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토마스 재퍼슨 - 2 of 2 : UVA 설립자 1774-1826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은 정치가이자 외교관, 변호사, 발명가, 건축설계사, 사상가, 종교인, 작가 그리고 농부였습니다.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공화제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합중국의 초대 국무장관, 2대 부통령 그리고 3대 대통령을 역임한 토마스 재퍼슨은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내성적 투쟁가였습니다.
원명이 ‘미합중국 13개 주 만장일치 선언문‘(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인 식민지 미국의 개국의 서사시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주 저자인 토마스는 1743년 4월 13일 토요일 버지니아 주 남부 ‘샤롯츠빌’(Charlottesville) 시 인근 ‘엘버말’ (Albemarle) 카운티에 있는 가족농장 ‘셰드웰 농장’(Shadwell Plantation)에서 아버지 ‘피터 재퍼슨’ (Peter Jefferson. 1708 – 1757)과 어머니 ‘제인 렌돌프’ (Jane Randolph. 1720 – 1776) 사이의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4남 6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토마스는 '대영제국'(Great Britain)을 구성하는 ‘웨일즈’(Wales) 지역 상류층의 후손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태어나 영국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 내 26개 주에서 주 안의 카운티에 토마스의 이름을 넣었을 만큼 깊은 역사를 남긴 토마스 재퍼슨(이하 토마스)이 미국에 보여 준 외골수적이고 천재적인 지도력을 같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媄磑] 그럼 토마스는 39살에 부인과 사별하고 독신으로 그 엄청난 삶을 이어나갔던 거네요.
[海月] 맞아! 독신이 된 토마스는 국가의 일에 전념하게 되지. 지금부터는 그가 정치에 몸담은 기간인 1774년부터 3대 대통령직을 퇴임하고 ‘몬티샐로’(Monticello)로 돌아온 1809년까지 35년간의 모습 그리고 말년을 돌아보기로 하자. 1774년과 1775년은 식민지 내에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정서가 팽배하였고, 영왕국의 징세 강요에 저항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독립전쟁의 단초가 되는 전투까지 벌여졌지. 급기야 식민지 주정부를 대표하는 두 번째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가 1775년 구성되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5인 위원회’가 만들어지지. 32살 먹은 토마스는 가장 어린 대의원의 한 사람으로 이 위원회의 일원이 되면서 '쟌 에덤스'(John Adams), ‘밴저민 후렝클린’(Benjamin Franklin), ‘로벗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 그리고 ‘로저 셔먼’(Roger Sherman) 등과 함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했어.
[미애] 토마스가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의 원작자 다섯 명 중 한 사람이 되었네요.
[해월] 쟌의 천거로 주 집필자로 선정된 그는 필라댈피아 시내 ‘700 마켓 스트릿’에 있는 방을 하나 빌려 1776년 6월 11일과 28일 사이 17일 동안 혼자 기거하며 독립선언문 초안을 마련했지. 다른 위원들과 약간의 수정을 거친 최종문안이 28일 금요일 대륙의회에 제출되었어. 2차 대륙의회에서는 1776년 7월 2일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영국으로부터 행정적으로 독립하겠다는 선언을 했지. 쟌 에덤스는 이 날을 미국의 '독립기념일'로 기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 토마스가 작성하여 제출한 독립선언문 원안은 토론과 수정을 거쳐 약 4분의 1을 삭제한 수정안이 마침내 7월 4일 대륙의회에서 채택되었고, 8월 2일에는 참석한 각주의 대의원들이 서명을 완료했지. 대의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영국왕에 대한 역적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고문과 죽음을 각오하는 결의를 한 것이었어. 유럽에서 막 피어난 ‘계몽사상’(Enlightenment)에 심취한 토마스가 서문에 기록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고 하는 문구는 현재까지 영어표현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로 평가받고 있으며 개인 및 인권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문구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미애] 1776년 7월 4일을 미국에서는 독립기념일로 온 나라가 축제날로 즐기는데 이 날이 있기까지 토마스와 여러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네요.
[해월] 그렇지. 그 당시 그곳에 모여들었던 식민지 사람들의 젊은 지도자들은 엄청난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었지.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하면서 온 나라가 독립전쟁으로 돌입했으나 토마스는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고 1776년 9월 고향인 버지니아 주 '엘버말'(Albermal) 카운티를 대표하는 버지니아 주하원 의원에 선출되어 향후 3년 동안 버지니아 주헌법과 종교자유법 초안 등을 마련했어. 1778년에는 버지니아 주가 가지고 있는 제 법률에 대한 수정작업을 맡게 되는데, 3년간 126가지의 법안을 만들기도 했지. 공화정의 기초가 된다며 ‘공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기도 하고, 지주계급의 세습적인 상류계층 형성을 금지하자고 주장하고, 장자상속의 특권을 폐지시키자고도 했어.
[미애] 선생님도 예전에 법학 공부를 하시면서 법안작성 경험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토마스도 상당히 많은 법안을 만들었네요.
[해월] 내가 한 것은 실제 법안보다는 지극히 학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 토마스는 1779년에는 1년 임기인 버지니아 주지사에 선출되고 1780년에도 다시 선출되기도 했어. 지금은 임기가 4년이지만 말이야. 그가 주지사였을 때 주 수도를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서 ‘리치먼드’(Richmond)로 옮기고, 공립교육, 종교분리와 자유 그리고 상속법에 대해 대중에 알리기도 했지. 독립전쟁 중인 1781년에 영국군이 리치먼드를 침입해 오자 대피하기도 했던 그는 다행히 무사했지만 그 후로는 주지사에 재선 되지는 않았어.
[미애]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했으니 정치와 행정에 대해 확실한 경험을 할 수 있었겠네요.
[해월] 30대 중반에 이미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을 거야. 그때는 부인도 함께 살았을 때이니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업무를 보았을 테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는 사회라고 말해오던 그에게 안타까운 것은 1781년 전투로 어려울 때 그의 딸 ‘루시’(Lucy)가 1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부인이 사망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낳은 또 하나의 딸 '루시'도 1784년에 채 3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슬픔을 겪게 돼.
[미애] 아! 인간적으로 너무 힘든 순간을 맞이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전혀 행복할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해월] 내가 생각해도 아버지나 가장으로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이라고 봐. 하나도 힘들던데. 안 그래도 내성적 성품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슬픈 일을 여러 번 겪었으니 밖에서 가족얘기 전혀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생각과 느낌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며 살았을 테니 많이 힘들었을 텐데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나라일에 열중하면서 풀지 않았나 싶네.
[미애] 이제 미국이 독립을 이루면서 정식 국가가 되었으니 건국의 아버지들이 할 일이 많아졌겠죠?
[해월] 우선 독립전쟁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지도자들은 2차 대륙의회를 대체할 조직을 만들었어. 1781년 3월에 연방정부의 전신이 되는 ‘연합의회’(the Congress of Confederation)를 설립하고 미국을 이끌어 나갈 방도와 체제를 정립하기 시작했지. 하나의 원으로 구성된 의회와 행정부 역할을 동시에 갖는 연합의회는 각 주에서 파견된 대의원으로 구성되고, 각자 1표씩의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1789년 3월 4일 초대 정부가 발족할 때까지 임무를 수행했어. 토마스는 버지니아 주 대의원으로 이 연합의회에 참석했고, 외환거래율을 책정하는 위원회에서 첫 일을 시작했지. 그러면서 연합의회가 휴회할 때 공간을 메워 줄 ‘주대표 위원회’ (Committee of the States)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고, 1783-1784 회기 때에는 정부체제를 확립하는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을 하면서 오하이오 강 북서부에 위치한 방대한 영토를 9개 지역으로 나누어 새로운 주로 만들고 연방에 편입시키자고 하는 ‘1784년의 영토 관리법’(Land Ordinance of 1784)이라는 법안을 작성하기도 했지. 이때 토마스는 이들 새 영토에 노예를 금지시키자는 제안을 했지만 연합의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787년에 수정법안인 ‘북서부 영토규제법’(Northwest Ordinance of 1787)으로 통과되면서 미국의 북서부가 탄생했지.
[미애] 역시 토마스는 법제정에 늘 앞장서고 있군요!
[해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좋겠지만 주위가 점점 험악해져 가니 때로는 법이 있음으로 해서 안정되고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할 수도 있을 거야. 하물며 국가 간의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조약이 필요한 이유지. 1784년 5월 7일 연합의회에서 토마스를 미국을 대변하는 전권외교관으로 임명하여 프랑스 파리에 파견했어. 이미 그곳에 나가있는 밴저민 후렝클린과 쟌 에덤스와 같이 영국 및 여러 나라와 우호통상조약을 맺도록 협상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야. 어린 첫딸 ‘말사 펫시’(Martha Patsy. 1772-1836)와 두 하인을 대동하고 파리에 도착한 토마스는 딸을 ‘팬티몽 수도원’(Pentemont Abbey)에 입교시켜 교육을 받게 하고, 본인은 부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후렝클린을 승계하여 주 프랑스 대사로 발령받게 되었어. 향후 5년간 파리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
[미애] 토마스가 외교관 생활도 했군요! 전혀 몰랐네요.
[해월] 프랑스 대사(당시는 신생국 미국의 국력이 미약하여 현재 쓰이는 '엠바서더'(Ambassador) 라는 용어보다 약한 의미의 '미니스터'(Minister)라는 용어를 사용했음)의 직함으로 토마스가 1786년 여름 영국대사로 나가있는 쟌 에덤스를 방문했는데, 쟌이 국왕 ‘죠지 3세’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때 국왕이 두 사람을 대중 앞에서 욕보일 목적으로 외교상 결례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등’을 보이며 돌아서버리는 행동을 취했다고 해. 토마스는 왕의 ‘무례한 처사’를 겪으면서 그때부터 영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지. 반면에 죠지를 도와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프랑스의 ‘라휘엣 후작’(Marquis de Lafayette)과는 친분을 두터이 했어. 1789년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이 발발했을 때는 자신의 주택을 라휘엣과 혁명가들의 만남장소로 제공하기도 하고, 라휘엣이 ‘국민의 기본권 선언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을 작성할 때 자문을 해 주기도 했어. 파리에서 일할 때 공식 서신이 누군가에 의해 자주 개봉되어 배달되고 있음을 알게 된 토마스는 ‘암호디스크’(Jefferson Disk 또는 Wheel Cipher)라는 도구를 사용해 그때부터 모든 서류를 암호화해서 작성하기 시작했다고 해.
[미애] 주재외교관의 서신을 개봉하다니 어째 좀 무시당하는 것 같은데요? 외교행랑이 없었나 보죠?
[해월] ‘외교행랑’(diplomatic pouch)이라는 표현을 하네? 통상 국가 간 외교관계를 정립한 시점이 1961년의 ‘비애나 협약’(Vienna Convention) 때부터라고 보니까 근 200년이나 지난 후에나 외교문서를 열어보지 못하게 규정되었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원하는 대로 하는 시대였지 않았을까? 신생국 미국정도야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프랑스 대사를 마치고 1789년 9월 귀국한 토마스에게 죠지는 새 정부의 초대 ‘쟌 제이’(John Jay) 국무장관 후임으로 두 번째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자리를 제의했고 토마스가 받아들이면서 그때부터 토마스의 ‘정치적 투쟁’이 시작되었어.
[미애] 건국의 아버지가 같이 일하자는데 왜 투쟁을 해요?
[해월] 국가를 위해 일하자는 데야 너도 나도 헌신적이었지. 다만 일하는 방식이 달랐던 거야. 당시 실세였던 ‘알랙산더 헤밀턴’(Alexander Hamilton) 재무장관이 밀어붙였던 강력한 연방정부 확립, 연방정부의 국가재정 통합적 관리, 연방중앙은행설립, 그리고 국가의 수도 뉴욕 건립 등에 대해 토마스는 막무가내로 반대의사를 표현했어.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알랙산더를 지근에 두고 가깝게 된 죠지는 둘이서 하두 싸우기만 하니까 한때는 토마스를 해고시킬까도 생각했다는 거야. 토마스는 죠지가 재선 된 얼마 후 자진 사임하고 떠났어.
[미애] 얼마 전 한국의 새 정부 내 ‘윤핵관’과 ‘비윤’과의 전투가 생각이 드네요.
[해월] 하하! 역시 정치에 관심을 두더니 바로 나오네. 그건 잘 모르겠고, 토마스는 헤밀턴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 이 두 사람은 급기야 죠지가 그렇게 싫어하던 파당을 만들기 시작했어. 헤밀턴의 '연방주의파'에 대항하는 ‘민주-공화주의파’(Democratic-Republican Party)가 그것이지. 이 두 파는 세월이 가면서 소멸되고 새로운 정당으로 발전했지만 2대 쟌과 3대 토마스 대통령 당시에는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파당이었지. 첨예하게 대립하던 이 둘은 다행히 ‘1790년의 타협’(Compromise of 1790)이라고 기록된 협상에 합의하고 헤밀턴이 주장하던 연방은행 설립에 동의하는 대신 국가의 수도는 죠지와 토마스의 고향인 남쪽에 건설하기로 합의하지. 그래서 수도가 남쪽지역인 메릴렌드(Maryland) 주에 건립된 것이야. 원 계획에는 메릴렌드 주와 버지니아(Virginia) 주에서 부지를 제공했지만 후에 버지니아 주가 땅을 돌려받는 바람에 메릴렌드 주 땅만 수용하게 되었지.
[미애] 아! 그래서 워싱턴 디씨 모양이 약간 미완성된 것 같은 모습이군요?
[해월] 맞아! 원래는 다이아몬드 모습을 한 정사각형이었지만 나중에 포토멕 강(Potomac River)을 경계로 메릴렌드 땅만 사용하게 되니까 모습이 변해진 거지. 국무장관으로서 토마스는 영국의 영향력을 될 수 있으면 줄이고 종전 후 북서쪽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영국군의 조속한 퇴거와 독립전쟁 말 영국이 일방적으로 해방시킨 노예들에 대한 배상금 지급 등을 요청하고 미국이 프랑스혁명을 지원할 것 등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1793년 12월 31일부로 퇴임하여 고향집 몬티샐로로 돌아갔어.
[미애] 국무장관 토마스의 정치철학이 시대적 대세와의 불협화음으로 미국의 발전이 늦춰진 것은 아닌지요?
[해월]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진 것이 1791년 12월의 일인데 이 내용은 애초 토마스가 독립선언문에 넣으려 했던 내용이었고, 개정은 그가 국무장관에 재임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가 참여한 미국의 발전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어. 퇴임 후에도 지속적으로 정부의 정책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여 존재감을 잃지 않던 토마스는 지지층을 확보하고 1796년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했지. 그러나 쟌 애덤스에게 71 대 68 표타로 아깝게 패하면서 대신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어.
[미애] 토마스가 미국 부통령으로도 봉직했네요?
[해월] 1797년 3월 4일부터 1801년 3월 4일까지 4년간 제2대 부통령에 재직하면서 그의 전투와 헌신은 지속되었지. 특히 쟌 행정부 때 프랑스와의 외교관계가 악화되면서 큰 전쟁까지 갈뻔했었는데 이때도 토마스는 프랑스 편에 서서 쟌 행정부를 공격했어. 쟌 행정부의 군사정책, 세제정책, 이민정책 등을 반대하며 심할 정도로 연방정부에 대항하도록 선동하고 심지어 위헌적 정부라고 못 박으며 주정부의 연방탈퇴까지 책동했지. 정치적 후배이자 제자인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제4대 대통령)과 함께 소위 ‘켄터키와 버지니아 결의문’ (Kentucky and Virginia Resolutions)을 익명으로 작성해 유포시키면서 연방정부 해체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반정부 시위를 선동하는 바람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죠지도 결의문의 내용이 연방해체는 물론 강압적 조치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고 큰 우려를 표명했었어. 안타깝게도 국무장관 시절 죠지와의 잦은 의견충돌을 가졌던 토마스는 결국 1799년 죠지의 장례식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지.
[미애] 정치라는 괴물의 앞, 뒷면이 적나라하게 서로 할퀴는 모습이 느껴지네요. 얼마 전까지 독립을 위해 생과 사를 오가며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에요.
[해월]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으니 갖고 있던 보따리 내놓으라 고함지르더라고 하잖아. 정치가 추구하는 정권이라는 잘 구워진 떡 먹는 방법이 여럿 있음을 실감하게 되지. 토마스는 대통령으로 모시던(?) 쟌과 허구한 날 싸우다가 1800년 ‘미국역사에 가장 신랄한 대통령 선거라고 소문난’ 네 번째 대선에 재도전 드디어 현역 쟌을 73대 65표 차로 누르고 결국 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1800년의 혁명’ (Revolution of 1800)을 이룬 것이지.
[미애] 혁명을 이루었다고 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나요?
[해월] 미국 정치에서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그것도 정파 또는 정당의 교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개인적으로는 미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재대결’이었기도 하고. 지역적으로도 북부는 쟌을 그리고 남부는 토마스를 지지하고 뉴 욕, 뉴 저지와 팬실베니아 등 중부지역에서는 반씩 나뉘는 양상을 보였어. 선거결과 쟌은 현직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재선 되지 않은 열명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고, 토마스는 후보자 중 다수표를 얻지 못하고 같은 당 후보 ‘에런 버’(Aaron Burr) 후보와 동수의 표를 받는 바람에 미국 역사상 하원에서 대체선거로 선출된 두 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지. 또 한 사람은 1824년 선거에서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과 맞섰던 쟌 애덤스의 아들, ‘쟌 퀸지 애덤스’(John Quincy Adams) 제6대 대통령이었어.
[미애] 정권을 잡은 토마스가 대통령으로서 미국민을 위한 지도자가 되어 미국이 나아갈 길을 선명히 보여주는 정책을 폈기를 바라요.
[해월]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1801년 3월 4일 워싱턴 디씨 정오의 날씨는 화씨 55도(섭씨 13도) 정도의 포근한 날씨였지. 미국 정부가 출범한 이래 처음으로 워싱턴 디씨에서 가진 취임식이었고, 허례허식을 버리고 평범한 의상으로 임시 거처에서 상원의사당까지 측근들과 함께 걸어서 들어간 토마스는 화해, 화합과 민주주의 실천을 강조하는 취임사를 했지. “우리 모두 공화주의자이자 연방주의자이다. 이름만 다를 뿐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는 같다”라고 한 그는 “모든 사람이 정의 앞에 평등하다”라고 강조했어. 최초로 해병대 군악대가 연주를 한 그날의 취임식이 거행된 상원의사당에 쟌 애덤스는 참석하지 않았어.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45대 대통령이 46대 조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 취임식에 참석지 않아서 매우 이상해했지만 일찍부터 선례가 있었지.
[미애] 최초로 실시한 것이 많은 시점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에서 거행된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을 토마스가 했군요?
[해월] 토마스가 국내정책으로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국가부채절감’이었지. ‘위스키 소비세’를 포함한 여러 국세를 없애는 동시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부부서들을 정리했어. 평화시에는 해군의 중요성이 줄어든다고 해군력을 대폭 축소시키기도 했지. 지극히 현재의 공화당 정책과 유사한 정책을 펼쳤어.
[미애] 정부예산을 줄이고 긴축정책을 펴나간 것으로 보이는데요?
[해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줄이는 것은 줄이고 새로운 지출을 창출하기도 했지. 1802년에는 ‘평시군사설치법’ (Military Peace Establishment Act)을 제정, 미육군사관학교(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를 뉴 욕 주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에 설립하면서 군사교육과 공병대 인재양성에 나섰지. 또한 중요한 정책으로 국토를 크게 늘린 ‘루이지에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을 감행했어. 표현은 ‘루이지에나’이지만 규모면에서 당장 미국영토를 두 배를 늘리는 엄청난 규모이고 금액도 당시 금액으로 1천5백만 달러를 지급하여 애써 줄였던 국가부채를 도로 늘릴 수밖에 없는 지출이었지. 그러나 이때 얻은 미국중부의 땅은 곡창지대였으며 지하자원의 보고로 절대 후회할 수 없는 투자였어. 정권을 잡으면서 전쟁을 지속한 프랑스의 ‘나폴래옹’ (Napoleon)이 낯선 미국에서 스페인으로부터 이양받은 땅을 관리하기 힘들다고 판단, 미국의 흥정에 응한 것이지. 1803년 4월 30일 조약이 체결되었고 비록 지출은 컸지만 상원에서 24대 7로 비준에 동의할 정도로 긍정적, 역사적 사건이었지.
[미애] 토마스의 통 큰 씀씀이였네요. 지금은 모두 미국이지만 그때만 해도 땅을 사들여야 했나 보죠?
[해월] 미국이 건국될 때 국토는 동부의 13개 주가 전부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돼요! 현재 미국 본토에 모두 48개 주가 있으니까 나머지 지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내더렌드 등이 점유하고 있었고 그들 국가로부터 매입을 하던가 전쟁을 통해 흡수할 수밖에 없잖아. 토마스는 곧이어 서부개척의 선구가 될 ‘탐사대’(Corps of Discovery)를 창설하고 ‘매리위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윌리엄 클락’(William Clark)을 공동대장으로 임명하였어. 1803년부터 1806년까지 존재한 이 탐사대는 아직 미지의 세계인 서부를 태평양에 닿을 때까지 탐사하면서 그 지역의 과학적, 지리적 정보와 거주 인디언 부족들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고 기록하는 임무를 가졌지. ‘루이스와 클락의 탐사’(Lewis and Clark Expedition)로 알려진 탐사대 정보와 그 외 3차례의 다른 탐사대의 정보로 미국토 개척의 중요한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어.
[미애] 서부탐사를 하면서 미국의 지리를 파악하고 후에 미국영토로 흡수할 방안을 연구했겠죠?
[해월] 당연하지! 당시 미서부 대부분은 맥시코 등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스파이를 보내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지. 우리가 살고 있는 라스 배가스에도 멕시코와 전쟁을 하기 전에 ‘쟌 후리만트(John C. Fremont. 후에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됨)를 정탐군으로 보낸 적이 있으니까. 그러면서 원주민들하고는 억지로 평화를 유지하면서 미국에 동화되도록 교화하는 정책을 폈었어. 아니면 서쪽으로 내쫓아야 했는데 그 와중에 전투를 해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 했지. 그러나 지중해 쪽에서 미국상선을 나포하고 선원을 노예로 삼거나 인질로 잡고 보상금을 요구하던 '트리폴리'(Tripoli)의 왕과는 전투를 벌였지. 소위 ‘1차 바베리 전쟁’(First Barbary War. 1801-1805)이라 불리는 이 전쟁을 통해 이 지역의 타국가와 동맹을 맺으면서 일시 평화를 가져왔고 폭정에 대항하는 위대한 승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어.
[미애] 많이 바빴네요. 국내, 외적으로 일을 많이 했는데 국민의 반응은 어땠어요?
[해월] 토마스가 전개한 여러 정책이 미국민에게 정확히 전달되어 1804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뉴 욕 주지사 출신 ‘죠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 함께 민주-공화주의당 후보로 재출마한 토마스는 연방주의당 후보 ‘찰스 핑크니’ (Charles Cotesworth Pinckney)를 162 대 14 표로 가볍게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지.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나? 재선에 성공한 토마스에게 다방면으로 시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
[미애] 저런! 왜요? 반대파가 나타나기 시작했나요?
[해월] 한마디로 판단의 실수와 정책의 실패였다고 할 수 있지.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과 교역을 하던 두나라는 서로 볼 때에는 미국이 적과 동침하는 눈엣가시가 되어 서로 미국상인을 못살게 굴게 되었고, 영국은 해상에서 나포한 미국선원들을 영국군에 강제로 입대시키기도 했지. 이에 토마스는 의회에 자기 파가 많음을 이용해 중립정책을 벗어나 오히려 보복성 조치를 취하게 되지. 즉 1806년에 ‘수입불가법’(Non-Importation Act)을 만들고 1807년에는 ‘통상금지법’(Embargo Act)을 만들어 양국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와 교역을 금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우호적 위치를 얻고자 했어. 그러나 통상금지정책이 미국의 외교적 위치를 향상하지 못하고 경제만 악화시키면서 국제정치에 긴장만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지.
수입금지로 국내생산업의 증가를 보이기는 했지만 국내수출업자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유럽과 밀거래를 하는 상인들도 나타났지. 지지가 약했던 연방주의파에 대한 지지가 올라가면서 통상금지법을 대체하는 법이 임기말에 통과되기도 했어. 영국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드디어 1812년에는 전쟁으로 발전하는 비극을 맞이했지.
[미애] 두 번째 임기에는 토마스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은 것 같네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힘든 입장이 되었다면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가 어려웠겠죠.
[해월] 프랑스의 나폴래옹이 유럽에서 전쟁을 하는 과정에 미국의 물자가 도움이 되었겠지만 영국의 방해로 공급이 시원치 못하고, 미국은 미국대로 수출금지조치를 취하니 국내경제가 엉망이 돼 가고 있었지. 토마스는 측근으로 하여금 영국이 미국상선 및 선원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할 것을 협상토록 했으나 진척이 없었어. 여기에다 1807년에 영국의 전함이 미국 전함을 포격하는 사건이 나자 토마스는 영국선박의 미국 영해 진입을 금지시키는 선언을 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토록 명령을 내리면서 통상금지법을 발표했던 것이지. 전쟁준비 시간을 벌기 위해 내린 조치였지만 결국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갇히는 모양새가 된 토마스는 지쳤는지 그해 12월에 3번째 대통령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행정부 주요 일들을 ‘제임스 메디슨’ (James Madison) 국무장관과 ‘엘벗 겔러틴’(Albert Gallatin)에게 처리토록 일임하기 시작했어. 본인은 퇴임 후 돌아갈 집 몬티샐로 완성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것 같아. 퇴임직전에 ‘통상금지법’ 폐지를 결정하면서 자신을 “쇠사슬에서 풀려난 죄수같다'고 고달팠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지.
[미애] 대통령이란 직책은 자신을 국가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봉사의 최고직일 텐데 8년 임기를 마치면서 그 자리가 감옥이고 본인은 감옥에 갇혔던 죄수였다고 하는 것은 좀 이해가 가지 않네요. 참으로 힘든 자리인 것 같아요.
[해월]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살고 결국 그 착각으로 인해 번민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 아무리 내가 옳고 정의라 해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정치는 독선으론 해결하지 못하고 타협만이 정석이라 하지 않나?! 토마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분명 당시 정치인들 중에서 탁월해서 여러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음도 깨닫는 순간 피곤함이 한순간에 몰려왔겠지.
[미애] 토마스의 퇴임 후의 삶은 어땠어요?
[해월] 말했다시피 퇴임 후 몬티샐로로 귀향한 토마스는 아주 바쁜 삶을 살았어. 그가 1826년 7월 4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니까 1809년 3월 4일 퇴임 후 17년 4개월을 지내면서 많을 일을 할 수 있었겠지. 꿈꾸던 일이 많았던 사람이니까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거야. 그중에서 실천에 옮겨 성공한 사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공립대학교이면서 미국의 사립대 중 ‘아이비 리그’(Ivy League)라고 부르는 대학들과 견주어 결코 손색없는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UVA) 설립이었지. 당시 미국에 설립된 대학교들이 대부분 종교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거부한 토마스는 종교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타대학에서 취급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하는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어. 그는 교육이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가감 없이 기회가 제공되도록 공공기금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었지. 1819년 들어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고 주의회에서 설립허가를 내주도록 켐페인을 벌이고 건설부지를 매입했어. 건물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며 교과과정을 구체화하고 1825년 개교와 더불어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여 봉사하기 시작했지. 교내에 교회 대신 도서관을 건설하여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그가 사망하기 전 그의 장서 2,000권을 모두 이 학교 도서관에 기증했어. 학교 건물 모두를 그리스와 로마풍으로 건축설계를 함으로써 몬티샐로와 더불어 그의 취향을 마음껏 보여준 걸작을 만들었지.
[미애] 대통령을 지낸 분이 대학교를 건립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숭고한 뜻이라고 생각 드네요. 토마스 자신이 대학을 다니면서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을 테니 훌륭한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겠지요.
[해월] 물론이지. 1693년 버지니아 주 윌리엄스버그 시에 설립된 ‘University of William and Mary)는 토마스를 비롯해 제임스 먼로, 쟌 타일러(John Tyler) 같은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유명인들이 공부한 명문공립대학교지. 영국의 왕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여왕의 이름을 딴 학교로 미국 내에서 1636년에 설립된 하버드 대학교 (Harvard University) 다음으로 오래된 학교야. 다만 영국의 성공회(Anglican Church)와 연계되어 설립된 관계로 재학생은 의무적으로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 신도여야 했기 때문에 토마스가 종교와의 분리를 주장하게 된 원인제공처가 아니었나 생각해. 그래서 UVA는 종교색을 지우려고 애썼지.
[미애] 아무튼 대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할 정열이 있었으니 존경할만하지요.
[해월] 그럼! 그리고 토마스는 죠지와 쟌 두 행정부에서 일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척을 지고 살게 되었는데 퇴임한 후 다시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지. 14년간 자그마치 158번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자랑하고 위로하며 미국의 역할을 토론했다고 해. 특히 쟌과는 혁명의 동지로 출발해 정적이 되었으나 늙어서는 다시 친구가 되어 살다가 미국독립선언 50주년이 되는 1826년 7월 4일 같은 날 사망함으로써 같이 손잡고 하늘나라로 갔을 거야. 부러울만한 인간관계였어.
[미애]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선생님? 당대를 풍미한 멋있는 분들이네요. 그런데 앞서서 토마스의 자식얘기를 나중에 하시겠다 하셨는데 무슨 소식이 있어요?
[해월] 그랬지? 앞서 부인 말사와 사이에 아들 하나를 포함해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네 아이들은 일찍 사망하고 두 딸만 살아남았다고 했었지? 그런데 장인이 사망하면서 딸 부부에게 유산으로 토지와 노예들을 상속했는데, 그들 노예 중에는 그가 살았을 때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노예가 낳은 자식들이 섞여 있었다고 해. 두 아들과 딸인데 딸의 이름이 ‘셀리 해밍스’(Sally Hemings)였다고 하지. 부인 말사와는 이복형제가 되는 셈이야. 토마스가 프랑스 대사로 나가있을 때 대사관저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장인의 딸인 그 셀리를 데려갔고 둘 사이에 성적관계를 가지게 되어 또 여러 아이들을 낳았다고 해.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친족관계를 드디어 1998년에 와서 일단의 과학자들이 토마스의 삼촌의 후손들과 셀리의 아들 ‘애스턴 해밍스’(Eston Hemings)의 후손 간 유전자(Y-DNA) 검사를 한 결과 양쪽의 유전자의 남자 쪽 유전자가 같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거야. 물론 설왕설래하는 이론들이지만 역사가들 대부분이 합의하는 부분은 토마스가 노예이자 자기 본부인의 이복동생인 셀리 헤밍스와 성적관계를 가졌고 따라서 그녀의 아들인 애스턴 해밍스의 아버지이라는 사실이지. 셀리는 토마스 사후 공식적으로 해방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의 딸 ‘말사’의 허락으로 샤롯츠빌에서 자유인으로 두 아들과 살다 1835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몬티샐로를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는 ‘몬티샐로협회’ (Monticello Association)에서는 셀리의 후손들이 그녀를 몬티샐로에 뭏히게 해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거절하고 있지.
[미애] 흑인이면서 토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네요. 그런데 토마스가 무언가를 발명도 했다면서요?
[해월] 키가 6 feet 2.5 inches(약 190 cm)였던 토마스는 아이스크림을 아주 좋아해서 손님 대접에도 내놨을 뿐만 아니라 몬티샐로에도 아이스크림 스탠드를 만들었다고 해. 특히 유럽식 파스타인 ‘마카로니와 치즈’ (Macaroni and cheese)와 감자튀김인 ‘후랜치 후라이스’(French fries) 그리고 샴페인(champagne)을 미국에 들여와 퍼트린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지.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던 토마스는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태리어, 독일어와 스페인어 등을 교습과 자습을 통해 익히면서 읽고 쓰고 말하기에 익숙했었어. 미국 내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관심도 많이 가졌던 토마스는 한때 50개 원주민 언어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고 해. 그런 토마스였으니 주위에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창조하기도 하고 기왕에 있는 물건들을 개량하기도 했지. 발명이라고 하기에는 본인도 좀 쑥스러웠던지 아무것도 특허출원을 하진 않았어. 주목할 만한 것은 ‘걸음수 계산기’(pedometer)와 ‘글씨 복사기’(polygraph), ‘발판 쟁기’(moldboard plow) 등을 개량하여 사용한 것이고, 독립선언문 작성할 때는 ‘회전의자’(swivel chair)를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고 해. 여러 번에 걸친 발명과 창의력을 높이 산 상아탑에서 그에게 수차례 명예법학박사를 수여했다고 하지.
[미애] 저도 ‘맥엔치즈’와 ‘후랜치 후라이스’ 좋아하는데 토마스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이었군요? 견문을 넓히는 것이 그래서 좋은 거겠지요. 앞서 발전한 문명을 도입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닐 테니까요. 토마스의 마지막은 어땠어요, 선생님?
[해월] 1825년 7월의 토마스에게는 10만 달러에 달하는 빚과 류마티스, 장과 요도 장애등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 한 번은 집 앞에 있는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와 팔을 다치기도 했다네. 다음 해 6월에는 몸져누었고 7월 3일에는 고열이 나면서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식 초청에도 불참을 통지했지. 다음날인 7월 4일 오후 12시 50분에 83세를 일기로 가족의 곁을 떠났어. 그의 유해는 몬티샐로 본가의 묘지에 묻혀있고, 그가 직접 쓴 비문이 들어있는 비석이 서있어.
“여기 미국의 독립선언문, 종교의 자유를 위한 버지니아 법령을 작성한 저자이며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자인 토마스 재퍼슨이 잠들다”
[미애] 자기의 삶과 주검을 후세에 표현하고픈 글로 직접 쓴다는 것이 새삼스럽네요.
[해월] 그가 쓴 비문에는 그의 정치적 역할이나 대통령이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정치인으로서의 토마스로 기억되고 싶지 않었던 것 같아.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정치력을 높이 사서 나중에 워싱턴 디씨 인공호수인 ‘타이들 베이진’(Tidal Basin) 옆에 그의 기념관인 ‘재퍼슨 매모리얼’(Jefferson Memorial)을 건립하고, ‘마운트 러쉬모어’( Mount Rushmore)에 그의 흉상을 다른 세명의 대통령들과 함께 조각해 넣었으며, 의회도서관 본관을 그의 이름을 따 ‘토마스 재퍼슨 빌딩’(Thomas Jefferson Building)이라 명명했지.
2달러 지폐와 1달러 은동전, 그리고 5센트(nickel) 동전 등에도 그의 얼굴을 넣어 기리고 있지.
[미애] 독립선언문 작성자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네요.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겠지요. 동시에 종교의 자유를 끝까지 설파한 것을 보면 종교가로서의 심오한 깨우침도 있는 것인가요?
[해월] 깨우침이 어떤 것이었든 우리가 관심 둘 것은 그가 가진 종교관 자체이지. 그가 말하는 종교의 자유란 '종교로부터의 자유' 또는 '종교와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해. 우선 그는 어렸을 때 세례를 받고 딸들과 함께 영국성공회(Episcopal Church) 교회에 다녔어. 성인이 된 토마스는 기독교에서 예수(Jesus)의 가르침이 제자 ‘폴’(Paul. 바오로)에 의해 모호하게 왜곡되었고 훼손되었다고 믿고 있어. 기독교 사제들이 진솔한 종교를 그들만의 수수께끼와 은어로 신도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고 비난하지. 그러면서 그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인이 믿는 ‘삼위일체’와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 동정녀 마리아라는 주장, 예수의 기적행위, 예수의 부활, 예수의 속죄 그리고 원죄(original sin) 등의 원리를 부정했어. 원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당한 말이라고 믿었지.
[미애] 토마스 재퍼슨의 기독교에 대한 종교관이 일반적 정통성을 벗어나있는 것 아닌가요?
[해월] 토마스의 이 같은 비정통적 종교관은 그가 신약성서를 읽고 나서 위에서 말한 예수에 의한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 즉 부활이나 기적 그리고 예수를 신성화한 내용들을 삭제하고 작성한 별도의 문서를 읽으면 알 수 있을 거야. 첫 번째 문서는 1804년 완성한 ‘나자렛 예수의 철학’(The Philosophy of Jesus of Nazareth)이라는 책인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아. 두 번째 작품은 1820년에 완성한 ‘나자렛 예수의 생과 교훈’(The Life and Morals of Jesus of Nazareth)이라는 책으로 ‘재퍼슨의 성경책’(Jefferson Bible)이라는 것이지.
그의 기독교에 대한 종교관에 상관없이 18세기 미국의 운명을 결정한 거목들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 재퍼슨은 아직도 곁에 우뚝 서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으면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듯 보입니다.
3대 대통령 토마스재퍼슨의 공식 서명입니다.
* 본 에피소드 전면에 게재된 사진은 토마스 재퍼슨이 디자인한 버지니아 주 의회의사당 건물입니다.