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법은 물론 철학, 역사, 기본법, 종교, 윤리, 과학,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책을 섭렵하면서 스승이 깜짝 놀랄 정도의 천재성을 발휘했어.  위스 판사는 토마스의 능력에 감동해 나중에 그가 가지고 있던 장서들을 모두 토마스에게 유산으로 넘겨주었어.  토마스가 엄청난 장서를 보유하게 된 시작이었지.  


[미애]  맞아요!  토마스는 다양한 종류의 상당한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데요.

[해월]  아버지와 위스가 물려준 책으로 만든 첫 번째 서장고에는 200권 정도가 있었고, 1773년의 두 번째 서장고에는 1,250권을 모았는데 1814년에 이르러서는 6,500권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해.  유럽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책을 많이 구입했을 거야.  한 가지 애피소드가 있는데 1814년 미국과 전투를 벌이던 영국군이 수도인 워싱턴으로 쳐들어와 의사당과 백악관에 불을 질렀을 때 ‘의회도서관’도 불태웠잖아.  그 후 정부가 의회도서관을 재건하는 사업을 시작하자 토마스가 그가 보유하던 장서를 미국정부에 2만 3천950 달러를 받고 넘겼다는 거야.  그 돈으로 그동안 진 빚 일부를 갚았다는 거지.  그리고는 곧 다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는데 그때 ‘쟌 에담스’에게 보낸 편지에 “난 책 없이는 못 살아!”라고 했다는 거지.  그가 사망할 때쯤 다시 모은 책이 약 2,000권이었다고 해.


[미애]  사람마다 좋아하는 물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토마스의 취미는 책을 모으는 것이었네요?

[해월]  토마스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을 떠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을 쌓았던 것 같아.  토마스가 두 살 때 어머니의 사촌이 사망하면서 그 사촌의 어린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가족 모두사촌 집으로 이사 들어간 적이 있는데, 토마스가 9살 때 가족은 다시 본가로 돌아갔지만 그때 토마스는 가족과 떨어져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Douglas)라는 성공회목사와 같이 공부하며 5년 동안 지냈지.  이 기간 동안 외로움에 시달려 공부가 시원치 않았던 토마스는 그때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다는 감정이 생겼다고 해.  가끔 셰드웰 농장에 가서 가족을 만나곤 했지만 어린 성장시절에 부모의 보호와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던 거지.  형제들과의 관계도 매우 소원한 상태로 되면서 성격이 내향적이 되고 그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본인의 감정과 표현을 숨기며 살게 된 거야.


[미애]  책을 너무 좋아하더니 내향적 인품을 갖게 되었나 보네요.  공부도 적당히 하는 게 좋은데…

[해월]  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철학적으로는 더 성숙하게 성장하겠지.  토마스는 1767년에 버지니아 주 변호사가 되면서 어머니 메리와 함께 셰드웰 농장에서 살게 되었어.  아버지 피터가 1757년 사망했을 때 셰드웰 농장과 집은 어머니에게 남기고, 스노든 농장은 작은 아들 렌돌프에게 그리고 토마스에게는 5,000 에이커(약 6백만 평)에 달하는 야산 땅(토마스는 이곳에 ‘몬티샐로’Monticello라 알려지는 저택을 지어 살게 됨)을 남겼었지.  사실은 토마스가 스노든 농장과 언덕땅 중 선택하라는 아버지 말씀에 언덕땅을 선택한 거야.

 

한편 토마스는 1769년부터 1775년까지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생활도 하게 돼.  역설적이긴 하지만 노예 소유주였고 한 사람의 노예도 해방시켜주지 않았던 토마스가 의원생활 중에 노예제도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야.  그러나 그가 주장한 개혁이란 것은 노예해방을 포함한 노예관리권을 지방의 영국출신 주지사나 법원으로부터 노예소유자에게 이관하여 그들이 재량껏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   같은 원리로 그가 나중에 연방정부가 중앙집권적 권리를 갖는 것을 반대하고 지방의 주 정부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법원재판에서 자유를 갖겠다는 노예를 변호할 때에도 그의 주장은 “인간은 태어날 때 조물주로부터 자기 스스로에 대한 관리를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권리인 인간기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지.  타에 의한 지배가 아닌 본인 중심의 사고가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토마스는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을 인정하지 않게 되기도 했지.  이 같은 그의 생각은 그가 작성한 ‘독립선언문’에도 잘 표현된 사상이야.  


[미애]  인간의 기본권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에 대해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로 보았네요.  맞는 말 같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쉽지 않은 시대적 부담도 있는 사상이겠지요.

[해월]  누구로부터 나의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  그것을 토마스는 또 다른 방법으로 표출하기 시작했어.  건축설계사로서의 자질을 마음껏 표현한 그의 집 ‘몬티샐로’(Monticello)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지.  이태리어로 ‘낮은 산’ 또는 ‘작은 언덕’이라는 뜻의 몬티샐로를 그가 물려받은 언덕 땅 꼭대기에 1768년부터 소유하고 있는 노예들과 주위의 석공, 목수들의 도움을 받아 이태리의 ‘배니스’ (Venice) 양식인 신 고전 건축양식을 참고해 본인의 취향대로 짓기 시작했는데 1770년에 일부만 완성된 집으로 일단 이사 들어갔어.   


Monticello  1926


Monticello  2010


[미애]  그 유명한 몬티샐로 저택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군요?!  고풍이 나면서 절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건물이지요.  전 아직 못 가봤어요.

[해월]  그래?  허긴 미국에 45년째 살고 있는 나도 직접 가보지는 못했네.  그 근처 ‘샤롯츠빌’ (Charlottesville)에 있는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까지는 가봤는데 말이야!  언제 한번 같이 가 볼까?


[미애]  버지니아 살 때도 못 가보셨는데 이 먼 곳 라스 배가스에서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가시겠다면 제가 모시고 갈게요!  

[해월]  하하하!  고맙다!  노력해 볼게!  하여튼 새 집을 짓고 입주한 토마스의 마음속에 허전함이 있었는지 1772년 1월 1일 28살의 토마스는 23살 먹은 먼 집안 친척 ‘말사 웨일즈 스캘턴’(Martha Wayles Skelton. 1748.10.30 – 1782.9.6)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돼.   ‘말사 웨일즈’는 첫 남편이자 변호사였던 ‘베서스트 스캘턴’ (Bathurst Skelton.  1744-1768)과 결혼했지만 2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고 그와 사이에 낳은 아들 ‘쟌’ (John) 마저도 3살에 곁을 떠나는 슬픔을 안고 살고 있었지.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간 토마스의 청혼에 끝내 화답한 말사는 재혼을 했고, 동시에 전남편과 함께 살던 ‘앨크 힐 농장’(Elk Hill Plantation)을 포함해 다수의 노예를 유산으로 받아 가지고 오게 되지.  그녀와의 결혼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고 말했던 토마스 말처럼 말사는 피아노를 치고 토마스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둘은 꿈같은 10년을 보냈어.  그동안 1남 5녀를 두게 되지만 불행히도 첫딸 ‘말사’(Martha)와 셋째 딸 ‘메리’(Mary Polly)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다른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모두 사망하고 말았어.  한 무명의 아들은 17일밖에 살지 못했어. 결혼하고 일 년 후인 1773년 말사의 아버지 ‘쟌 웨일즈’(John Wayles)가 사망하고 이들 부부에게 135명의 노예와 농장땅 1만 1천 에이커(약 1천3백5십만 평)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이때 장인이 가지고 있던 빚도 같이 남기는 바람에 토마스가 오랫동안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


Martha Wayles and Thomas Jefferson


[미애]  토마스에게는 부인과 함께 많은 부동산 재산이 생겼지만 자식에 대한 복은 그리 많지 않았네요.

[해월]  사실 부인도 계속되는 출산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당뇨병 등 지병에 시달렸지.  말사의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는데 그 후 계모가 두 분이나 생기면서 계모의 손에 자라는 자기의 모습이 싫었던지 죽음을 눈앞에 둔 말사는 자기 아이들이 다른 엄마손에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토마스에게 재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구했어.  1782년 9월 34살 밖에 안된 부인마저 떠나보낸 토마스는 슬픈 충격에 잠겨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것 같아.  그 후론 일체 부인과 어머니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물론 재혼도 하지 않았지.  자식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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